2017년 여름, KB금융그룹 임원회의에서 윤종규 회장은 '뚱딴지같은 소리'를 했다. 네이버 자회사 라인이 일본에서 알뜰폰을 출시하고, 구글이 미국 일부 주(州)에서 역시 알뜰폰 사업에 나서는 등 테크 기업들이 통신 사업에 나선다는 소식을 접한 뒤였다. 윤 회장은 왜 이들이 알뜰폰 시장에 진출하는지 궁금해하던 터였다. 그는 스마트폰에 꽂는 유심(USIM·범용 가입자 식별 모듈)에 주목했다. 이동통신 가입자의 정보를 담은 이 손톱 크기의 칩은 높은 보안성, 안전성, 편리성을 갖춘 일종의 초소형 PC다. 개인 정보를 담고 남은 자리에 각종 금융 정보를 담으면 통신과 금융을 결합한 금융 서비스가 가능하지 않겠냐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우리나라 대표 금융사 KB가 통신 사업으로 선을 넘으려는 비밀 프로젝트는 이렇게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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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금융이 10월 중에 LG유플러스 통신망을 이용한 MVNO(가상이동통신망) 서비스, 일명 '알뜰폰' 사업에 진출한다. 5G 요금제는 최저가 5000원, LTE 요금제는 최저 무료로 제공될 예정이다. 브랜드는 국민은행 디지털금융 브랜드 '리브(Liiv)'와 모바일의 M을 합친 '리브M'으로 정해졌다. KB의 신사업 진출 소식에 통신업계와 금융업계는 발칵 뒤집혔다. 경쟁 은행들이 염치 불구하고 직접 자초지종을 묻기도 했다. 지난 2년간 KB금융이 비밀리에 진행한 신사업 프로젝트가 곧 세상에 나올 채비를 마쳤다.
◇천덕꾸러기 '알뜰폰' 프로젝트에 빛이
알뜰폰 사업을 검토해보라는 지시가 떨어졌지만, 임직원들은 시큰둥했다. 사실 KB금융그룹 안에 MVNO 같은 통신 용어를 아는 임직원 자체가 드물었다. 저가 요금, 구형 단말기를 앞세운 알뜰폰은 '할매폰' '할배폰'으로 인식돼 KB금융 이미지에 별 도움이 안 될 거라는 우려도 컸다. 윤 회장이 임직원들과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건 그가 KT 사외이사로 활동한 경험 덕분이다. 그는 국민은행 부행장, 김앤장법률사무소 상임고문을 지낸 후 2006년 3월부터 2009년 3월까지 KT 사외이사를 지냈다. 그룹 안에서 통신 시장을 가장 잘 아는 사람도 그였다.
윤 회장은 스마트폰을 지배하지 못하면 앞으로의 금융업은 존립 기반 자체가 흔들릴 것이라는 확고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제까지는 땅 위에 지점을 세워 장사해 왔지만, 앞으로는 스마트폰이 움직이는 지점인 시대가 된다. 모바일을 잘 알아야 살아남을 수 있다." 특히 카카오뱅크나 토스만으로도 불편함 없이 금융 생활을 하는 요즘 젊은 세대가 국민은행을 한 번이라도 쳐다보게 하려면 '스마트폰 통신 시장' 공략이 필수라고 봤다.
구글의 알뜰폰 구글 Fi |
그러나 금융+통신 결합 사업 아이디어는 현실의 벽에 막혔다. 은행법상 통신업은 은행 고유 업무와 관련이 없기 때문에 부수 업무로 인정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일단 실험적으로 내놓은 게 작년 8월 출시한 'KB스타폰'이었다. 삼성전자 신형 스마트폰을 개통할 때 은행·증권·카드 등 KB금융 7개 계열사 앱을 탑재하는 수준의 제휴였다. 고객으로선 그다지 손에 잡히는 혜택이 없었기에, 스타폰은 1년간 단 3000대 개통되는 데 그쳤다. 국민은행 1만7000여 임직원의 20%도 안 되는 실적이다.
그래도 윤 회장은 사업을 접지 않았다. 모바일·통신을 모르면 망한다는 위기감 속에 세계 주요 금융사들도 알뜰폰 사업에 뛰어드는 것을 보면서 곧 흐름이 온다고 봤다. 올 들어 당국의 분위기가 확 바뀌고 '규제 샌드박스'를 모집한다는 소식에 KB는 사업 아이디어를 들고 다시 금융위로 뛰어갔다. 결국 금융위는 지난 4월, 2년 한시로 국민은행에 MVNO 사업을 허용하는 규제 특례를 적용해주기로 했다.
◇KB금융 충성 고객, 통신요금 '무료'
KB의 선을 넘는 시도가 성공할지는 KB가 얼마나 매력적인 통신+금융 결합 상품을 내놓느냐에 달렸다. KB는 국민은행을 통해 각종 공과금을 이체하고 금융 거래를 많이 하는 충성 고객일수록 통신요금을 더 많이 할인해주는 '금융 할인'을 준비 중이다. 이용 실적에 따라 승급되는 'KB스타클럽' 회원이면 일단 금융 할인 대상이 된다. 여기에 매달 KB국민카드 사용액에 따라 할인액을 더하면 LTE(4G) 요금을 최저 무료까지 낮출 수 있다. 기존 통신사 LTE 요금 대비 60% 수준까지 요금을 낮추는 게 목표다.
알뜰폰 사업자로는 처음으로 5G 서비스를 선보이는 것도 특징이다. KB가 SKT, KT, LG 통신 3사에 모두 아이디어를 들고 갔지만, LG만 5G망을 열어주기로 했다. 5G 요금제 역시 금융 할인을 적용하면 최저 5000원도 가능할 것으로 KB는 전망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 알뜰폰으로 금융 거래를 하면 공인인증서를 꺼내 재차 개인정보를 확인해야 하는 불편함이 없다는 점을 KB는 강조한다. 이미 유심 안에 이 정보가 다 들어 있기 때문이다.
허인 국민은행장은 "금융과 통신의 경계를 허문 '리브 모바일'이 통신과 금융시장에 새 바람을 일으킬 것"이라며 "고객들에게 통신비 인하는 물론 혁신적인 디지털을 경험할 수 있도록 차별화된 가치를 제공하겠다"고 말했다.
["모바일 주도권 잡아라" 해외 은행들도 알뜰폰 사업]
글로벌 IT 기업과 금융사들은 모바일 주도권 경쟁에 사활을 걸고 있다. 빅테크(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거대 IT기업) 업체들이 간편 결제와 신용·대출 시장에 앞다퉈 진출하면서 설 곳을 잃어가는 금융사들은 더욱 다급한 상황이다. 씨티그룹은 지난해 발간한 '미래의 은행' 보고서에서 "기존 은행들은 빅테크, 핀테크 기업들에 전통적인 결제, 투자 관련 매출액의 3분의 1~절반가량을 뺏길 것"이라고 내다보기도 했다.
호주 최대 금융그룹 맥쿼리가 최근 호주 최대 통신사 텔스트라의 모바일 인프라를 빌려 알뜰폰(MVNO) 사업을 시작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한 달에 10달러부터 시작하는 저렴한 요금제를 내세운 맥쿼리 통신사업 브랜드는 '누 모바일(nu mobile)'. 호주머니가 얇은 청년층을 겨냥했다. 신제품 스마트폰 가격이 2000달러를 넘을 정도로 비싸기 때문에 중고폰을 활용한 게 차별화 포인트다. 중고 갤럭시S7폰(32기가)의 경우 240달러, 중고 아이폰7(32기가)은 360달러에 판매하면서 저렴한 요금제를 결합했다. 호주 언론들은 "비싼 폰, 비싼 요금제에서 소비자들을 해방시키는 대안 전략"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주목할 부분은 누 모바일 어디에도 맥쿼리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맥쿼리는 철저히 뒤에 숨어 유심 주도권을 쥔 채 젊은 층을 상대로 스마트폰 금융 서비스 저변을 확대해가는 전략을 택했다.
금융사들이 알뜰폰 시장에 진출하기 시작한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됐다. 네덜란드 라보뱅크의 '라보 모바일'(2006년), 이탈리아 방코포스타의 '포스트 모바일'(2007) 등을 시작으로 남아공, 헝가리, 러시아 등지에서도 은행이 직접 통신망을 빌려 알뜰폰 사업에 발을 담갔다.
KB국민은행 관계자는 "이제 막 경제활동을 시작한 밀레니얼 세대는 시중은행 계좌 없이 카카오뱅크·토스만으로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는 시대가 됐다"며 "기존에 IT 기업과 은행이 다양한 제휴 관계를 맺었지만, 가장 확실하게 주도권을 쥐고 금융+통신 결합 서비스를 디자인하려면 한 차원 넘어선 시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윤종규는 누구
윤 회장 앞에 '스마트한'이란 수식어가 붙는 것은 비단 그가 은행원 생활을 하다 회계사 자격증을 따고 행정고시에도 패스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삼일회계법인 부대표, 김앤장 고문, KT 사외이사, 국민은행 부행장과 행장 등을 거쳐 2014년 말 KB금융그룹 회장 겸 은행장에 오른 이후 LIG손보, 현대증권 등 굵직한 M&A를 성공시키며 전략가로서 면모를 확인시켰다. 이번 통신사업 진출로 윤 회장은 또 다른 승부수를 던졌다.
☞알뜰폰(MVNO)
대기업 통신 3사의 이동통신망(網)을 도매가에 빌려 기존 통신사보다 30%가량 저렴한 가격에 동일한 품질의 통신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업. CJ헬로의 '헬로모바일', 에스원의 '안심모바일' 등 수십 곳이 영업 중이다. 정부가 가계 통신비 절감을 위해 2011년 7월 제도를 도입했다.
김은정 기자(ejkim@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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