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 1%도 없지만, 노력… 설계없이 단번에 쓴다"
"정치인, 작가는 부동산 투자 안돼… 후대 밥그릇 뺏는 일"
"한국 소설... 문학성만 추구해 힘 잃어"
"토해낼 말 있어야 작가… 한국인, 콘텐츠 전파 능력 세계적"
"인생 의미? 당대를 살아 다음 세대를 잇는 것"
새소설 ‘직지-아모르 마네트’를 출간한 김진명(62살). 출판 불황 시대에, 보기 드문 밀리언셀러 작가. 젊은 세대에는 ‘황태자비 납치사건'으로 더 유명하다./사진=김지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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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된 문서만으로 찬란한 과거를 복원할 수 없을 때, 육하원칙의 기술만으로는 궁지에 몰린 인간의 사명을 설명할 수 없을 때, 조급한 추궁의 세계가 아닌 거대한 미궁의 세계와 만나고 싶을 때, 의혹으로 가득찬 팩트의 국경을 넘는다. 팩트에 픽션을 더한, 팩션 소설은 그렇게 탄생한다.
우리 시대 가장 사랑받는 팩션 소설가 김진명을 만났다.
김진명은 1993년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로 괴물처럼 세상에 등장했다. 북핵을 둘러싼 한일관계의 지형도를 파격적으로 그린 첫 소설은 습작 없이 완성됐고, 700만부가 팔려나갔다. 통념을 뒤집는 한반도 역사 해석, 현실적인 문제 제기, 영화적인 플롯은 내는 소설마다 그 앞에 독자들을 끌어앉혔다. 동북아 패권의 향배를 그린 ‘싸드' ‘미중전쟁'으로 소름끼칠만큼 정확하게 당대를 예언하는 작가라는 별칭까지 얻었다.
강력한 이야기의 흡인력으로 수백만 독자들을 가졌으나, 아이러니하게 ‘단 한 명의 평론가도 갖지 못했다'. 소설이 서점에서 점점 독자들의 외면을 받는 동안, 문단 바깥에서 김진명은 최근 10년간 한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소설가가 됐다. 그렇게 김진명은 한국 출판계에 스스로 장르가 되었다.
지난 8월 발간된 ‘직지-아모르마네트'는 직지와 한글이 지식혁명의 씨앗이 되는 과정을 추적했다. 출간 즉시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진입했으며, 한 달이 조금 넘은 지금까지 17만부가 팔렸다.
-실례지만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몇 살에 썼습니까?
"1993년, 36살에 썼어요."
-장편 소설가로 26년을 살았군요. ‘김진명은 장르가 김진명이다’라는 평가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요?
그의 문제 의식은 한국 사회가 어떻게 하면 보다 나은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인가다. 과감한 주제와 속도감 있는 문체로 독자들을 빨아들인다. /사진=김지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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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명을 쓰는 건 의도적인 건가요?
"네. 팩트를 다루면서 가명을 쓴다는 건 자기 이야기에 자신이 없다는 얘기에요. 실명은 ‘내가 쓰는 소설은 그 안에서 정확하고 당당하다’는 선언입니다."
-‘직지-아모르마네트(이하 직지)'가 발표한 작품 중 가장 만족도가 높다고 들었습니다만.
안타깝게도 우리 문화에 뿌리깊게 배어있는 게 조선의 유교문화잖아요. 유교의 바탕이 된 ‘충효예’를 풀이하면 ‘충은 너를 임금에게 바쳐라, 효는 너를 아버지에게 바쳐라, 예는 너를 남에게 바쳐라’거든요. 이런 사회에서는 자아나 자기를 주장하면 호되게 곤욕을 치뤘어요."
-개인이 멸종된 시대였으니까요.
"맞습니다. 지금은 누구나 양반이지만, 조선 시대엔 4%만 양반이었어요. 이외에 96%의 백성들이 자아를 주장하면 난리가 났어요. 500년 동안 그렇게 자아가 묻힌 채로 중세 암흑보다 더한 암흑이 이어졌어요. 국가와 사회와 개인의 정체성이 사라진 채 일본 지배를 겪었고, 정신 없이 압축 성장을 거쳤어요. 결과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의탁할 가치 규범이 사라진 겁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고구려'를 썼고 ‘직지'를 썼습니다. 우리가 가졌던 나라 중 굴종적인 조선에서 되도록 멀리 갔지요. 현재를 둘러보세요. 공통된 가치관이 없으면 사회는 돈을 최우선의 가치로 삼습니다.
선악의 판단도 없이 빨리 돈만 벌면 된다고 생각하죠. 경제가 발전해도 함께 행복하지 않고 갈등이 깊어지는 건, 세대와 진영을 떠나 공감할 수 있는 가치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걸 찾는 건 정치가가 아닌 작가의 몫이에요."
임무를 부여받은 장수처럼 충혈된 눈에 불꽃이 일었다. ‘고구려'를 끝내면 바로 일제 강점기 시절 저항문학가와 독립운동가를 쓸 계획이었다. 저열한 물질주의와 편협한 진영주의가 아닌 꼿꼿하고 칼칼한 정신세계를 쓰고 싶었다고.
김진명은 1957년 부산에서 태어나 한국외국어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입시 공부는 제쳐두고 철학, 역사 분야의 책을 읽으며 문리를 깨쳤다./사진=김지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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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어느날 뉴스에서 운명처럼 ‘직지'를 보았다.
-어떤 뉴스였죠?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대학의 드로니용이란 서지학자가 ‘직지’와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를 3차원(3D) 전자현미경으로 분석했어요. 그 결과 두 책 모두 종이 표면에 똑같은 모래 알갱이 흔적이 있다는 뉴스였어요. ‘직지’는 구텐베르크가 처음 찍은 ‘42행 성서'보다 최소 78년이 앞서 있어요. 그렇다면 우리 조상 중 누군가가 서구에 가서 직지를 찍어낸 그 금속활자 기술(모래를 사용한 주물 금형 기법)을 전파했을 수도 있겠다... 이런 상상을 해본 거지요."
-가정해 볼 수 있지요.
"그런데 당시에 그 뉴스의 크기가 너무 작게 처리됐어요. 제가 보기엔 대단한 사건이었는데, 아무도 의미 부여를 안하더라고."
-왜 그랬을까요?
"가치에 대한 자기결정성이 부족해서죠. 과거 중국의 승인을 기다렸듯, 밖에서 인정해줘야 ‘우리의 훌륭함'을 깨닫는 식이에요. 자기 나라 문화를 가장 잘 아는 건 자국민인데, 서구에서 ‘개런티'를 해줘야 뒤늦게 흥분해서 박수를 칩니다. 파고들면 들수록 ‘직지'는 대단한 문화유산이었어요."
-‘직지'가 백운화상이 에센스만 요약한 고려의 위대한 마음 경전이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텍스트 뿐 아닙니다. 일관된 흐름이 있어요. 다라니경은 세계 최고(古)의 목판본이고, 팔만대장경은 20세기 불교학에서 손꼽히는 세계 최대의 기록문화입니다. 직지심체요절은 그 맥을 잇는 세계 최고(古)의 금속활자본이죠. 그 뒤에 한글이 있어요. 한글은 언어학자들이 꼽는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글자예요. 그 전통이 메모리 반도체 세계 1위로 이어진 겁니다.
무슨 뜻이냐? 인류의 지성사에서 한국인은 컨텐츠를 기록하고 전파하는데 가장 뛰어난 민족이라는 겁니다. 금속활자, 한글, 반도체는 지식혁명의 놀라운 물결을 이끌어냈어요. 저는 이런 한국인의 정체성을 우리 스스로 세계에 알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간행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 직지심체요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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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특징은 남들이 절대 먼저 찾아내 앞세워주지 않는다고, 그가 목소리를 높였다. 듣고보니 놀라운 통찰이다.
-금속활자, 한글, 메모리반도체가 한 구슬에 꿰어질 때 ‘유레카!’를 외쳤겠습니다.
"(웃으며)조용히 막걸리 한 잔 마셨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외에서의 ‘인정치'가 궁금합니다.
"유네스코가 세계기록문화유산 보호에 공헌한 사람에게 주는 상의 이름이 ‘직지상'이에요. 문맹퇴치에 이바지한 단체에 주는 상이 ‘세종상'이고요. 그게 세계의 인정이죠. 정보를 저장하는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한국의 활약은 전 세계가 이미 알고 있고요."
-한국인의 DNA에 ‘지식과 정보를 기록하고 전달하는 특별한 재능'이 있다는 거군요. 한국이 IT강국이 된 것도 그런 흐름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본질로 더 들어가보지요. 한글은 소수의 기득권이 누리던 지식을 다수의 백성과 나누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졌어요. 전통적으로 글자는 자연발생적이에요. 세계 어디에도 왕이 백성을 위해 글자를 창조한 유례가 없어요. 한글은 세종이 ‘무지한 백성을 불쌍히 여겨' 만들었습니다. 작게 보면 ‘애민정신'이지만, 크게 보면 ‘인류애'입니다.
인간이 뭡니까? 욕망과 본능, 이기심을 뛰어넘을 수 있는 존재에요. 나 하나 헌신해서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하고싶다는, 이타심이 우리 핏속에 있어요. 그런데 소수의 가진 자가 누리던 지식을 전 인류의 동행으로 만든 그 행위를, 우리가, 한국인이 처음 해낸 거죠. 지식 산업의 최고 무기인 활자본, 글자, 반도체가 그 물증이고요."
‘직지'에는 김진명 소설 최초로 품위와 선을 지키는 여성 주인공이 등장한다./사진=김지호 기자 |
소설 ‘직지-아모르마네트'는 라틴어를 전공한 한국의 한 대학 교수가 기괴하게 살해당한 사건에서 시작된다. 살해당한 교수의 행적을 쫓던 여기자는 ‘직지'에 관한 탐사취재로 반경을 넓혀가고, 점점 소설의 무대는 15세기 로마와 세종 시대, 현대의 스트라스부르크와 아비뇽까지 확장된다.
살인 사건의 서스펜스가 배경 음악처럼 깔린 채, 페이지는 하나의 프레임이 되어 15세기 로마 감옥과 끔찍한 마녀 사냥 광경, 모래 위로 뜨거운 금속 주물이 쏟아지는 조판의 풍경을 교차 편집 한다.
몰래 한글을 만드는 임금 세종과 총명한 금속활자공 여인 ‘은수’의 로맨틱한 무드, 성경을 독식하려는 교황청 주교와 도심 곳곳에 무리 지은 필사업자들, 뾰족 구두를 신은 멋장이 인쇄사업가 구텐베르크의 활약은 이 이야기에 풍속화의 재미를 더한다.
소설의 목표가 ‘계몽’인 것은 작가의 결연한 의도지만, 그 어떤 주장이나 논리보다 마음을 끄는 건 서사의 마지막 갈피에서 메아리치던 ‘활자장인' 은수의 한마디였다. 조선에서 명나라로, 로마로, 아비뇽으로 이어지는 험한 여정의 끝, 세낭크수도원에서 묵언 수행하던 그녀가, 55년만에 들판에 나와 외친 한마디는 이것이다.
"상감마마, 새 글자는 완성하셨는지요?"
-세종과 은수의 자아를 초월한 그 사랑이 아름답더군요.
"세종은 은수를 한 인간으로 존중하고 아껴줬어요. 술상을 앞에 두고 ‘첫잔은 네 낭군에게 따르라’고 한 건 은수를 보호하는 마음의 표현이죠."
-임금과 백성이 서로를 지켜주고 싶어했고 그 마음의 역동이 한글로 모아졌다… 사랑의 사이즈가 참으로 큽니다.
"그랬기에 은수가 이국만리에서 55년 만에 입을 벌려 했던 첫 말이 ‘상감마마, 새 글자는 완성하셨는지요’였겠지요. 저는 소설의 제목을 ‘직지-아모르마네트'라고 지었어요. 아모르마네트는 라틴어로 ‘사랑은 남는다'라는 뜻입니다(웃음)."
-선생도 ‘공동체를 향한 안타까운 마음’에 소설을 쓰는 것 같습니다.
"(잠시 허공을 쳐다보다)어찌보면 나의 본령은 철학이에요. 세상이 무엇인지,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알려주고 싶어서 써요."
“운전할 땐 말 달리듯 스피드에 집착합니다. 알고보면 비겁한 장수예요. 큰 장수는 생각이 우직해야 하는데, 저는 좀 세심한 편입니다.”/사진=김지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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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한 권씩 책을 쓰는 힘은 대학 시절 독서 습관에서 나왔다고 들었어요. 일명 ‘무서운 독서’로 ‘문리가 트였다’고요.
"그랬지요. 그냥 독서는 소용 없습니다. 단순히 정보 습득을 위해서라면 스마트폰을 보면 되죠. 독서는 생각하는 힘을 키우는 행위예요. 타인의 생각의 경로를 관찰해서 내 생각의 힘을 키워내는 거죠. 인간은 무언가를 ‘알고 깨달을 때' 진정한 행복을 느껴요. 알면 알수록 인류는 선량해집니다. 지성의 근본도 선량이에요. 그래서 지식이 늘어 가면 필연적으로 공존과 동행의 길을 찾아요."
-‘문리’의 실체가 동행이다...
"동행이 극화된 마음이 희생이고요. 인간은 남을 위해 나를 헌신할 때 느끼는 만족도가 가장 높아요. 인류는 그런 사람에게 경의를 표하죠. 인간에게 학점을 매긴다면 부자나 대통령에게 A+를 줄까요? 아닙니다. 가난하지만 남에게 봉사를 한 사람에게 A+를 주죠. 그 길을 가는데 가장 큰 무기가 ‘글자'예요. 글자로 지식이 전파돼야 생각의 힘이 생기니까요."
-권할만한 독서법이 있나요?
"독서는 지루한 행위예요. 좋은 책일수록 지루하죠. 독서를 재미나게 느끼려면, 누군가 독서행위 자체를 칭찬해줘야 해요. 좋은 책을 지정해주는 건 좋지 않아요. 어떤 책이든 읽는다는 게 중요합니다."
-재능으로 쓰는 사람, 열정으로 토해내는 사람을 구분하며, 선생은 후자라고 했습니다.
"큰 글은 재능에서 나오지 않아요. 작가에게 재능은 어린 시기에 속해요. 프로의 세계에 들어가면 재능보다는 오직 노력이죠. 궁극에는 글재주 있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에 쏟아낼 것이 있는 사람이 작가로 남아요. 그런 의미에서 신춘문예를 통과하고도 큰 작품이 안 나오는 사람은, 세상에 토해낼 것이 없는 건 아니었나 돌아봐야죠."
-스스로 정말 재능이 없다고 생각하나요?
"(단호하게)저는 단 1%도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게 천재니 뭐니 하시는 분들이 세상에서 제일 부담스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쓰는 비결이 있습니까? 존 스튜어트 밀에게 영감받아 간결하게 쓰려 한다고요.
"글은 쉬울수록 좋아요. 최고의 선생은 쉬운 언어로 설명하지요. 엉터리 수학 선생이 어렵게 가르쳐서 아이들을 ‘수포자'로 만드는 거 아닙니까? 작가도 독자가 이해하기 쉽게 써야 해요."
-대중작가라는 호칭에는 만족합니까?
"비하하려고 붙였는지는 모르지만,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문학은 고고한 세계’라는 생각은 옳지 않아요. 예나 지금이나 크고 높은 사람은 아랫사람과 잘 소통했어요."
대중의 폭발적인 반응을 얻은 데뷔작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사진=김지호 기자 |
-‘과도하고 거친 상상력의 작가’라거나 ‘국수주의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만.
"남에게 칭찬받는 걸 안좋아합니다. 칭찬은 금방 비난이 돼서 돌아오죠. 양날의 검입니다. 평가는 오직 독자의 몫입니다. 문학 권위주의 사회에서는 누군가 추천하면, 주로 그 휘하에 작가들이 모여들더군요. 으샤으샤 집단으로 몰려다니면서. 작가는 외로워야해요. 자기와의 대면이니, 고독과 가난이 천형이죠."
-고독은 이해하지만 선생은 데뷔작부터 밀리언셀러, 부유한 작가에 속하지 않습니까?
"(웃으며)저는 돈을 쌓아 두지 않아요. 언젠가 한 대작가와 그가 소유한 강남의 큰 빌딩에서 만났는데, 뭔가 코드가 안 맞았어요. 그분이 돈이 많아서 그런가, 했어요(웃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정치인이나 정신을 쓰는 작가는 부동산을 샀다 팔았다 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해요. 땅값을 올리는 건 당장 돈없는 사람의 터전은 물론이고, 다음 세대의 밥상을 뺏는 일이죠."
몇 년 전 부당한 부동산 투기로 거부가 된 한 거물 정치인을 법원에 고소한 일도 있다고 했다. 남을 고발한 적은 일생에 그때 딱 한번이었다.
-흥미로운 통계가 있습니다. 얼마전 사놓고 끝까지 읽은 책을 조사한 예스24의 ‘호킹지수’에서 ‘미중전쟁'이 1위를 차지했더군요. 나머지 순위는 부동산, 재테크, 다이어트 책이었어요.
"그런 통계가 있었나요? 허허. 과거에 출판은 소설과 비소설로 분류가 됐어요. 지금은 소설은 찬밥 신세고, 비소설분야가 훨씬 더 다양해지고 강력해졌더군요."
-소설은 왜 힘을 잃었을까요?
"문체와 글의 아름다움을 논외로 하면 공적인 글에는 2종류가 있어요. 하나는 언론 기사와 논문, 또 하나는 소설이에요. 기사와 논문은 진실이 본질이에요. 진실에서 어긋나면 이상한 글이죠. 반면 소설은 대놓고 거짓을 쓰는 행위죠. 아이러니하게도 그래서 소설은 진실을 추구하는 데 굉장히 중요한 디바이스예요.
팩트의 나열만으로 할 수 없는 일, 권위와 감시, 명예 훼손, 각종 법적 제재 때문에 쓸 수 없는 진실을 소설은 쓸 수 있어요. 그 영역을 한국 문학이 간과했어요. 문학적 향기만 추구하면서요. 그래서 작가인 저는 평론가가 아니라 당대의 독자들만 보고 쓰는 거죠."
-오직 독자만?
"당연하죠. 다만 작가가 거짓말을 하려면 작가적 양심이 있어야해요. 인류가 베풀어준 특혜를 받았으니 ‘너 자신이 판관이 돼서 배후의 진실을 드러내라'는 거죠."
-그 독자가 선생을 실망시킬 때는 없던가요?
"독자는 변덕쟁이죠(웃음). 평생 같이 갈 것 같다가도 조금만 부실하면 바로 등을 돌려요. 제일 힘든 게 독자를 속이는 거예요. 독자를 속이는 작가는 어리석습니다. 독자는 누구보다 훌륭한 스승이에요."
어떤 탐사보도나 보고서에도 나온 적 없는 김진명만의 예리한 동북아 정세 분석 소설 ‘미중전쟁'. /사진=김지호 기자 |
-상을 받은 적은 없습니까?
"없어요. 논산 훈련소에서 최우수 훈련병상을 받은 적은 있습니다. 받기 어려운 상이었어요(웃음)."
-최고의 페이지터너로 손꼽히는데, 글의 설계는 어떻게 합니까?
"안합니다. 저는 플롯이 없어요. 무작정 써요. 어떻게 쓸지 사전에 정하지 않습니다. 머릿속에 큰 개념만 있을 뿐. ‘직지'에선 프랑스 학자의 현미경 연구 결과가 중요했어요. 일종의 팩트, 물증이죠. 그걸 머리에 어렴풋하게 넣고 씁니다. 결말도 모른 채. 그냥 써요. 빨리 빨리."
-일필휘지로?
"네. 보통은 자기가 쓴 걸 계속 다시 읽어본다고 하는데, 저는 그럴 시간에 빨리 씁니다. 다 쓰고 나서 고쳐요. 하루 평균 원고지 16매에서 30매 사이를 그렇게 씁니다."
-놀랍군요! 팩트에 기반하니 자료조사 분량도 상당할텐데요.
"젊을 때 책을 많이 읽어서 자료의 맥락을 파악하는 데 빨라요. 뿌리와 가지를 찾아 재빨리 공간 좌표를 파악합니다."
-파울로 코엘료나 마루야마 겐지 같은 작가는 활을 쏘거나 장작을 패며 몸을 훈련하는 육체파 작가들입니다. 선생은 무얼하지요?
"저는 음주파예요. 글이 안 풀리면 술을 마십니다. 혼자 소주, 맥주, 와인을 마셔요. 술은 일찍 마실수록 좋아서 새벽술과 아침술을 주로 들죠. 과거엔 굶기도 했습니다. 7끼 정도 굶으면 정신이 일상에서 벗어나 다른 세계로 들어갑니다. 인식의 확장을 위해 수도원이나 절에서 많이들 하지요."
-별명이 있습니까?
"불명(不明)입니다. 제가 지었어요(웃음). 한 분야를 깊게 파다보면 무언가를 주장하기가 어려워져요. 갈수록 지식은 주장보다는 관찰인 듯 해요. 그러나 작가가 될 땐 전지전능해집니다. 살인사건을 쓰면 형사보다, 역사소설을 쓰면 학자보다 더 많이 알게 돼죠. "
-어떤 책이 인생을 바꿨습니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출세를 경계하는 책이지요. ‘세인의 칭찬에 흔들리지 말아라, 칭찬은 덧없다’는 걸 배웠어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내고 베스트셀러가 됐을 때, 평단에서 엄청난 비난을 받았습니다. 소 뒷걸음질치다 쥐 잡았다는 둥, 김진명은 두 번째 책은 영원히 못쓸 거라는 둥. 명예에 집착했다면 그 말이 독이 됐겠지요. 다행히 젊을 때 ‘명상록'을 읽었기에 파괴되지 않고, 위기를 넘겼어요."
-두번 째 책 ‘가즈오의 나라'를 쓰는 게 정말 어렵지 않던가요?
"부담은 있었지만 어렵진 않았어요. ‘가즈오의 나라'는 광개토대왕비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자신 있게 썼어요. 일본이 한반도의 남쪽을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허위를 증명했습니다. 당시 동경대에 찾아가 일본 학자에게 제가 조사한 자료를 보여줬더니 담배 3대를 연이어 피우고, 사과하더군요. 자기가 담당하는 고교교과서에서 그 부분을 빼겠다고요. 보람이 있었죠."
-가장 애틋한 작품은 무엇인가요?
"(잠시 생각하다)’직지'예요. 금속활자공인 은수의 한마디 ‘상감마마, 새 글자는 완성하셨는지요?’가 잊히지 않네요. 아버지 잃고 보쌈 당해 유럽까지 와서 토해낸 말이 그것이니... 나라 걱정, 임금 걱정에 사랑과 사명을 보탠 그 여인이야말로 제가 생각하는 가장 ‘고급 인간’입니다."
자기 희생 없이는 인간을 감동시킬 수 없다고 믿는 김진명./사진=김지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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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존경한 사람은 누군가요?
"장인 어른이요. 청렴결백하셨습니다. 건설부 주택국장으로 꽤 높은 직위에 있으셨는데, 제가 아내와 결혼할 때 당신의 퇴직금을 가불하셨어요."
-선생의 일가는 어떻습니까?
"할아버지는 와세다대학에서 유학하셨고, 춘원 이광수와 친구셨어요. 아버지는 정이 많고 문무를 겸비한 분이었죠. 6.25때 이북에서 오셨는데, 서울대학에 적을 두고도 부산 피난민촌에서는 가난한 이웃을 지키는 깡패 노릇을 했습니다. 어릴 때 싸우고 오면 아버지께 칭찬을 받았어요(웃음). 어떻게 때리고 맞는지, 가르쳐주는 걸 좋아하셨죠. 저는 아버지를 많이 닮았습니다. 살면서 두 가지만 지키라고 하셨어요. 이민가지 마라, 부동산 투기하지 마라. 그걸 지키며 살았습니다."
-회의에 빠질 때는 없습니까?
"나이드신 분들이 ‘내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나' 후회하는 모습을 종종 봅니다. 그러나 삶의 의미는 뭔가를 이룩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의 가장 큰 공헌은 당대를 살아 다음 세대를 이어간다는 것, 그 자체예요. 위인이나 소인이나 죽음 앞에서 삶의 크기는 같아요. 크게 보면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 것만으로 다음 세대에 기여하는 거지요.
현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파도가 왜 치는지' 그 이유를 모르고 죽었어요. 당대엔 최고 지식인도 모르던 걸, 지금은 초등학생도 압니다. 인류는 점점 더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고 있어요. 그 넓은 흐름 속에 나를 두면 허무나 상실감에서 헤어나올 수 있습니다."
다음 작품은 ‘대통령 선거'에 관한 소설이라고 했다. 준비는 해두었으니 또 속사포처럼 써내려갈 것이다./사진=김지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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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약해질 때가 있을텐데요.
"위대하고 뛰어난 사람도 어이없이 죽고 가족을 잃기도 해요. 세상은 내 뜻대로 잘 안돼요. 그 간극이 극복이 안될 때는 술 마시며 허허 웃습니다."
-후대에 어떤 소설가로 남고 싶으신가요?
"끊기고 잃어버린 한국인의 본류, 정체성을 찾아 세우려고 애쓴 소설가. 그거면 족합니다."
[김지수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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