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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 (일)

이슈 책에서 세상의 지혜를

“삼년 견뎌 나비 되기 전 너무 많은 고치가 떨어져”…형광등 아래 새겨진 고3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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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삼파장 형광등 아래서’ 노정석 작가·김민섭 출판사 ‘정미소’ 대표

김민섭 대표가 과감하게 선택한

18살 노정석의 에세이·시·일기 모음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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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이었다. 20여년 전 고등학생 때로 돌아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은. ‘고등학생 A의 기록들’이라는 부제가 붙은 신간 <삼파장 형광등 아래서>를 읽고 난 뒤였다. 좁은 책상에 놓인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하루에 삼십분 정도는 문제풀이를 하는 대신 글을 쓰는 ‘고3’의 삶이 가능할지 궁금해서였다.

<삼파장…>은 ‘고3’ 노정석이 학교생활과 친구들, 책 등에 대한 골똘한 생각과 느낌을 에세이, 시, 일기 형식으로 틈틈이 기록한 책이다.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대리사회>의 지은이인 김민섭은 지난 2월 글쓰기 플랫폼인 브런치의 출판 프로젝트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가 노정석을 만났다. 브런치에 올라온 그의 글을 읽으면서 “자신의 위치에서 버텨가면서 제 몸과 관계에 새겨진 기록”임을 직감한 그는 매거진 구독자가 3명에 불과했던 노정석을 과감히 선택했고, 자신이 차린 출판사 ‘정미소’의 첫 책으로 <삼파장 형광등 아래서>를 냈다. ‘작가 노정석’과 ‘출판사 대표 김민섭’ 두 사람을 15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 사옥에서 만났다.

어른세계 축소판 같은 교실 모습과
자퇴한 친구·수행평가 문제점 등 담아
김민섭 “노학자도 힘들 타인 품는 글”

먼저, 노정석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대구의 자립형사립고를 다니고 있으며 미국의 한 대학에서 교육학을 공부할 예정이다. 한국의 고3 전체를 놓고 보면 ‘학업위계’의 최상위층에 속할 것이다. 그래서 <삼파장…>은 우등생의 성공 스토리인가 하면, 절대 그렇지 않다. 학교를 그만두는 친구들, 이간질·왕따·아부 같은 어른 세계의 축소판이 돼버린 교실의 모습, 자연의 법칙에 경이로워하는 물리 교사의 뜨거운 눈빛에 냉담한 학생들의 표정, 수행평가의 문제점 등을 관찰하고 분석하고 기록한다. 아, 그리고 사랑 얘기도 썼다. L이라는 여학생을 좋아하는 노정석은 “종일 창가에 앉아 L 생각만 하고 싶다”고 고백한다.

김민섭은 노정석의 글에 끌린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브런치에서 인기 있는 글들은 너무 정의롭고 분노하고 상처를 호소하는 내용이 많았어요. 그런 글은 댓글만 많을 뿐 타인을 변화시키지 못해요. 반면 ‘글쓰는 학생입니다’라는 아주 단순한 자기소개가 달려 있는 노정석의 글은 갑갑한 입시 준비 속에서도 자신을 돌아보고 타인을 품는 글이었어요. 노학자도 쓰기 힘든 글이죠.”

한겨레

노정석 “어떻게 공부하고 배우는지 어른들이 알아야 교육개혁 시작…학생들이 힘든 건 공부 아닌 미래 불안”

노정석의 시에서 학교는 ‘끊임없이 오래된 지식의 퇴적물을 심해로 내려보내는 짠 맛의 찬 바다’이다. ‘삼년을 잘 버티면 나비가 된다’고 했지만, 3년이 되기 전에 “너무 많은 고치가 땅에 떨어진다.” “친구들이 저와 상담을 많이 했어요. 한 친구는 결국 일반고로 전학갔고 저의 멘티였던 후배도 자퇴했어요. 자퇴하는 이유는 학교 시스템에 대한 불만이라기보다는 대부분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이었어요. 자사고에 왔는데 앞서나가지 못하면 차라리 일반고로 가는 게 대입에 유리하지 않을까 고민하다가 그만둬요.”

본인은 미래가 불안하지 않았을까? “우리 학교에선 심화반에 들어가야 삼파장 형광등 스탠드가 따로 있는 칸막이 독서실에서 공부할 수 있어요. 일종의 특권이죠. 한때 성적이 떨어지면서 심화반에 못 들어갔어요. 그때 오히려 현실을 관조적으로 바라보게 됐어요. 심화반에 속하냐 안 속하냐가 그리 중요한 건 아니라고, 그냥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게 공부하자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는 이렇게 썼다. “만약 우리 인생에서 어떤 숫자가 우리의 행복에 크나큰 영향을 끼친다면 어젯밤 전투에서 죽은 전사자의 수, 오늘 일어난 자동차 사고의 사망자, 테러 희생자 같은 것이 되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시험 점수 같은 것이 우리의 행복을 좌우한다면, 이성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뭔가 이상함을 느껴야 하지 않을까.”

‘삼파장 형광등’을 놓고 경쟁해야 하는 한국의 교육현실은 헤르만 헤세의 소설 <수레바퀴 아래에서>를 떠올리게 한다. “2학년 때 <수레바퀴 아래에서>를 읽었는데, 주인공 한스가 술먹고 허망하게 죽는 게 너무 충격적이었죠. 100년 전 소설인데 그동안 교육은 별로 바뀐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는 ‘교육개혁’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 그 시작은 “학생들이 학교에서 어떻게 공부하고 배우는지를 어른들이 아는 것”이라고 했다. “3학년 2학기 교실은 그냥 ‘방치’예요. 수업을 준비해온 선생님이 불쌍해서 극소수의 학생들이 쳐다보는 정도이지 대부분은 외면하고 그냥 자기가 할 일을 해요. 1학년 때만 해도 부조리함에 화를 내다가 계속되면 무감각해져요. 제가 글을 쓰는 이유는 지금의 저를 잊지 않기 위해서예요. 나중에 제가 교사의 위치에 섰을 때 잊지 않으려고요.”

혹여, ‘미래의 노정석’은 잠깐 길을 잃을지라도 ‘글 쓰는 노정석’이 있어 언제라도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18살 노정석’은 이렇게 썼다. “고3을 위로하는 글들, 말들은 차고 넘치지만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은 많이 없는 듯합니다. 학생들이 힘든 것은 사실 공부 때문이 아니라, 공부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미래가 불확실하기 때문이라고, 두렵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 좋은 조언을 해주는 사람보다는 잘 들어주는 사람이 곁에 있으면 좋겠습니다. 웃음처럼 슬픔도 쉽게 나눌 수 있다는 것을 저는 아주 힘들게 알았으니까요.”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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