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 양은심의 도쿄에서 맨땅에 헤딩(29)
사람 사이에 갈등이 생겼을 때, 관계를 지속하다보면 입장을 이해하고 마음이 풀리는 계기가 올 수 있다. [사진 pxher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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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따’를 행한 사람은 왕따를 당한 사람이 용서해줄 때까지 반드시 용서를 빌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용서이며 반성이자, 관계 개선을 향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왕따’를 당한 사람은 언제까지나 그것에 얽매여 있을 것이 아니라 내 인생을 살아내기 위해 앞을 내다보아야 한다.
서로 등을 돌릴 것이 아니라 관계를 지속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서로를 알아가다 보면 입장을 알게 되고, 그러다 보면 마음이 풀리는 계기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등을 돌린 채 있다가는 기회는 영원히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특히 인연을 끊고 살아갈 수 없는 관계라면 더욱 그렇다.
일본에서 살다 보면 한일관계를 보는 눈이 조금 달라진다. 한국에 있을 때는 일본을 마음 편히 미워할 수 있었는데, 생활 거점이 일본이다 보니 두 나라가 사이좋게 지냈으면 하는 바람이 생긴다. 나처럼 일본인 아이를 갖게 되면 양국 관계 개선을 더욱 절실히 바라게 된다. 한일관계에 관한 뉴스와 양국 정치가, 역사학자들 발언에도 민감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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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 하향곡선 타는 한류
한류 붐이 일기 시작했을 때 나는 ‘과연 언제까지 이어질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국드라마는 정착에 성공했다. 일본 공영방송인 NHK는 물론 민간방송에서도 한국드라마를 방송하지 않는 날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2012년부터 한류는 하향곡선을 타기 시작했고 지금은 아주 침체 상태이다. 한류스타 소식을 전하고 한류 팬임을 공언하는 일본 연예인들이 있었는데, 모두 잠잠해졌다.
일본에서 뜨거웠던 한류 붐은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시들해졌다. [연합뉴스] |
한류 붐이 시들해진 것은 한마디로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다. 민간이 일으킨 우호적 관계를 정치가 망쳐놓았다. 그 여파는 한국인들이 감당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결과를 낳았다. 한일 양국의 관계가 호전되면 민간에도 다시 우호적인 관계가 이어지리라고 믿는다. 한국과 사이좋게 지냈으면 하는 일본인 또한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류 붐을 통해 한국에 대한 정도 생겼다. 일본 사람에게 한국은 더이상 ‘정체를 알 수 없는 나라’가 아니다. 한일관계를 좁힌 일등공신은 뭐니 뭐니해도 한류 붐이다.
한국인인 내가 한국을 사랑하듯이 일본인이 일본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부모일지라도 미워할 수 없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부모가 나쁜 일을 하고 부모에게 정이 떨어졌다고 해서 버릴 수 없지 않은가. 미우나 고우나 끌어안고 같이 갈 수밖에 없다.
일본 생활이 어느 정도 익숙해졌을 무렵 나는 전쟁을 다룬 드라마를 보게 되었다. 7월이나 8월이었을 것이다. 한국의 광복절, 즉 ‘독립기념일’인 8월 15일은 일본에서는 ‘종전기념일’이다. 8월이 가까워져 오면 전쟁을 다룬 특집드라마가 방영된다. 내가 본 드라마는 평범한 일본 남자가 나라의 명령을 받고 전쟁터에서 전사하고, 남겨진 아내와 아이들이 고생하며 살아가는 이야기였다.
누구 하나 도와주는 사람 없이 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밤낮으로 고생하는 엄마와 장터를 떠도는 고아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일본 사람들도 전쟁 때 고생을 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이니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드라마를 보고 나서야 의식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는 ‘한국을 식민지화하고 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국민은 고생스러울 것이 없다’라는 생각이었다.
전쟁을 일으킨 나라의 국민에게도, 반대로 침략을 받은 나라의 국민에게도 전쟁은 똑같이 괴로운 것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평범한 사람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남편을 잃고 아버지를 잃고 아들을 잃는다.
상대방을 잘 모르면 그를 전적으로 미워할 수 있다. 아는 사람을 미워하면 나 자신도 괴로운데, 모르는 사람을 미워할 때는 그저 화만 내면 된다. 그 미움이 에너지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미운 상대와 교류를 하고 공감대가 형성되어 조금씩 마음이 열리면, 상대방도 '나와 다를 바 없는 인간'이란 것을 느끼게 된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사람 대 사람'으로 일본인과 사귈 수 있었으면 한다. [사진 pixaba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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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대 사람’으로 사귀어야
역사와 정치문제를 등한시하자는 말이 아니다. 다만 현재를 살아가는 일반 한국인은 ‘사람 대 사람’으로 일본인과 사귈 수 있으면 한다. 더 나아가 언젠가는 미움과 트라우마에서 벗어나 한국을 괴롭힌 일본을 용서해주었으면 한다. 친해진 다음에 서로의 잘잘못을 차분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관계가 되었으면 하는 조심스러운 바람을 가져 본다.
나는 일본인 피를 이어받은 두 아들과 조카 때문에라도 일본을 미워할 수가 없는 사람이 됐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일본이 한국 사람들로부터 미움받지 않는 나라가 될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또 ‘어떻게 하면 일본 사람들이 한국을 거북해하지 않을까’에 대해 생각한다. ‘어떻게 하면 한국과 일본이 사이좋게 지낼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행동으로 옮기고자 한다. 나 한 사람이 뿌리는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는 ‘풀뿌리 교류’를 통해서 말이다.
‘일본 정부는 싫은데 일본 사람은 좋다’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런 마음과 생각이 바로 풀뿌리 외교로 이어지는 힘이 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두 나라의 정부를 움직이는 힘이 되리라 믿는다.
양은심 한일자막번역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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