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가 김성환 화백 별세… 조선일보 등 1만4139회 연재
살아있는 권력 통렬히 풍자… 기네스북, 등록문화재 올라
한국 시사만화 대명사 ‘고바우 영감’을 그린 김성환 화백. 2013년 10월 자택에서 인터뷰할 때 모습이다. /김연정 객원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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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 차림에 콧수염과 한 올의 머리카락을 지닌 키 작은 고바우 영감을 빌려, 김 화백은 살아있는 권력을 통렬히 풍자해 인기를 끌었다. 당시 시사만화는 기사로는 전달하기 어려운 민감한 사안을 이심전심 이해시키는 외줄타기의 예술이었다. 1958년 경무대 변소 청소부를 소재로 권력 만능 세태를 풍자한 '경무대 똥통 사건'으로 입건되는 등 필화(筆禍)도 예사였다. 김 화백은 "박정희 정권의 긴급조치 9호 시절은 그야말로 면도날 위를 걷는 심정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1966~78년 삭제·수정된 것만 250편에 이른다. 그러나 펜은 무뎌지지 않았다. 조선일보 주필 선우휘는 "국민이 고바우 영감을 읽으며 작은 저항의 웃음을 지었다"고 평했다. 고바우는 '바위같이 튼튼하라'는 뜻의 옛날식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1987년 6·29 선언 직후인 7월 1일 조선일보에 실린 ‘고바우 영감’. |
가난 탓에 만화의 길로 들어선 김 화백은 1949년 연합신문 '멍텅구리'로 데뷔했다. 이듬해 6·25전쟁이 터졌다. 미처 피란을 못 가 서울 정릉 다락방에 숨어 지내다 고안한 것이 바로 '고바우'였다. 김 화백은 "길에 나가면 의용군에 잡혀가니 다락에 숨어 만화 캐릭터를 100명 이상 그렸는데 그 중 하나가 고바우였다"며 "만화는 어린애들만 보는 걸로 돼 있는데 할아버지를 주인공으로 하면 노인들까지 보지 않을까 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열아홉 살의 국군 종군 화가로 최전방을 누비며 그가 그린 전쟁 기록화는 2009년 국립현대미술관이 최초로 소장한 만화가의 작품이 되기도 했다.
'고바우 영감' 완결 후에도 김 화백은 전시 및 출판 활동을 계속했고, 풍속화에도 매진하는 등 창작열을 불태웠다. '고바우 영감' 마지막 회에 그는 '춘풍(春風)'과 '추우(秋雨)' 네 자를 남겼다.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인생, 너무 연연하지 말자"는 의미였다. 빈소는 경기도 분당제생병원, 발인 11일 7시. (031)781-7628
[정상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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