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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8 (토)

‘평화의 소녀’를 위한 더 많은 연대의 길 모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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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역사재단, 14일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역사적 과제’ 토론회



경향신문

12일 경기 파주시 임진각 평화의 소녀상에 빗물이 맺혀있다. 광복절을 하루 앞둔 14일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이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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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꽃이 활짝 피었네/ 고향에 꽃이 활짝 피었네.”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인 박옥선 할머니는 언젠가 중국인 연구자를 만난 자리에서 일본 노래를 들려줬다. 고향을 노래하지만 그의 고향은 아니었다. 1941년 방직공장 여공을 모집한다는 얘기에 따라 나섰다가 강압적인 폭력 속에 4년을 보냈다. 2001년 한국에 돌아오기까지 지난한 세월이 흘렀다.

할머니는 헤어질 때엔 조선민요를 불렀다고 했다. “고향을 떠난 지 몇 년 되었네… 그리운 나의 집.” 노래와 말을 되찾고, 고국에 돌아왔지만 끝은 아니었다. 그를 가뒀던 일본의 요새는 다른 형태로 건재하다. 경제보복과 ‘평화의 소녀상’ 전시 폐쇄가 한 단면이다. 현실은 여전히 더 많은 연대의 길을 요구하고 있다.

박 할머니를 만났던 왕중런(王宗仁)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둥닝(東寧)요새박물관 연구원은 당시 일본 관동군이 둥닝 요새에 설치한 ‘위안소’들의 실체를 드러내는 것으로 한 걸음을 보탠다. 동북아역사재단 도시환 일본군위안부연구센터장은 “그간 자료와 증언을 통해 단편적으로만 알려졌던 둥닝 위안소 실태를 종합적으로 짚어 소개하는 것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왕중런 연구원이 연구한 내용을 보면, 1940년대 둥닝과 소련 국경선을 따라 13만 병력이 투입됐다. 국경 진지 부근에 설치된 위안소는 50여곳이었다. 사병 29명당 한 명꼴로 ‘위안부’가 배정됐다. 일본군은 위안소들에 ‘군인낙원’ ‘안락소’ ‘오락소’ ‘행락원’ ‘후방시설’ 따위 이름을 붙였다. 2016년 세상을 뜬 고 이수단 할머니 등 숱한 여성들이 이곳에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생존자들은 저항할 때면 식사로 대파만 주고, 무릎을 꿇고 앉아 고춧가루 물을 마시게 했다고 증언했다. 탈출하려다 사망한 이들도 부지기수다.

한·중·일 학자들 연구 성과 점검

중 ‘둥닝 요새’ 위안소 실태 소개

일본 대처 비판하는 일본학자들

재일 조선인 정영환 교수도 참석


두 연구자는 이 같은 실태를 14일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리는 동북아역사재단 국제학술회의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한 역사적 과제’에서 발표한다. 올해로 두 번째를 맞은 일본군 ‘위안부’ 국가기림일을 기념해 한국과 중국·일본 연구자들이 그간 연구성과를 점검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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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중런, 저우귀샹, 야마모토 세이타, 요시자와 후미토시(왼쪽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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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우귀샹(周桂香) 중국 다롄이공대학 교수는 학술회의에서 일제 패망 후 붙잡혀 1950년대까지 중국 전범 관리소에 수감됐던 일본군들의 자백서를 통해 피해 실태를 밝힌다. 중국 랴오닝(遼寧)성 푸순(撫順)과 타이위안(太原) 일대에서 활동한 이들이다.

그는 현재까지 공개된 842명의 자백서를 분석한 결과 “중국 침략 일본군 중 군, 경찰, 헌병 등 인원의 4분의 3 이상이 성폭력 범죄 행위를 저질렀고, 그중 군대 계열의 범죄율이 훨씬 높다”고 밝혔다. 성폭력 범죄를 자백한 이는 고위급 장교부터 일반 장교까지 총망라했다. 자백서에는 ‘스타클럽’ ‘군인회관’ ‘군시설’ ‘송월옥’ 등의 이름을 붙인 위안소들이 등장한다. 군이 이를 조직적으로 설치해 경영하고, ‘위

안부’ 압송부터 감시와 성병 검사는 경찰과 헌병이 맡았다.

이번 학술대회에는 일본의 ‘위안부’ 문제 대처 방식을 비판하는 일본인 연구자들도 참석한다. 일본 관부(關釜)재판과 한일청구권협정, 헌법재판소 결정, 대법원 판결 등을 다각적으로 분석해 해결 과제를 검토하는 자리가 될 예정이다.

관부재판에 직접 변호사로 참여했던 야마모토 세이타(山本晴太) 변호사는 당시 재판과 한·일 양국의 헌법 정신을 들여다보고 “관부재판 원고들은 양국 헌법이 모두 침략전쟁과 식민지배를 부정하고 개인 존엄을 침해당한 피해자의 인권 회복을 국가에 명하고 있음을 그 후 반생에 걸쳐 밝혔다”고 말한다.

관부재판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요구해 1998년 1심에서 승소했던 재판이다.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최종 패소했지만, 현재까지 일본 재판소가 ‘위안부’ 피해자들 손을 들어준 유일한 사례로 영화 <허스토리>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요시자와 후미토시(吉澤文壽) 니가타 국제정보대 교수는 최근 일본의 경제보복 등을 문제 삼으면서 한일청구권협정과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에 따라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진정 해결됐다고 볼 수 있는지를 따진다.

그는 미리 배포한 발표문을 통해 결론적으로 “한·일 국교정상화 교섭은 완결되지 않았고, 당연히 일본군 ‘위안부’ 문제도 초점이 된다”고 말한다. 그는 이어 “2015년 한·일 합의는 (한국과 대만, 북한 등 피해지역의) 연대를 방해하려는 분열 정책에 다름없다”며 “역사인식이 빠진 ‘국제법 위반’론은 반드시 극복돼야 한다”고 밝혔다.

발표자로는 재일 조선적 역사학자인 정영환 메이지학원대학 교수도 참석한다. 정 교수는 해방 직후 재일조선인들이 ‘조련’(재일본조선인연맹)을 중심으로 강제동원에 대한 피해 보상을 요구하고 진상규명 활동에 나섰던 것을 조명한다.

유정인 기자 jeong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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