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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8 (토)

다빈치, 홍콩 총독, 진화론…독자·검열 흔적 쌓으며 ‘지구 한바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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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시대에, 서로 다른 나라에서, 서로 다른 작가가 쓴, 서로 다른 내용의 책들이 길고 오랜 이야기들을 몸에 묻히며 서로 다른 경로로 한국에 도착했다. ‘한 장소’에서 서로를 의식하지 못한 채 오랜 시간 동거하던 책들이 낡고 해진 모습으로 지난여름 처음 대면했다. 김진수 선임기자 j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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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러지지 않는 것들엔 우수수 떨어질 이야기도 없다. 나무가 종이가 되고, 책이 되고, 쓰레기로 폐기되는 ‘여정’엔 인간의 시간이 접고, 찢고, 얼룩을 남긴 이야기의 지문이 묻어 있다. 그 이야기들은 생성부터 삭제까지 먼지 한 톨 내려앉지 않는 디지털의 서가에선 읽을 수 없다. 바짝 삭아 손만 대도 부서지는 종잇장을 펼칠 때 시공을 건너와 지금 여기로 쏟아진다. 작가·독자와 시대까지 몸에 새기며 낡고 해져 사라지는 ‘종이책의 시간’을 추적했다. 세 차례 쓴다. 첫 이야기는 530여년 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시작됐다.







‘다빈치 노트’와 공학도의 서명





“술을 마시던 사람이 술잔을 내려놓고 말하는 사람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1495년께 한 화가가 종이에 스케치를 하고 있었다. ‘말하는 사람’ 예수가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성찬식을 행하고 있을 때 열두 제자가 짓는 표정과 행동을 묘사했다. 연극 대본의 지문 같은 문장들을 화가는 별도로 메모했다.



“손가락을 꼬고 있던 사람은 이마를 찌푸리며 옆 동료 쪽으로 몸을 기울인다. 손바닥을 펴고 어깨를 움츠린 채 당황해서 입을 벌린 사람도 있다….” 예수의 모델이 된(또는 될) 사람의 정보도 써뒀다. “모르타로 추기경 가문의 조반니 백작.”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할 명화 ‘최후의 만찬’ 밑그림이었다. 스케치를 토대로 작업한 ‘만찬’이 밀라노 성당 수도원 벽에서 1498년 완성됐다. 그로부터 21년 뒤인 1519년 5월2일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는 프랑스에서 눈을 감았다. 유언장은 9일 전 작성해 뒀다.



노트는 프란체스코 멜치에게.



다빈치는 ‘신의 뜻’이란 한마디 앞에 모든 질문이 주저앉던 시대를 지나며 인류가 마침내 탄생시킨 가장 창조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기록으로 재능을 받쳤다. 질문을 꿰는 머릿속 섬광을 붙잡느라 수많은 메모(현존 분량은 7천여장)를 생산했다. 회화, 조각, 건축학, 해부학, 식물학, 지질학, 광학, 천문학, 공기역학을 넘나드는 발상들이 경계 없이 펼쳐졌다. ‘만찬’의 스케치와 메모 등 평생의 원고 더미를 다빈치는 제자이자 예술적 후계자에게 상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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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다빈치 연구자 에드워드 매커디가 편집해 1938년 두권으로 출간한 ‘다빈치 노트’ 초판 제2권. 김진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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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빈치의 생은 멈췄지만 그가 남긴 노트의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었다. 다빈치의 유산을 이탈리아로 가져가 관리하던 멜치도 1570년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자 많은 유력 인사와 미술상들이 원고를 탐내며 달려들었다. 노트가 스페인, 프랑스, 영국 등 유럽 각지로 흩어졌다. 원본 상태로 되돌리기 힘들 만큼 다양한 필사본으로 분화했다.



다빈치는 메모를 남길 때 일정한 체계로 분류하지 않았다. 육필 원고들 중 무엇을 선택하고, 어떤 순서로 배열해, 어느 스케치를 물리느냐에 따라 후대의 출판물들도 제각각의 형태가 됐다. 1651년부터 출간된 여러 ‘노트들’ 가운데 영국의 다빈치 연구자 에드워드 매커디(1871~1957)의 판본도 있었다. 그가 편집한 ‘The Notebooks of LEONARDO DA VINCI’(국내 미번역)의 초판이 1938년 미국 뉴욕에서 두권으로 묶였다. 수백년에 걸친 ‘다빈치 페이퍼’의 전파·파생 과정을 서문에 상세히 적었다.



매커디가 15살이던 1886년에 폴란드인 앨릭스 피어낙은 태어났다. 러시아·독일·오스트리아에 영토를 분할 점령(1772~1918년)당한 폴란드인들이 나라 없는 세월을 견디던 시절이었다. 앨릭스 출생 한해 전 독일 초대 총리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자국 영토와 점령지에서 폴란드인들을 추방했다. 대규모 강제 이주(1899~1931년 미국으로만 150만명)로 내몰린 폴란드인들이 도축 산업의 중심지였던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로 몰려들었다. 시카고의 도축과 육류 포장 노동력을 폴란드 이주민들이 지탱했다. 어느 해인가 앨릭스도 일리노이로 건너갔다. 폴란드 여성 애나를 만나 결혼했고 두 아들을 낳았다. 1940년 연방 인구조사원이 찾아왔을 때 피어낙 가족은 미시간주 디트로이트에 살고 있었다. 미시간도 폴란드 이주민의 미국 내 주요 정착지 중 한 곳이었다. 부부는 고기와 채소를 파는 식료품점을 운영하며 아이들을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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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미시간주립대학교 대학원생 존 피어낙은 ‘다빈치 노트’의 매커디 편집본(1938)을 출간 직후 사서 표지 안쪽에 서명했다. 그는 얼마 뒤인 1943년 세상을 떠났다. 김진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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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존은 1차 세계대전이 시작한(1914년) 이듬해 태어났다. 그는 공학도로 자랐다. 미시간주 웨인대학교 기계공학과를 1939년 졸업했다. 1940년엔 미시간주립대학교 석사 과정에 입학했다. 미국기계공학회(ASME)에도 가입해 학생 회원으로 활동했다. ‘다빈치 노트’의 매커디 버전이 출간됐을 땐 23살이었다. 그해부터 1943년 사이 어느 날 존은 창의적 발명가의 원조 격인 다빈치의 지혜를 구하며 책을 구입했다. 고급스러운 붉은색 하드커버 안쪽에 자신의 이름(John Piernak)을 적었다.



그 이름이 1944년 미시간대가 발간한 50호째 동문회보에 실렸다. ‘고인 명부’에 존이 있었다. 1943년 9월3일 세상을 떠났다고 명부는 알렸다. 사망 이유는 언급하지 않았다. 28살, 너무 이른 나이였다. 그의 꿈을 간직한 ‘다빈치 노트’가 어떤 이유에선지 반세기 뒤 태평양을 건넜다. 화가의 글·그림과 연구자의 편집본과 독자의 짧은 생이 얽힌 길고 오랜 이야기가 1996년 아시아의 동쪽 끝에 닿았다. 한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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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노수민 기자 bluedahli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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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서 홍콩, 다시 미국, 그리고…





멜치의 아들에게서 흘러 나간 다빈치의 필사본 중 하나는 추기경과 화가 등의 손을 탔다. 마지막은 베네치아의 영국 영사 조지프 스미스였다. 1759년 스미스의 재산이 매각되면서 이 사본의 존재도 공식 기록에서 증발했다. 사본이 행방불명되고 33년 뒤 스미스의 나라 영국에서 존 보링(1792~1872)이 태어났다.



그해 제러미 벤담(1748~1832)의 저서 ‘법률론 일반’도 태어났다. 공리주의의 주창자이자 파놉티콘(중앙에 감시탑을 둔 원형 감옥)의 제안자였던 벤담은 보링의 일생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1824년 벤담이 ‘웨스트민스터 리뷰’를 창간했을 때 보링을 공동 편집자로 임명했다. 1832년 벤담이 그의 품에서 숨을 거두기까지 보링은 ‘리뷰’ 등을 통해 자유무역의 열렬한 지지자로 이름을 알렸다.



그는 두 차례 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두번째 임기(1841~1849년)는 영국이 중국과 제1차 아편전쟁(1839~1842년)을 치르고 있을 때 시작됐다. ‘역사상 가장 부도덕한 전쟁’ 중 하나로 꼽히는 그 싸움의 결과로 홍콩은 영국령이 됐다. 영국이 애로호 사건(1856년)을 빌미로 제2차 아편전쟁을 일으켰을 때 보링은 홍콩의 제4대 총독(1854년 부임)이 돼 있었다. 1차 전쟁의 성과물(5개 항구 개방)에 만족하지 못했던 영국 정부의 지지 아래 보링은 선박을 나포한 청나라에 배상을 요구하며 광둥 포격을 승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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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ecimal system…’에 실린 존 보링 초상화.


그리고 3개월이 지난 1857년 1월15일.



홍콩에 거주하던 유럽인 수백명이 복통을 호소하며 쓰러졌다. 그들은 모두 같은 빵집(‘에싱 베이커리’)에서 구운 빵을 먹은 사람들이었다. 빵에서 비소가 검출됐고 중국인 주인이 독살 테러 혐의로 체포(재판에서 무죄 선고)됐다. 원인은 끝까지 밝혀지지 않았으나 영국에선 선거가 한창이었다. 현직 총리(헨리 존 템플)는 2차 아편전쟁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데 사건을 활용했고 결국 승리했다.



비소 중독의 영향으로 사망한 사람은 3명이었다. 그들 중 보링의 아내도 있었다. 쇠약해진 아내는 1858년 9월 숨을 거뒀고 보링도 1년 뒤 총독에서 사임했다.



홍콩 총독으로 부임하던 그해 보링은 영국에서 책 한권을 냈다. ‘The decimal system in numbers, coins and accounts’(수·동전·회계에서의 십진법, 미번역). 그는 십진법의 옹호자였다. 1847년 4월 영국 의회에서 십진법의 장점을 역설하며 화폐 단위 개편을 촉구했다. 십진법(영국은 1971년 공식 도입)이 인간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도량형이란 신념을 그는 책의 첫 문장에서부터 뿜어냈다.



“남자, 여자, 어린이 등 모든 인간은, 심지어 어린 시절부터, 가장 미개한 나라 사람들조차도, 손가락과 발가락 모양의 ‘십진법 기계’를 부여받아 계산에 활용해왔다.”



런던에서 출간된 이 책의 초판본 한권이 누군가의 손에 들려 미국으로 갔다. 종착지는 뉴욕에 본부를 둔 ‘히브리청년협회’였다. 책을 서고에 넣으며 협회는 표지 안쪽에 단체명의 약자(YMHA)를 새겨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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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4년 미국에서 출범한 히브리청년협회(YMHA)가 1972년 이름을 바꿔 단 ‘92NY’의 뉴욕 본부 전경.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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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회는 보링 사망 2년 뒤 출범(1874년)했다. 미국 유대인 공동체의 종교·사회·문화적 교류와 복지 증진 등을 목적으로 설립됐다. 1900년 뉴욕 렉싱턴 애비뉴 92번가에 새 건물을 지어 이전했다. 1972년엔 주소지에서 딴 ‘92NY’로 브랜드명을 바꾸고 대규모 문화예술센터로 변신했다. T. S. 엘리엇과 랭스턴 휴스 등 당대 유명 시인과 작가들의 낭독회를 열었다.



지난해 10월 92NY는 소설 ‘동조자’(박찬욱 감독이 HBO 드라마로 제작)로 퓰리처상(2016년)을 받은 베트남계 미국 작가 응우옌비엣타인의 행사를 일방적으로 취소했다. 그와 ‘파친코’를 쓴 이민진 작가의 대담이 92NY에서 예정돼 있었다. 응우옌이 작가 750여명과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습 중단을 촉구하는 성명에 이름을 올렸다는 이유였다. 그는 대담 취소 다음달 한국에 입국해 제3회 부천디아스포라문학상을 받았다. YMHA가 92NY로 이름을 바꾼 그해 보링의 그 책도 한국에 왔다.







“굿!… 동화 같은 소리!”





보링이 홍콩 총독을 사임하고 두달 뒤(1859년 11월24일)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을 출간했다. 진화론은 케임브리지대학교 크라이스트 칼리지 출신의 ‘졸업생(1831년) 신학도’가 내놓은 배교의 이론이자 천지창조란 ‘진리’를 ‘신화’의 자리로 끌어내린 혁명 사상이었다.



신학자 프레더릭 로버트 테넌트(1866~1957)도 케임브리지에서 배우고 가르쳤다. 다윈 사망(1882년) 3년 뒤 그 대학의 곤빌 앤드 키스 칼리지에 입학해 물리학과 생물학 등을 공부했다. 1913년부턴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신학을 강의했다. 다윈이 묻히고 75년 뒤 테넌트가 묻혔을 때 그의 묘비엔 다윈의 흔적이 앉아 있었다.



“그는 철학적 신학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탐구자였으며 인간과 세계의 조화를 통해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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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신학자 프레더릭 로버트 테넌트의 사망 뒤 그의 묘비에 새겨진 라틴어 문구. “그는 인간과 세계의 조화를 통해 시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노력했다”. 트리니티 칼리지 채플 누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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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넌트는 진화론을 신학적 맥락에서 통합한 최초의 학자 중 한명이었다. 그는 다윈을 긍정하면서도 진화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자연법칙을 통한 신의 계획이라고 봤다. 테넌트는 트리니티 칼리지 강의를 정리한 ‘Philosophy of The Sciences’(과학철학, 미번역)를 1932년 대학 출판부에서 펴냈다. 그는 “신학이 지식과 독립적일 수 없다”며 “과학은 합리적 신학에 근거를 제공한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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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자 프레더릭 로버트 테넌트. 트리니티 칼리지 채플 누리집


이 책의 초판본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한 청년(출간 당시 30살)이 구해 읽었다. 그는 매우 능동적인 독자였다. 진화론과의 거리가 테넌트보다 가까워 보이는 그는 대목마다 밑줄을 치며 동의 또는 반박했다.



“굿(good).”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며 우주 진화의 산물”이란 문장에 그는 한 단어로 반응했다. “(앞의 문장이) 반쪽 진실”이라는 다음 문장엔 물음표(?)를 붙여 의문을 표했다. 테넌트가 “현재 우리 지식 상태에선 과학으로 해결할 수 없는 불연속성”이 있다며 단절을 연결할 고리로 “영혼”을 언급했을 때도 그는 한 단어만 적었다. “동화 같은 소리(fairyta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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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알렉산더 조너스 섀퍼는 테넌트의 책을 읽으며 글 곳곳에 동의 또는 반박 의견을 적었다. 김진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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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이 ‘벅’이라고 불렀던 이 독자는 알렉산더 조너스 섀퍼(1902~1981)였다. 21살에 존스홉킨스대학 박사 학위(당시 학교 역사상 최연소)를 받을 만큼 명민했다. 섀퍼는 존경받는 소아과 의사였다. 1968년 도시 아동의 광범위한 영양실조 문제를 파고든 그의 연구는 뉴욕시 무료 점심 프로그램의 대폭 확대에 기여(1981년 5월24일 ‘볼티모어 선’)했다.



삶의 대부분을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서 보냈던 그는 한때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활동한 적이 있었다. 그 시절 구해 읽은 테넌트의 책 표지 안쪽에 섀퍼는 자신의 이름과 주소를 직인에 새겨 찍었다. 독특한 그림으로 꾸민 장서표도 붙였다. 이 책이 알 수 없는 시기에 그의 손을 떠났다. 책의 행적이 확인된 것은 1993년 한국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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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5월24일 알렉산더 조너스 섀퍼의 부고 기사. ‘볼티모어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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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넌트의 책 출간(1932년) 1년 뒤 조선에선 한 승려가 생을 마감했다.



해인사 주지 이회광(1862~1933)이었다. 그는 일제강점기 불교계의 대표적 친일 인사였다. 친일 종단 ‘원종’(1908년 창립)의 종정 자격으로 조선 불교와 일본 불교의 합병을 추진했다. ‘불교계의 이완용’이라 불리며 훗날 ‘친일인명사전’과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 보고서’에 이름을 올렸다. 그에게 해인사 주지의 ‘지위’를 부여한 것은 1911년 반포된 ‘사찰령’이었다. 일제는 조선 불교를 총독부 통제 아래 두고 전국 사찰을 ‘30본산’(30개의 ‘본사’를 지정하고 주변 사찰들은 ‘말사’로 배속)으로 통폐합했다. 이회광은 30본산주지회의원(회의체)의 초대 원장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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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제종교’에 실린 친일 승려(당시 해인사 주지) 이회광의 사진. 김진수 선임기자


사찰령 전문과 30본산 주지들의 이름을 열거한 ‘朝鮮諸宗敎’(조선제종교)는 1922년 나왔다. 총독부 학무국의 일본인 촉탁 길천문태랑(요시카와 분타로)이 조선의 종교 현황을 정리(국한문 혼용)했다. 3·1운동의 충격으로 총독부는 조선의 종교 지도자들을 주목하며 학무국에 종교과를 신설했다. ‘조선제종교’는 유교·불교·천주교·기독교 등의 국내 전파와 교세 등을 파악해 서술했다. 조선의 민족성과 종교성을 설명하며 천도교·시천교·대종교 등을 ‘조선 특유의 종교’로 분류했다. 종교계 주요 인물과 건축물을 골라 편집한 화보엔 이회광의 전신사진을 실었다.







공손한 문장이 눈을 부릅뜨고





“注意(주의).”



254쪽을 넘기면 255쪽 대신 271쪽이 나왔다. 16쪽 분량이 통째로 빠졌다. 원래 255쪽이었을 자리엔 쪽수를 기입하지 않은 종이 한장(제본 이후 추가)이 삽입됐다. 그 종이 위에서 말투 공손한 문장이 “주의”를 요구하며 눈을 부릅떴다.



“印刷製冊(인쇄제책)을 終了(종료)한 後(후)에 當局注意(당국주의)가 有(유)하기로 編者(편자)가 削除(삭제)하였사오니 讀者(독자)는 恕諒(서량)ᄒᆞ시옵.”



‘편자’는 제7절(연합선교사단)에 포함돼 있던 ‘총독정치와 선교사’ 부분 전체를 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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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제종교’의 본문 255~270쪽을 통째로 들어낸 뒤 ‘편자’가 남긴 “주의.” 검열의 흔적. 김진수 선임기자


“대정(일본 연호) 11년” 경성에서 초판 발행된 이 책의 “소화 4년”(1929년) 10판 인쇄본 한권이 어느 해인가 한반도 남쪽으로 내려갔다. 수십년을 부산에서 체류한 뒤 1996년 바다를 끼고 동쪽으로 이동했다.



이회광이 죽고 10년이 지났을 때 그가 충성했던 일본은 패망을 2년 앞두고 있었다. 1943년 문부성에 적을 둔 탕택행길랑(유자와 고키치로·1887~1963)이 ‘國語史槪說’(국어사개설)을 도쿄에서 펴냈다. 일본인 국어학자인 그는 ‘국어’ 일본어의 유래를 연구해 책으로 묶었다. ‘상고시대’까지 추적한 일본어의 역사를 1부로 묶고 자신이 발표했던 논문 13편을 2부에 배치했다.



일본어는 일제강점기 조선에서도 ‘국어’로 강요됐다. ‘국어사개설’이 나온 그해 일제는 ‘제4차 조선교육령’을 발동해 학교에서 조선어 수업을 완전히 폐지했다.



발간 이듬해 부산의 한 교사가 그 책 초판본을 입수했다. 학교에서 조선어를 말하지도 가르치지도 못하던 시기에 ‘국어’로서 일본어 교육에 참고할 목적이었는지, 일본어란 언어 자체를 공부하기 위해서였는진 알 수 없었다. 그는 책 사이에 자신의 명함 한장을 끼워 책갈피로 썼다. 직장과 직함만 적은 간소한 명함이었다. 그는 “부산성지공립국민학교”(1923년 서면공립보통학교로 개교해 1941년 이 이름으로 변경)에서 “근무”하는 “조선공립국민학교 훈도(교사)”였다. 이름이 네 글자였다.



“大東光伴(대동광반).”



그가 일본인 교사였는지 창씨개명 한 조선인 교사였는지는 명함이 말해주지 않았다.



시간이 수십년을 쌓았다. 세월의 더미에 깔려 낡아가던 이 책이 ‘조선제종교’가 부산을 떠날 때 같은 차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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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출간된 일본어 연구서 ‘국어사개설’과 80년 동안 책 속에 끼여 있던 ‘훈도 대동광반’의 명함. 김진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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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제종교’ 첫 인쇄 2년 뒤 태어난 중국 신문 ‘대공보’ 기자 김용(진융·1924~2018)은 1948년 홍콩 지사로 자리를 옮겼다. 존 보링이 총독을 사임하고 떠난 지 89년 만에 그의 홍콩 생활은 시작됐다.



1954년 중국 무술 오씨태극권과 백학권의 고수들이 마카오에 설치한 링에서 대결했다. 홍콩과 중국 밖까지 큰 관심을 끌었다. ‘시장’을 확인한 ‘대공보’는 새로 창간한 석간신문에서 부편집장으로 일하던 김용에게 소설 집필을 맡겼다. 김용은 1955년 첫 소설 ‘서검은구록’을 연재하며 무협소설 대가의 길로 들어섰다. 1972년 완성한 마지막 작품 ‘녹정기’까지 15편의 소설은 그를 중화권 최고 인기 작가(탄생 100주년 되는 올해 3월 교보문고는 기념 특별전 개최)로 만들었다.



장무기(‘의천도룡기’ 주인공)는 1961년(1963년까지 연재)부터 장풍을 날렸다. 그의 구양신공과 건곤대나이심법은 한국 독자들까지 쓰러뜨렸다. 1986년 국내 출판사 고려원은 ‘의천도룡기’를 ‘사조영웅전’(1957~1959년)·‘신조협려’(1959~1961년)와 묶어 저작권 계약 없이 출간했다. ‘영웅문’ 3부작(총 18권)으로 제목을 바꾼 이 책들은 1999년까지 800만부(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조사)가 팔렸다. ‘제3부 중원의 별’로 둔갑한 ‘의천도룡기’는 1997년 6월10일에 4판 1쇄를 찍었다. 그중 5권이 2000년 남부의 한 도시로 배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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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 작가의 무협소설 ‘영웅문 제1부·3부’와 ‘천룡팔부 2’. 각각 그의 소설 ‘사조영웅전’, ‘의천도룡기’와 ‘협객행’을 한국 출판사가 작가의 동의 없이 제목을 바꿔 출간한 책들이다. 이문영 기자




위장과 도용이 증명한 인기





김용 소설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장무기가 엉뚱한 작품에서까지 상승무공을 펼쳤다. 그해 ‘그 도시’의 한 건물엔 1994년 번역·출간된 2권짜리 ‘완결 의천도룡기’도 도착했다. ‘의천도룡기’를 ‘미결’로 만들어버린 이 책은 김용과 무관했다. 창랑객이란 중국 작가가 ‘의천도룡기 이후’를 상상해 쓴 ‘고룡경사록’을 국내 출판사(혜민)가 ‘김용 대하역사소설’로 속여 해적 출판했다.



김용의 ‘협객행’(1966~1967년)을 제목 그대로 단 책(영학출판사)도 1991년 그 도시로 왔다. ‘협객행’의 제목을 ‘천룡팔부 2’(세계)로 무단 변경한 책 역시 2년 뒤 합류했다. 김용은 ‘천룡팔부 2’도 쓴 적이 없었다. 그의 소설 ‘천룡팔부’(1963~1966년)는 ‘협객행’을 도용한 ‘천룡팔부 2’와 아무 상관이 없었다.



제목만 바꿔 다른 작품처럼 위장한 김용의 책들이 그의 이름을 훔친 위작들과 한 공간에서 뒤섞였다. 먼 바다를 건너온 ‘다빈치 노트’의 매커디 편집본과 존 보링의 ‘십진법 시스템’, 섀퍼가 소장했던 테넌트의 ‘과학철학’과 조선총독부 촉탁이 쓴 ‘조선제종교’가 서로 다른 시기에 서로 다른 경로로 ‘그곳’에 모였다. 서로의 존재를 모른 채 수십년을 동거한 그 책들 중에 ‘국어사개설’도 있었다. 1996년부터 그곳에 있었던 책이 2024년 ‘변색된 속’을 드러냈을 때 80년 묵은 명함 한장이 나왔다.



‘대동광반.’



표지 표면이 부서져 내리는 오래된 책과 빛바랜 이름과의 관계는 쉽게 파악되지 않았다. 명함 주인이 근무했던 부산 성지초등학교(현재 명칭)엔 1955년 이전 기록이 존재하지 않았다(교감 “그해 학교에 난 불로 건물뿐 아니라 모든 자료가 전소됐다”). 교육 당국도 실마리를 제시하지 못했다(부산교육역사관 학예연구사 “일제강점기 교육 사료는 보존·확보 자체가 거의 안 돼 있다”).



단서는 책에 숨어 있었다. 표지 안쪽에 파란색 장서인이 있었다. 자음을 자르고 모음을 눕힌 글자를 해독하면 ‘정신득’이 됐다. “昭和 十九年 八月二一 入(소화 19년(1944년) 8월21일 입)”이란 책 입수 날짜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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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사개설’ 표지 안쪽에 찍혀 있는 장서인. 김진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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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득(1911~1994).



그는 경상남도 동래에서 태어나 평생 교육자로 살았다. 1931년 부산진보통학교 훈도로 출발해 1976년 경남상업고등학교 교장으로 퇴임했다. 1980년엔 부산경상전문대학(현 부산경상대학교) 초대 학장을 지냈다. 여러 문예지에 글을 발표하며 수필집을 낸 작가이기도 했다.



‘국어사개설’은 그가 고인이 되고 2년 뒤 아들이 ‘그곳’에 기증한 책이었다. 기증 과정을 설명하던 아들(그곳과의 관계는 2회에)은 “명함은 아버지의 것”이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조선총독부는 1939년 ‘조선인 씨명에 관한 건’(창씨개명)을 공포하고 따르지 않는 교직원은 제명하거나 해고했다. 학생은 정학·퇴학 조처하고 학교 차원에서 거부하면 폐교했다. 정신득은 ‘국어사개설’에 장서인을 찍기 다섯달 전인 1944년 3월 부산성지공립국민학교로 옮겼다.



“형극의 지옥”.



그는 “아이들이 귀엽기란 한이 없”어도 “일제의 훈도 노릇”하던 그때를 떠올리면 “수치스럽기만 했다”(수필집 ‘그물 한 코’)고 썼다. “불평 훈도로 낙인”찍혔던 당시 학교를 “일본 사람 교장이 버티고 있던” 지옥으로 표현했다. 그는 해방을 상상하지도 못했던 1945년 3월 “사직원을 교장 책상 위에 던”지고 학교를 나왔다. ‘세상이 바뀐’ 그해 10월1일부터 부산항고등여학교(현 경남여고)에서 국어를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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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자이자 한글운동가였던 정신득의 1950년대 초 동래여고 재직 시절 모습. 정신득 추모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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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득은 열정적인 한글운동가였다. 그는 부산 최초의 한글운동단체 ‘한얼몯음’ 결성에 주도적으로 참여(이순옥 ‘광복기 부산 지역 한글운동과 한얼’)했다. 현직 교사였지만 ‘한얼’이 설립을 이끈 야간 한글교육기관 ‘배달학원’에서도 수업했다. ‘국어사개설’ 출간 한해 전 일제는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켜 ‘한글 말살’의 고삐를 조였다. 당시 옥고를 치른 한글학자 최현배는 한얼몯음이 이름을 바꾼 ‘영남국어학회’에 상임위원으로 힘을 보탰다. 정신득은 1968년부터 한글학회(조선어학회 후신) 제3·4대 부산지회장을 지낸 뒤 1971년 부산 외솔회(최현배의 뜻을 계승한 단체)의 초대 회장이 됐다.







“전국에서 효시일까 한다”





“아무래도 잊을 수 없는 해방 직후의 양심적인 정열이 낳은 하나의 소산이라 하겠다.”



1959년 4월 서재의 책을 정리하던 정신득은 “잃었던 보배를 찾은 듯” 기뻐했다. “보배”는 그가 고등여학교에서 국어를 담당한 지 5개월 만(1946년 3월)에 “짜낸” 결과물이었다.



“國語讀本(국어독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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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득이 동료 교사이자 영남국어학회 동지였던 홍영식과 1946년 3월 제작한 경남공립고등여학교 3·4학년용 임시 교과서 ‘국문독본’. 아들 제공


정부 차원의 교과서가 없던 시절이었다. 그는 소속 학교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제3·4학년용 임시 교과서”를 자체 제작했다. 영남국어학회 동지이자 같은 학교 교사였던 홍영식(일제강점기 조선어학회에서 활동)과의 합작품이었다. 두 사람이 직접 예시 글을 고르고 손으로 써서 등사기로 찍었다. 이 교과서를 두고 정신득은 “실로 역사적인 감행”이라며 “전국에서 효시일까 한다”(문교부가 발간한 첫 국어 교과서는 1948년 10월 ‘바둑이와 철수’)고 평했다. 13년 뒤 ‘독본’을 발견해 들춰보던 그는 “잠자던 정신이 되살아난 듯한 느낌을 금할 수 없다”며 늦은 소회를 여백에 남겼다.



그 소회를 불러내기까지 다시 65년이 흘렀다. 명함 한장이 품은 이야기도 그만큼 불어났다. 책의 페이지마다 명함처럼 깃든 시간과 그 이야기들을 통째로 지워버리는 ‘사건’(▶② ‘45만권의 생사’)이 2023년 여름 발생했다. ‘그곳’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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