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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6 (일)

“뉴스에 아베만 나오면 분통이…죽기 전에 이겨야 않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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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동원 피해자 김정주·양금덕 할머니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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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여름이었다. 1945년 2월 국민학교(초등학교)를 갓 마치고 일본 도야마 후지코시강재공업 군수공장에 끌려간 열네살 김정주는 이 고통이 언제쯤 끝날지 알 수 없었다. 아침저녁으로 먹는 보리밥 몇 숟가락과 점심에 먹는 식빵 반 조각으론 새벽부터 밤까지 이어지는 노동을 견뎌낼 기력이 없었다. 허기를 달래려 공장에 난 풀을 뜯어먹고 나면 머리가 아파 바닥에 뒹굴었다. “일본 중학교에 공부하러 간 언니처럼 너도 일본에 가면 학교에도 보내주고 일해서 돈도 벌 수 있다”는 일본인 교사의 말에 속아 길을 나선 것이 한스러웠다. 그의 언니 김성주 역시 ‘조선여자정신근로대’라는 이름으로 나고야의 미쓰비시중공업 항공기제작소 공장에 끌려가 중노동을 하고 있던 것을 김정주의 가족이 알 리 없었다.

14살에 끌려 간 김정주 할머니
“손발이 퉁퉁 붓고…그 고통을
즈그가 뭘 안다고 부인을 허요?
먼저 떠난 동무들 위해서라도
이제는 일본 사과 받아야 것소”


열다섯살 양금덕에게도 그 무렵 여름은 가혹했다. 눈에 띄게 총명해 급장을 맡은 것이 문제였다. 일본 중학교로 유학을 보내주는데 급장인 ‘가네코’(일본식 이름)가 앞장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본놈들이 조선 사람을 여지껏 동물 취급하고 살었는디 이제사 느그를 뭣이 이뻐서 중학교를 보내준다고 허겠냐. 가지 마라, 낭설이다.” 아버지가 말렸지만 금덕은 버틸 재간이 없었다. “네가 가지 않으면 부모를 잡아 가둔다”는 말에 그만 도장을 찍었다. 김정주보다 한해 앞선 1944년 5월 양금덕은 나고야 군수공장으로 향했다. 양금덕처럼 끌려간 여자아이가 호남에서 138명, 충청에서 150명이었다.

그 여름으로부터 74년이 흘렀다. 1945년 8월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전쟁이 끝나면서 두 소녀의 고통은 곧 끝날 것만 같았다. 해방된 줄도 모르고 공장에 갇혀 있다 그해 가을 고향에 돌아왔을 때만 해도 그런 희망이 있었다. 전쟁에 짓밟힌 어린 시절에 대해 어떤 보상도, 누구의 사과도 받지 못한 채 74년을 보내게 될 거라고 상상한 이들은 없었다. 올여름, 일본의 ‘진실한 사과’를 받기 위해 생의 가장 뜨거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양금덕(90) 할머니와 김정주(88) 할머니를 각각 지난 9일과 10일 광주와 서울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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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저 죽일 놈.’ 혼자 뉴스를 보다가도 아베가 나오면 내가 주먹을 쥐어요. 그만치 분통이 터져요.” 무릎 관절이 좋지 않아 혼자 일어서는 일조차 쉽지 않은 김 할머니가 작은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과거사에 대해 언급하는 것만으로 그의 눈가에는 금세 눈물이 맺혔다. “철조망에 가둔 노예”였다는 근로정신대 생활은 김 할머니의 인생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새벽 5~6시면 일어나 출근해서 저녁 늦게까지 잠시도 앉지 못한 채 일을 하고 나면 다리가 퉁퉁 부어 있었다. 김 할머니처럼 체구가 작은 여자아이들은 궤짝을 쌓고 올라가야 작업대에 손이 닿았다. 씻는 일은 고사하고, 밤낮 없는 공습경보 때문에 일본에 온 날 지급받은 신발을 해방될 때까지 벗질 못했다. 몸이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었다. “조회 때 아픈 아이가 있다고 말을 허면 ‘아픈 사람은 공장에 안 나가니 밥도 없다’고 소대장이 그러거든. 그 부실한 밥이라도 안 먹으면 사람이 죽제. 그래서 아픈 동료가 고꾸라질 상황이라도 밥을 먹이려고 손잡고 끌고 나가고 그랬어.” 양 할머니의 설명이다. 김 할머니의 언니인 김성주(90) 할머니는 미쓰비시 공장에서 손가락이 잘려나갔지만 치료를 받지 못해 평생 장애를 갖게 됐다. 소녀들은 그리던 고향에 돌아온 뒤에도 일본에 다녀왔다는 이유로 ‘위안부’라고 수군거리는 이들의 시선 때문에 평범한 삶을 살 수 없었다.

15살에 끌려 간 양금덕 할머니
“사죄를 해도 시원찮을 마당에
아베가 잘했다고 하니 천불 나
젊은 사람들이 바싹 일어나서
‘내 일이다’ 싸워줬으면 좋겠소”


“배가 고파서 울고, 양말 한 켤레를 안 줘서 그 추위에 손발이 퉁퉁 부어 울고. 그 고통을 아베 즈그가 뭘 안다고 (강제동원 배상 판결을) 부인을 허요?” 한국 대법원의 강제동원 배상 판결을 두고 아베 신조 총리를 비롯한 일본 정부가 1965년 체결된 한-일 청구권협정 위반이라고 주장하는 데 대해 김 할머니는 분노했다. 그 고생 끝에 월급 한푼 받지 못하고 이제나저제나 밀린 월급을 돌려받을 날을 기다린 지 70년이 넘었다. 양 할머니는 “너희들 주소가 다 있으니까 돈을 찾으면 다 보내주겠다”던 공장 사감의 약속을 믿고, 고향에 돌아온 뒤 얼마간 아침이면 마을 어귀에 나가 우체부를 기다렸다고 했다. 단순히 ‘돈’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거짓말에 속아 일본에 끌려가 고통받은 지난날을 떳떳하게 인정받고 싶었다. “그때 돈으로 월 30엔. 그것을 74년이 지나도 안 보내줘. 즈그가 우리한테 공부 가르칠 때 ‘일본 사람은 쇼지키(정직)가 중요허고 절대 누구를 안 돌려먹는다’고 가르쳤는디 이렇게 불량할 줄을 누가 알 것이여. 사죄를 해도 시원찮을 마당에 즈그가 잘했다고 저러니까 천불이 나 죽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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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을 넘긴 투쟁의 기억을 떠올리면 원망스러운 것이 ‘일본’만은 아니다. 1999년 나고야지방재판소에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낸 뒤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음지에서 그들만의 싸움을 이어왔다. 소녀 시절 굶주린 양 할머니와 소녀들에게 밥덩이를 건넸던 미쓰비시 공장 인근 민가의 일본인들처럼, 그들을 도운 건 평범한 일본 시민들이었다. ‘나고야 소송 지원회’라는 이름으로 일본의 양심있는 이들이 비용을 분담해 양 할머니를 비롯한 미쓰비시중공업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일본 내 소송전을 돕는 동안 한국 정부와 정치권은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어디나 높은 놈들은 다 도둑놈”이라며 할머니들이 고개를 가로젓는 이유다.

“일본 국회의원들 앞에서 도와달라 해도 누구 하나 물어보는 놈 없습디다. 우리나라 국회 가서도 1층부터 꼭대기까지 훑었는데 누구 하나 도와주는 사람이 없고. 박근혜 대통령이 의원 하던 시절에 그 사무실을 세번이나 쫓아가서 제발 도와달라고 했는디 한번을 만나게 해주질 않더라고. 오죽하면 일본 사람들이 ‘느그 나라 국회의원들이 도와주면 좋겠다’고 할 정도로….” 김 할머니가 말했다. 그가 그토록 만나고자 했던 ‘박근혜 의원’이 대통령이 된 뒤 되레 피해자들의 투쟁은 ‘재판 거래’의 대상이 되었고, 정의는 지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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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에서 믿음을 준 이가 없는 만큼 현 정부와 국회에 대해서도 불신이 짙다. 양 할머니는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엔 어디에다 호소하겠소. 대통령 책임이지, 누가 책임질 사람이 없소. 70여년을 이렇게 내버려두고 있는 게 정부요? 지금도 말로만 강하게 해갖고 뭘 하겠소.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인 것을. ‘우리가 퍼뜩 해결할 테니 걱정 말라’고 빈말이라도 해주는 사람이 아직 없으니께.”

70년 넘게 고독한 싸움을 해온 이들 곁에 지금은 시민들이 있다. 김 할머니는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론 미안하다”고 했다. “우리 기업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또박또박 말했다. “나의 운명은 돈으로도 바꿀 수가 없고, 일본에 갔다 왔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돼버렸소. 안 간 데 없이 쫓아다닌 세월이오. 먼저 간 동무들을 위해서라도 아베의 사과를 이제는 받아야 되겄소.” 양금덕 할머니도 아직 싸울 힘은 충분하다는 듯 힘을 주어 말했다. “젊은 사람들이 바싹 일어나지 않으면 안 돼요. ‘내 일이다’ 하고 ‘뼈만 남아도 이겨봅시다’ 하고 싸워줬으면 좋겄소.”

광주 서울/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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