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한 비판이 관계 단절시킨 적 없고
논쟁을 통해 서로의 사상 발전시켜
아도르노-벤야민 편지 1928~1940
테오도르 W. 아도르노·발터 벤야민 지음, 이순예 옮김/길·3만8000원
발터 베냐민과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긴 우정의 역사를 가지고 자신들의 사유를 교환했던 지식인들이다. 이들의 우정의 역사는 1923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시작되었으며, 온전한 형태로 남아 출간된 것만 121편에 달하는 서신의 지속적 교환을 통해 이어졌다. 둘은 모두 자본주의적 현대 세계로부터의 구원을 꿈꾸었던 유대계 마르크스주의 지식인이었으며, 1933년 나치 집권 이후 망명길에 올랐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야만과 지옥으로 변해버린 파국의 역사 속에서도 이들은 각자의 망명지에서 지속적으로 서로에게 편지를 보내 각자의 삶에 대한 응원과 애정의 인사를 보냈으며, 때로는 우호적으로, 때로는 매우 비판적으로 상대방의 철학적 사유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기도 했다.
이들이 주고받은 방대한 양의 서신모음집이 이번에 이순예 교수의 노고를 통해 최초로 한국어로 번역, 출간되었다. 이 방대한 서신교환 속에 우리는 아도르노가 베냐민에게, 베냐민이 아도르노에게 각각 어떤 구체적인 사유의 ‘흔적’을 남겼는가를 확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들이 역사적 위기의 순간 속에 어떻게 서로에게 의지하면서 우정을 발전시켰는가를 읽어낼 수 있다.
망명생활 속에서 두 지식인은 서로에 대한 의지 속에 우정을 키워나갔다. 특히 베냐민은 1930년대 내내 파리에서 매우 가난한 시기를 보낸다. 그는 아도르노와 아도르노의 이모, 그리고 아도르노가 소개해준 엘제 헤르츠베르거 부인으로부터 각각 3분의 1씩 도합 450프랑의 생활비를 매달 보조받는다. 또한 아도르노의 주선을 통해 사회조사연구소의 연구비 지원을 받는다. 이때 연구소가 지원하는 베냐민의 프로젝트가 바로 그의 대 기획인 <파사젠베르크>(아케이드 프로젝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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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연구소로부터의 지원은 난항을 겪어야했다. 베냐민의 난해한 철학적, 신학적, 문화비평적 관점들은 프리드리히 폴로크, 레오 뢰벤탈 등 사회과학, 역사학 성향의 편집위원들에게는 수수께끼와 같은 언어로 들렸을 뿐이기 때문이다. 아도르노는 베냐민에게 이들을 설득해서 지원금을 탈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들을 일러주기도 하고, 호르크하이머에게 수차례 편지를 써서 베냐민의 프로젝트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며, 지원금이 파리 현지 물가에 맞게 조정되어야 함을 강하게 호소한다. 그의 설득은 효과를 보았다. 프리드리히 폴로크는 베냐민에게 전보를 보내, 연구소가 전반적으로 지원금을 삭감하고 있는데 그에 대해서만 (아도르노의 설득에 의해) 지원금이 늘어나니 이를 외부에 발설하지 말라고 전하기도 했다.
두 지식인은 지속적인 비판적 논쟁과 개입 속에서 자신들의 사유를 발전시켜나간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이 둘 사이의 관계를 단절시킨 적은 없다. 오히려 두 사상가가 격렬한 논쟁을 거치며 서로의 영향을 수용해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켜 나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도르노가 최초로 베냐민에게 가한 커다란 비판은 베냐민이 1935년 작성한 <파사젠베르크>의 연구계획서 ‘19세기의 수도, 파리’에 대한 것이다. 1935년 7월12일의 편지에서 아도르노는 이 글에 나타난 베냐민의 낙관주의에 대해 비판한다. 즉 ‘꿈’에서 ‘각성’으로의 무매개적(직접적) 이행이 비변증법적이라는 것이다. 또 ‘계급 없는 사회’라는 마르크스주의적 이상을 ‘태곳적 유토피아’라는 인류학적 가설과 결부시킨 것 역시 낭만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베냐민의 가장 유명한 논문인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 대해서도 아도르노의 비판이 가해진다. 특히 여기서는 베냐민이 브레히트의 영향으로 넘겨받은 기계적 유물론의 유산이 문제시된다. 즉 베냐민은 이 논문에서 자신의 사유를 추동하던 신학적 모티브를 버리고, 유물론적 법칙성과 토대-상부구조 환원론에 근접했다. 역사적 진보에 따라 예술매체 역시 진보할 것이며, 그것이 아우라의 파괴를 향해 나아갈 것이라는 베냐민의 진단은 그 자신이 거부해온 진보사관의 구조였던 것이다. 1936년 3월18일 작성한 편지에서 아도르노는 이러한 모순점을 비판한다. 그럼에도 그는 이 논문의 정치적 유의미성이 “<국가와 혁명>을 읽은 이래로 제가 접한 정치이론 가운데 몇 안 되는 가장 심오하고 강력한 것”이라면서 지지를 보낸다.
1938년 11월10일 보내는 편지에는 베냐민의 논문 ‘보들레르의 작품에 나타난 제2제정기의 파리’에 대한 아도르노의 강력한 비판이 담겨 있다. 예컨대 ‘보들레르가 포도주에 관한 시를 쓴 것은 포도주세와 관세의 영향’이라는 식의 속류 유물론의 흔적이 다시금 발견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도르노는 “보들레르 시대의 상품 형식 분석”이라는, 보다 넓은 범주의 이론적 고찰 없이 조야한 방식의 유물론에 경도되어선 안 된다고 주장한다. 마르크스주의를 과도하게 기계적으로 수용하려는 이러한 경향 속에서는 베냐민 사유에서 ‘신학’의 폭발적 성격이 사상된다. 아도르노는 베냐민이 그 본연의 신학적인 서술에 충실할 때 훨씬 더 마르크스주의적이고 혁명적이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즉 베냐민이 그 자신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베냐민은 답장에서 아도르노가 자신의 의도를 완전히 오해했다며 항변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의 글을 대폭 수정하고,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프에 관하여’이라는 새로운 글을 제출한다. 이 새로운 보들레르 논문은 지금까지도 베냐민 사상의 진수를 보여주는 그의 가장 탁월한 논문으로 남아 있다. 이 논문을 접하고 아도르노가 “우리의 생산적인 교류는 이렇게 변증법적으로 일단 결실을 거두었습니다”라고 답한 것은 과장이 아니다. 이외에도 베냐민 역시 아도르노의 음악철학, 대중문화이론에 대해서 신랄한 비판을 가한다. 그러면서도 이 두 사상가는 베냐민의 ‘기술복제시대’ 논문과 아도르노의 ‘재즈에 관하여’를 함께 묶어, 후기자본주의 시대의 예술에 관한 모음집을 발간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하고 나치 독일은 베냐민이 머문 프랑스마저 점령한다. 베냐민은 느베르의 집단수용소에 감금되었다가 풀려난다. 이 사건은 모두를 경악케 했으며, 그 후 베냐민의 미국으로의 이민을 위해 미국에 있는 아도르노와 사회조사연구소는 동분서주했다. 1940년 8월2일, 베냐민은 도피 중 아도르노에게 마지막 편지를 보낸다. 이 참담한 상황의 와중에도 그는 쿠바 아바나로 자신을 망명시키고자 계획을 짜고 있는 아도르노의 존재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안고 있었다. “나에게 크나큰 위안은 그대가 뉴욕에 있으면서 내게 ‘연락이 닿고’ 그리고 진정한 의미에서 사태를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마르세유에서 호르크하이머가 마련해준 신원보증서를 들고 피레네 산맥을 넘던 베냐민은 스페인 접경마을인 포르부에서 그의 신변이 독일로 넘어갈 것이라는 소식을 접한다. 베냐민은 9월25일 “부탁건대 내 친구 아도르노에게 내 생각을 전달해 주십시오”라는 짤막한 편지를 측근에게 남기고 자살한다.
이 서신모음집에서는 이처럼 디아스포라의 비극적 운명 속에서도 서로 의존하며 자신들의 사유를 발전시킨 두 망명 유대인 지식인들의 삶과 우정의 구체적인 모습들을 확인할 수 있다. 베냐민과 아도르노의 삶과 철학에 관심있는 모든 분께 권유하고 싶다. 그리고 이 방대한 서신을 번역한 이순예 선생과 출판사의 노고에 감사를 전하고자 한다. 한상원 충북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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