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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6 (일)

[배명복 칼럼] 변호사 문재인과 대통령 문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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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전쟁을 할 게 아니라면

양국 간 갈등 외교로 풀 수밖에

한풀이식 국민감정 선동 말고

냉철한 국가이성으로 접근해야

중앙일보

배명복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철학문화연구소가 간행하는 계간지 ‘철학과 현실’ 최신호(2019년 여름)에 눈에 띄는 글이 실렸다. 양승태 이화여대 명예교수가 쓴 ‘한국의 진보, 허구와 위선의 역사의식부터 청산해야’란 제목의 28쪽 분량 특별기고다.

그는 진보가 한국의 현대 정치사에서 역사의식을 주도해온 것은 맞다면서 그 원인을 한국 보수의 빈곤한 역사의식에서 찾는다. 보수는 반공(反共)이라는 강압적 이념에 경도돼 교과서 요약 수준의 자유주의 이념을 표방하는 데 그쳤다는 비판이다. 하지만 역사의식의 빈곤함으로 따지면 한국의 진보도 별반 다르지 않다고 주장한다. 지금도 1980년대 운동권 필독서인 『해방 전후사의 인식』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 근대화를 추구할 수 있는 역량이 있었음에도 부도덕한 일본 제국주의의 폭력에 의해 국권을 침탈당하면서 자생적 근대화를 추구할 기회를 박탈당했고, 해방 후 통일과 민주주의를 실현할 충분한 역량을 갖추고 있었지만, 외세와 결탁한 친일·독재 세력 때문에 분단이 되고 민주주의의 실현이 지체됐다는 게 그가 보는 한국 진보의 역사의식이다.

두 가지 점에서 이러한 역사의식은 허구이고 위선이라고 양 교수는 지적한다. 역사의 흐름을 총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특정한 도덕적 관점에서 일방적으로 단죄하고 분식(粉飾)한 것이 첫 번째 이유이고, 우리 스스로 져야 할 망국의 역사적 책임을 남에게 전가한 것이 두 번째 이유라는 것이다.

“문재인 정권은 허구와 위선의 역사의식에서 벗어나기는커녕 조선조 통치체제의 정신적 퇴물인 위정척사(衛正斥邪) 이념의 교조적 도덕주의와 편협한 민족주의에 사로잡혀 수구적인 정책을 양산하고, 불필요한 대내외적 마찰과 혼란을 초래해 국가이익을 저해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그의 비판이다.

양 교수의 글을 길게 인용한 것은 그 어느 때보다 균형 잡힌 역사의식과 냉철한 국가이성이 절실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징용 피해자에 대한 대법원의 배상 판결에서 비롯된 한·일 갈등의 불똥이 경제로 튀고 있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불만을 통상을 무기로 앙갚음하는 아베 정부의 야비함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외교로 풀어야 할 문제를 외교로 풀지 못한 것은 문재인 정부의 책임이다.

문 대통령은 2000년 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 원고 측 대리인으로 참여했다. 이 소송은 2012년 대법원 소부의 판결에 이어 지난해 10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로 승소가 확정됐다. 그 사이 변호사 문재인은 의뢰인의 이익을 대변하는 입장에서 국가이익을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하는 대통령으로 처지가 바뀌었다. 대법원 확정판결로 한·일 협정에 기초한 양국 관계의 근간이 흔들리게 생겼는데도 그는 삼권분립, 피해자 중심주의, 개인의 권리 존중이라는 법률가적 원칙을 들어 사실상 방치했다. 변호사 문재인과 대통령 문재인은 달라야 함에도 변호사의 논리에 얽매여 몰려오는 쓰나미 앞에서 방관하고 있었던 셈이다. 예상대로 일본의 보복은 현실이 됐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민간의 몫이 되고 있다.

전쟁을 할 게 아닌 한 국가 간 갈등은 외교로 풀어야 한다. 외교는 국가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국가이성의 표현이다. 국민감정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그걸 경계해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국민을 선동하고 있다. 의병을 일으킬 때라느니, 전라도 주민이 이순신 장군과 함께 12척의 배로 나라를 지켜냈느니, 국채보상운동과 금 모으기 운동을 상기할 때라느니 하며 반일감정을 부추기고 있다. 동학농민혁명을 들먹이며 ‘죽창가(竹槍歌)’를 페이스북에 올린 청와대 참모도 있다. 직을 걸고 대통령의 오판을 막아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대통령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있다.

개각을 앞두고 청와대 고위 참모들이 서로 원하는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충성경쟁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고언과 직언은 없고, 다들 대통령 입안의 혀처럼 굴고 있다는 것이다. 외교가 제대로 될 턱이 없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무덤을 파헤쳐 부관참시하듯 과거사로 일본을 공격하는 한풀이 외교를 언제까지 계속할 것인가. 북한과 중국 앞에서는 저자세를 보이고, 한·일이 해결할 문제를 미국에 들고 가 나서달라고 떼를 쓰는 어리광 외교를 언제까지 계속할 것인가.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이제라도 냉철한 국가이성에 기반한 어른스런 외교로 국익의 손상을 막아야 한다. 실착(失錯)이 있었다면 깨끗이 인정하고, 일본과 타협점을 찾아야 한다. 총선을 앞두고 경제의 실정(失政)과 남북관계의 교착을 일본 때리기로 만회할 생각이라면 오산도 그런 오산이 없다.

“진정으로 강한 자는 싸움에 졌을 때 상대의 강함을 인정하면서 그보다 더 강해지려 노력한다. 비겁하고 나약한 자는 싸움에서 얻어맞고도 상대를 때려눕힐 계획을 세우지 못하고 동네방네 징징대고 다니며 ‘쟤가 나를 때렸대요’ 하면서 소란을 피운다.” 양 교수는 우리가 지금 그런 꼴이 아닌지 묻고 있다.

배명복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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