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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6 (수)

[필동정담] 너무 손쉬운 민족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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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1894년 전북에서 전봉준이 주도해 일으킨 농민 봉기는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이 발단이었다. 조선 후기 대부분 민란이 그랬듯 억압적, 수탈적 노예제 사회에 신음하던 민초들이 내지른 단말마 비명이었다. 그걸 '동학교도의 난'으로 색칠한 것도, 청에 진압군을 청한 것도 고종을 정점으로 하는 조선 조정이었다. 청의 파병에 일본이 맞출병으로 대응하면서 청일전쟁이 벌어졌고 이해 12월 조선 관군과 일본군이 연합해 농민군을 진압했다. 민족주의 좌파 진영은 일본군과 충돌한 사실에 현미경을 들이대 동학을 항일 민중운동처럼 기술해왔다. 그러면서 후일 한일합방에 적극 동조한 '일진회'의 주축이 동학이었다는 사실은 못 본 척한다. 과장과 왜곡, 생략이 많은 주장이다.

며칠 전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이 페이스북에 "SBS 드라마 '녹두꽃' 마지막 회를 보는데 한참 잊고 있던 이 노래가 배경음악으로 나왔다"며 '죽창가' 링크를 올렸다. 나는 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반일·반봉건적 관점에서 동학운동을 다룬 드라마·노래라고 한다. 이 시점에 그런 글을 올린 뜻은 알겠는데 자리가 그쯤 되면 더 신중하게 연구하고 말할 필요가 있다. 진보진영에 속한 언론인 출신 역사연구가 윤덕한이 쓴 '이완용 평전'을 권한다. 동학과 일진회의 관계가 잘 정리돼 있다.

요 며칠 새 청와대와 여권에선 '이순신과 열두 척의 배' '국채보상운동' '의병운동' 같은 말이 줄지어 나오고 있다. 책깨나 읽고 썼다는 한 여권 지식인은 "아베 편드는 사람은 동경 가서 살든가" 같은 말도 했다. 그가 젊었을 시절엔 '한국이 그렇게 마음에 안 들면 북한 가서 살든가' 같은 폭력적 논법에 몸서리쳤을 것 같은데 말이다. 뭐가 다른가.

세상에 정치인들이 하는 선동 중에서 민족주의 선동만큼 안전한 것이 없다. 민족주의는 그만큼 힘이 세다. '너 친일파?' 한마디면 웬만한 반론은 무력화시킬 수 있다. 문제는 내부용이라는 것이다. 전 국민이 반일 머리띠 두르고 가두행진하면 정치인들은 신나겠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민족주의가 손쉽다고 마구 휘두르면 후유증이 크다. 최근 여론조사를 보면 반일이라면 무조건 지지하던 예전과는 다른 흐름이 눈에 띈다. 많이 이성적이고 차분해졌다. 싸움도 이성으로 해야 한다.

[노원명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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