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공항에서 영종대교를 타고 북인천IC를 막 지나면 오른편 청라국제도시 초입에 25만㎡(약 7만5625평·축구장 35개) 대규모 터가 나타난다. 대형 잔디 구장과 H자 형태로 된 연수동 등 시설 규모만 상암월드컵경기장의 5배. 하나금융그룹이 아시아 최대 금융 랜드마크를 꿈꾸며 7300억원을 들여 조성 중인 '하나금융타운'이다. 2015년 1단계로 그룹 통합 데이터센터를 준공했고, 지난 5월엔 2단계로 그룹 연수 시설인 '글로벌 캠퍼스' 문을 열었다. 마지막 3단계는 본사 건물을 올리고 을지로 본사 기능을 대부분 이전하는 것이다. 앞으로 3~5년 뒤엔 하나금융그룹이 청라 시대를 연다. 김정태 하나금융 회장은 "청라에 가보면 하나금융의 비전이 훤히 다 보인다. 두고 보라. 하나금융은 첨단 데이터 회사로 탈바꿈할 것"이라고 말했다.
◇을지로에서 청라로
김정태(68) 회장이 하나금융그룹을 이끈 지 8년 차에 접어들었다. 하나금융은 내규상 만 70세 이상이면 회장 연임이 불가능하다. 이번 세 번째 임기가 끝나는 2021년 만 70세가 되는 김 회장으로선 사실상 현역으로 일할 마지막 기회다.
1981년 서울은행 신입 행원 김정태는 유달리 손이 커서 당시 은행원에겐 필수였던 주판 놓는 것을 힘들어했다. 그런 그에게 뜻밖의 기회가 왔다. 해외 전산 프로그램 도입이 한창이었던 전산부에서 영어 읽을 줄 아는 대졸자 김정태를 호출한 것이다. 그는 이때 코딩을 배우고 IT를 이해했다고 한다. 스스로를 ‘전산부 출신’으로 부르는 김정태 하나금융그룹 회장은 “하나금융은 앞으로 데이터에 기반한 정보 회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연정 객원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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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처음 하나금융지주 수장을 맡은 2012년 하나은행은 론스타에서 외환은행을 인수했다. 당시 통합에 반대했던 외환은행 노조를 달래려고 5년간 외환은행 독립 경영을 약속했지만, 김 회장은 2년 반 이상 통합 일정을 앞당겼다. 을지로 본사 회장 집무실에는 노조의 꽹과리 소리가 종일 울려 퍼졌다. "각각 1조원씩 벌던 두 은행이 통합 후에 수익이 떨어져 급기야 합쳐서 1조원밖에 못 벌더란 말입니다. 밖에서는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는데 안에서는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니 시너지가 날 턱이 있습니까. 그래서 조기 통합을 강행한 겁니다."
2015년 KEB하나은행 체제를 출범시켰지만 실적은 통합 이전 수준(순이익 총 2조원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해외 영업이 강점인 외환은행과 합친 시너지를 내지 못했다는 게 금융계 평가다. 올 1분기 실적만 봐도 자산 규모가 훨씬 뒤지는 우리금융(당기순이익 5686억원)에 밀린 4위(5560억원)다. 신한·KB 등 선두권과는 3000억원 넘는 격차다. 금융권이 주목할 만한 M&A도 없었다.
◇"난 전산부 출신, 너희가 코딩을 알아?"
김 회장은 디지털 전략 회의 때만 되면 신경이 곤두선다. 회의 때 임원들이 공급자 처지에서 얘기하면 "요즘 나온 핀테크 앱 좀 써보고들 얘기하라"며 지적하기 일쑤다.
그는 "우리 회사를 포함해 시중은행이 전부 인터넷 뱅킹을 하는데도 사람들이 인터넷 전문 은행을 따로 찾는 이유가 뭐겠나. 아직 우리가 공급자 마인드를 못 버리고 불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라면서 "쓸데없는 기능들로 꽉 채워진 무거운 앱에서 벗어나 필요한 기능만 빨리빨리 돌아가는 가벼운 앱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1981년 서울은행 내자동 지점에서 은행원 생활을 시작한 그는 입행 6개월 만에 그만둘까 심각히 고민했다. 그는 크고 두꺼운 손 때문에 민첩하게 주판을 놓는 것도, 깔끔하게 원장을 기입하는 것도 시원찮아 매일같이 혼났다. 사실 그와 처음 악수하는 사람이면 곰 발바닥 같은 그의 손에 백이면 백 모두 깜짝 놀란다. 똑똑한 상고 출신들에게 치여 "대졸이 뭐 이래" 소리도 들었다.
그런 그에게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IBM 운용 체계를 도입하면서 영어 원서 읽을 사람이 필요해진 전산부에서 '대졸자 김정태'를 발탁한 것이다. 그는 플로차트(flow chart·흐름도) 그리고 코딩하면서 IT를 배웠다. 이 경험이 40여 년 지난 요즘 도움될 줄은 그땐 몰랐다.
그는 "결국 전산을 쓰는 현업 부서 사람들이 개발 때부터 관여하고 개발자만큼 잘 알아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라면서 "핀테크나 인터넷 은행이 금융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미미하다고 안심한다면 우리도 망해버린 코닥이나 노키아 같은 운명이 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하나금융이 전 직원에게 코딩 교육을 하고, 현재 1800명 수준인 통합 데이터센터 인력을 3500명까지 늘리는 한편, 서울대 컴퓨터공학부, 산업공학과, 통계학과 교수들을 모셔 핵심 인력과 1대1 멘토링 교육을 하는 것도 모두 이런 맥락에서다. 100억원을 들여 만든 하나금융융합기술원에서는 인공지능·빅데이터 관련 석·박사급 인력 40명이 근무하고 있다. 삼성전자 출신 소프트웨어 전문가 김정한씨를 원장으로 앉혔다.
김 회장은 "결국 회사의 미래는 'ABCD'에 달렸다"고 했다. A는 AI(인공지능), B는 블록체인, C는 클라우드, D는 데이터의 머리글자다. 'H-ABCD'가 앞으로 하나금융의 전략이다. H는 하나금융의 H이기도 하지만, 휴머니티(인간성)의 H이기도 하다.
[잠깐만요, 휴대폰 좀 보여주시죠]
모아둔 하나머니 183만원어치 있어요
대만 출장 때 환전 안하고 앱으로 바로 결제했죠
전산(電算)에 밝은 김정태 하나금융그룹 회장의 스마트폰 속에는 해외에서 바로 쓸 수 있는 전자화폐인 ‘하나머니’ 183만3150원어치가 들어 있었다. 이 ‘하나머니’로는 대만 주요 상점에서 환전 없이 바코드를 통해 결제할 수 있다. /김연정 객원기자 |
디지털에 익숙하다는 김정태 회장의 스마트폰이 궁금했다. "휴대폰 좀 보여달라"고 하자 그는 시간·날씨가 뜨는 초기 화면 제일 상단에 깔아놓은 '하나멤버스' 앱을 열었다.
최근 대만에 다녀온 그는 대만달러를 환전할 필요 없이 이 앱 하나로 먹고 마시고 선물 사는 게 모두 가능했다고 전했다.
하나은행, 하나카드 등을 쓰면서 차곡차곡 모아둔 '하나머니' 183만원을 현지에서 현금처럼 바로 꺼내 쓰는 전자결제 시스템 'GLN(글로벌 로열티 네트워크)' 덕분이었다.
GLN은 세계 10여국의 은행, 유통회사, 포인트사업자 등 30개 회사가 참여하는 일종의 '파이낸셜 로밍 서비스'다. 해외에서 스마트폰을 쓰기 위해 로밍하는 것처럼 전자지갑 속에 든 하나머니 한 가지로 해외 어느 곳에서든 실시간 환전해 쓸 수 있게 하자는 아이디어다.
블록체인 기술로 회원사들이 원장을 공유해 거래와 정산이 실시간으로 이뤄진다. 대만을 시작으로 조만간 태국, 일본, 베트남, 홍콩,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주요국에서 개통될 예정이다. 이 판을 짜려고 대만 타이신, 일본 스미토모, 미즈호 등 유수의 금융사들과 협업했다고 한다.
"회장 오래 한 덕분에 해외에서 인맥도 많이 쌓았습니다. 외국 CEO들하고도 술로 친해졌고요. 친화력이 경영에서 중요합디다."
김은정 기자(ejkim@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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