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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1 (금)

`DJ 인생의 조언자` 이희호 여사 향년 97세로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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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故 김대중 전 대통령 취임식 1998년 2월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광장에서 열린 제15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 내외가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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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호 여사는 '이희호' 자신보다 '김대중의 부인'으로 더 알려져 있다. 그러나 김대중 전 대통령과 만나기 전에도 이 여사는 주목받는 사회운동 지도자였다.

이 나라 여성인권운동 성장의 중심에는 이 여사가 있었다. 미국에서 유학해 유망한 사회학 연구자로서 대학 강단에 섰고, 여성문제연구회 창립을 주도했다. 대한여자기독교청년회(YWCA)연합회 총무로서 여성 기독운동도 이끌었다.

여성의 권리를 위해 최전선에서 싸웠던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과 부부의 연을 맺으면서 삶의 궤적을 바꿨다. 그는 김 전 대통령의 두 번째 부인이었다. 첫 번째 부인이었던 차용애 씨는 1959년 병사했다. 이 여사가 두 살 연하인 김 전 대통령과 결혼할 때 여성계 선배들은 미국 유학까지 다녀온 최고의 엘리트 여성운동가 이희호가 너무 아깝다며 통탄을 금치 못했다고 전해진다.

운명은 두 사람을 현대사의 지난한 '민주화' 투쟁으로 밀어 넣었다. 아내가 남편을 마냥 뒤따르는 길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일생을 '동행자' '동지'로 살았다. 이희호가 없다면 정치인 김대중도 존재할 수 없었다. 김 전 대통령 스스로도 망명 시절인 1983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강연을 하면서 "아내가 없었더라면 내가 오늘날 무엇이 되었을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오늘 내가 여러분과 함께할 수 있는 것은 내 아내 덕분이고, 나는 이희호의 남편으로서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나는 그것이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라고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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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교동 자택에서 1993년 8월 12일 이희호 여사가 김대중 전 대통령과 자택에서 담소를 나누는 모습.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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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들의 핍박을 받던 시절 이 여사는 남편의 안위가 걱정돼 기도로 밤을 새우면서도 결코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을 멈추라고 하지 않았다. 그 단호한 태도가 김 전 대통령의 양심을 더욱 단단하게 했다. 1971년 대통령선거에 신민당 후보로 나선 남편을 대신해 찬조연사로 전국을 돌 때 이희호 여사는 연단에 서서 시민들에게 말했다. "만약 남편이 대통령이 돼 독재를 하면 제가 앞장서서 타도하겠습니다." 이 여사가 김 전 대통령의 양심을 지키고 키웠다는 사실을 김 전 대통령은 아내에 관해 쓴 글에서 솔직하게 밝혔다. 그는 "한순간 흔들리던 나의 마음은 아내를 생각하며 올곧게 바로잡혔다. 아내는 결코 나의 배신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며 "아내의 사랑을 잃는다는 것은 내게는 곧 목숨을 잃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나는 아내의 사랑을 택했다"고 적었다.

이 여사가 김 전 대통령과 함께 걸은 민주화의 궤적은 핍박으로 가득했지만 그 시절 내내 그녀의 신념을 다잡게 한 것은 신앙이었다. 이 여사에게 신앙은 자유, 정의, 인권 그리고 민주주의를 찾으려는 싸움의 보이지 않는, 최후의 무기였다. 이 여사는 신군부가 조작한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으로 남편이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 판결을 받은 직후에도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들도 사랑해 주시고 축복해 주시옵소서"라며 깊은 신앙심에서 '용서'를 말했다.

이 여사의 여성운동가로서 철학은 김 전 대통령 정책에도 고스란히 반영됐다. 그녀는 "여성 권익 향상은 내 오랜 소망이었어요. 남편이 대통령으로 있는 동안 여성 지위 향상에 노력을 많이 했지요. 정부 출범 때 대통령 직속 여성특별위원회를 만들었는데 이 특별위원회를 발전시켜 여성부를 세웠어요. 남편은 양성평등 문제에서 다른 사람들을 앞서 갔어요. 내가 뭐라고 이야기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요"라고 회고했다. 김 전 대통령 임기 중인 1998년에는 가정폭력방지법이 제정됐고 1999년에는 남녀차별금지법이 시행됐다. 2001년 1월 29일 정부조직법이 바뀌고 정부 수립 이래 처음으로 여성부가 들어서 한명숙 새천년민주당 의원이 장관으로 임명됐다. 국민의 정부 이전에는 청와대에 여성 비서관이 단 한 명밖에 배출된 바 없다면 '국민의 정부' 5년 동안 그 수가 열 명으로 불었고 여성 장관도 네 명이 배출됐다.

이 여사는 2002년 5월 김 전 대통령을 대신해 유엔 아동특별총회에 한국 수석대표로 참석하기도 한다. 1990년 아동을 위한 세계정상회의에서 결의한 아동의 생존·보호·발달에 관한 세계선언과 행동계획에 대한 지난 10년의 실적을 평가하고 향후 10년의 행동 방안을 검토하는 자리였다. 여성으로서 처음 아동특별총회 기조연설을 맡은 이 여사는 "어린이가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은 곧 평화롭고 번영된 인류의 미래를 만드는 일입니다. 지금도 수많은 어린이들이 빈곤과 학대, 영양실조와 에이즈에 희생되고 있다"며 "우리의 아이들이 이러한 고통에서 벗어나 밝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우리 모두 나서자"고 촉구했다. 김 전 대통령이 임기 중 노벨평화상을 받는 등 이 여사는 지난 고행에 따른 영광을 누릴 수 있었지만 주단길이 계속해 펼쳐진 것은 아니었다. 김 전 대통령 퇴임 후에는 '아들 문제'가 불거졌다. '노무현 돌풍'이 거세게 불던 2002년 무렵 둘째아들 홍업 씨와 셋째아들 홍걸 씨의 비리 연루 의혹이 터져 나왔다. 이에 김 전 대통령은 5월 6일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고 두 아들이 물의를 일으킨 것에 대해 사과했다. 이 여사는 "신문 읽기가 힘들었어요. 국민 앞에 고개를 들기 어려웠지요. 남편은 일정이 많은데도 밤잠을 이루지 못했어요. 내가 죄인이 된 것 같아 괴로웠지요"라고 회고했다. 김홍업·홍걸 씨의 '구속' 사태로 번지며 김 전 대통령은 건강 악화로 입원하고 이 여사는 정신적 충격으로 구토까지 한다.

한편 핀란드를 방문 중인 문재인 대통령은 "오늘 이희호 여사님께서 김대중 대통령님을 만나러 가셨다"며 "여사님은 정치인 김대중 대통령의 배우자, 영부인이기 이전에 대한민국 1세대 여성운동가다. 정치인 김대중을 '행동하는 양심'으로 만들고 지켜주신 우리 시대의 대표적 신앙인, 민주주의자였다"고 고인을 애도했다. 이어 "순방을 마치고 바로 뵙겠다. 하늘나라에서 우리의 평화를 위해 두 분께서 늘 응원해 주시리라 믿는다"고 덧붙였다.

[백상경 기자 / 윤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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