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인권운동의 중심에 이희호 여사 있었다"
이희호 여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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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가 지난 2008년 9월18일 경기도 구리의 한강 둔치에 만개한 코스모스 단지를 둘러본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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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모임에서 남학생들은 서양 문물이던 맥주를 벌컥벌컥 마시는데, 동석했던 여학생들은 마냥 수줍어하며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이를 본 이 여사는 후배들에게 “고개를 똑바로 들라”고 하는 동시에, 가게 사장에게는 “여학생들이 마실 수 있는 음료수도 따로 준비해달라”고 요구했다. 당시는 1940년대 중반, 일제로부터 갓 독립했을 무렵으로 ‘남녀칠세부동석’의 교리가 아직 남아있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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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사가 본격적으로 여성운동에 나선 것은 1951년이었다. 전쟁을 피해 부산으로 피난 갔을 때, 전쟁이라는 폭력적 상황에 노출된 여성들의 비참한 현실을 보고선 ‘대한여자청년단’이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하지만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 하에 그는 전쟁에 희생된 군인과 경찰의 유가족을 돕는 일을 주로 했다.
전쟁이 소강상태를 보이던 1952년, 이 여사는 여성문제연구원을 창립한 뒤 남녀차별 문제에 본격적으로 천착하기 시작했다. 1954년부터 58년까지 미국에서 유학한 그는 1959년 귀국해선 대한YWCA연합회 총무를 맡았다. 교수의 길을 포기하고 사회 운동의 길을 택한 것이었다.
그가 제안한 첫 캠페인이 ‘혼인신고를 합시다’였다. 당시 결혼을 하고도 혼인신고를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뒤에 첩으로 들어온 여자 때문에 본처가 쫓겨나는 일도 허다했다. ‘축첩 자(첩을 둔 남자)를 국회에 보내지 말자’는 캠페인도 벌였다. ‘아내를 밟는 자 나라 밟는다’ 같은 문구를 써 거리 행진을 하기도 했다. 일부일처제가 여성의 인권 신장에 도움이 되던 때였다.
북한어린이돕기사랑의 바자회에 참석한 이희호 여사. [중앙포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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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민 기자 yoon.sung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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