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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6 (일)

[이재민의 퍼스펙티브] 미·중 견제 속 비메모리 도약…‘창의 생태계’ 구축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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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점유율 3% 그친 비메모리

4차 산업혁명 이끌 핵심 부품

소재·설계·제작 생태계 만들어야

견제 이기고 무역분쟁 방어 가능

‘완전체’ 반도체 강국의 길
중앙일보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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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은 물건, 사람은 사람이다. 국제교역도 이 이분법 틀에서 움직여 왔다. 물건을 사고팔면 상품 교역, 사람의 서비스를 사고팔면 서비스 교역이다. 이 틀이 바뀌고 있다. 둘을 합한 새로운 모델의 등장 때문이다. 물건과 사람이, 상품과 서비스가 하나로 움직인다. 상품이 서비스도 제공하고, 서비스를 샀더니 상품이 따라온다.

자율주행차를 보자. 자동차는 상품인데, 스스로 운송서비스도 제공한다. 가전제품은 어떤가. 상품인 냉장고가 주문·배달 서비스를 알선한다. 사물인터넷(IoT)이다. 계속 쫓아가면 결국 로봇으로 이어진다. 로봇은 물건인가? 사람에 가까운가? 그 중간의 무엇인가?

새로운 시대, 이렇게 상품과 서비스를 연결하는 두 개의 고리가 있다. 내용상 연결고리와 기술적 연결고리다. 전자는 개인정보. 상품·서비스를 통해 개인정보를 모아 빅데이터를 생산하고, 이를 이용해 새로운 상품·서비스를 생산·제공한다. 그리고 후자는 바로 반도체다. 이 ‘연결’을 기술적으로 구현한다. 지금 개인정보에 대한 전 세계 관심이 치솟는 만큼이나 반도체도 중요하다. 미래 사회 핵심 부품이란 말에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다.

‘성실’ 시대에서 ‘창의’ 시대로

수출산업 효자, 반도체가 새 시대의 총아라니 일단 반갑다. 그러나 4차 산업혁명 시대가 요구하는 ‘연결’ 반도체는 지금 우리가 열심히 만들어 파는 반도체와는 전혀 다르다. 지금 삼성전자·SK하이닉스가 세계 시장의 70% 가까이 차지하는 반도체는 ‘기억’ 반도체. 연결하려면 일단 기억해야 하니 여전히 중요하나 다가오는 새 시대의 핵심은 아니다. 인공지능(AI)·사물인터넷·가상현실(VR)을 가능케 하는 것은 이와는 다른 ‘연결’ 반도체다. 비메모리 또는 시스템 반도체라 불린다.

실제 세계 반도체 시장 65%는 비메모리다. 그런데 이 중요한 시장에서 우리 점유율은 고작 3%에 불과하다. 메모리 점유율 70%와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다. 바뀌는 세상에서 이 시장을 그대로 두고 반도체 강국이 될 수는 없다.

그래서 최근 우리 기업들이 비메모리 시장 진출을 밝히고, 정부도 힘을 보태겠다고 나선 것은 중요한 진전이다. 미래 시장 선도 기술 영역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겠다는 신호다. 아마 경쟁국에선 심각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메모리 강국 한국이 비메모리에도 출사표를 던졌으니 상당한 위협이다. 물밑 분석이 한창일 것이다.

메모리 반도체가 성실성을 대표한다면 비메모리는 창의성이 키워드다. 그간 우리가 메모리에서 성공한 것은 성실성, 효율성, 그리고 뛰어난 손재주 때문이다. 우리가 가장 잘하는 분야 아닌가. 반면, 비메모리는 창의성과 독창성을 요구한다. 새로운 시도와 발상의 전환이 원동력이다. 우리에겐 그렇게 친하지 않은 분야다. 그래서 더욱 험난한 경쟁이 기다린다. 인텔·퀄컴 등 비메모리 선두 주자들을 따라잡기 쉽지 않을 것이다. 이제 승부수를 던졌으니 최선을 다할 도리밖에 없다.

거세지는 경쟁국 추격과 견제

지금 계획대로면 우리는 메모리·비메모리에서 모두 주요 생산국이 된다. 경쟁국이 이를 넋 놓고 보고 있을 리 없다. 추격과 견제는 더욱 치열해질 것이다.

이미 중국은 반도체 산업 육성에 총력전으로 나서고 있다. ‘중국 제조 2025’ 정책의 핵심이기도 하다. 2010년부터 25조원 정부 기금으로 기초 체력을 배양하고, 2025년까지 170조원에 이르는 지원 계획도 최근 밝혔다. ‘한국 따라잡기’가 첫 번째 관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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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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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어떤가. 미·중 분쟁에 가려있지만, 미국의 한국 반도체 견제도 오랜 역사가 있다. 미국 입장에선 애증이 교차한다. 필요한 부품을 공급하는 파트너지만, 메모리에서 미국 기업이 따라갈 수 없는 ‘넘사벽’이 됐다. 수입 규제, 독점금지법, 특허권 등 여러 수단을 동원하였으나 격차는 점점 벌어졌다. 2012년부터는 소강상태다. 메모리는 한국이 차지이나 비메모리는 미국이 지배하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이 비메모리 진출을 선언했으니 다시 호흡을 가다듬을 가능성이 높다. 불붙은 보호무역 기조가 호시탐탐 반도체를 노린다.

특히 지금 미·중 협상을 주시해야 한다. 반도체를 끼워 넣을 가능성 때문이다. 중국 업체들이 미국 반도체를 사기로 합의하는 것이다. 코너에 몰린 중국이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에겐 큰 피해다. 미국엔 꿩 먹고 알 먹는 합의고, 한국 피해 카드로 미국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니 중국도 크게 손해 볼 일은 아니다.

‘창의’ 생태계 구현이 핵심

그러나 손바닥만 한 내수시장의 우리는 상응하는 견제 수단이 별로 없다. 기술로 다시 ‘넘사벽’이 되는 외에 대안이 없다. 지난 4월 30일 정부는 범부처 차원의 비메모리 분야 지원을 위한 청사진을 내놓았다. 2030년까지 연구·개발(R&D) 사업 1조원 투입, 세제 혜택 등 다양한 계획을 망라한다. 가장 눈에 띄는 건 반도체 소재·설계·제작 등 일련의 사이클을 포괄하는 국내 생태계 구축이다. 올바른 방향이다. 특정 기업·업종 지원이 아닌 생태계 조성이야말로 지금 가장 중요하다. 이 분야 성공의 핵심이다.

하지만 사업이 사업인 만큼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을 수 없다. 4월 30일 발표는 여러 지원 정책을 ‘백화점’식으로 나열하고 있다. 이들을 어떻게 생태계 구축으로 이어갈지, 정작 구슬을 꿰는 핵심 알맹이는 빠져 있다. 지금 해야 하는 생태계 구축은 단순히 반도체 전 공정을 우리도 한다는 것이 본질은 아니다. 지나간 ‘손재주’ 중심 접근 방식이다. 단계별로 어떻게 기업·연구자의 ‘창의성’을 살릴지가 그 핵심이다. 합리적 도전에 유인책을 주고, 이를 정부가 지원해야 한다. 단순한 ‘공정 과정’ 생태계가 아닌 ‘창의성’ 생태계 구축이 새로운 비메모리 시장에서 성공하는 길이다.

생태계 양성이 중요한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무역 분쟁 문제다. 과거를 되짚어 보자. 우리 정부의 반도체 산업 지원 조치는 여러 견제를 받았다. 주요 산업 중 보조금을 이유로 미국·유럽연합(EU)·일본으로부터 각각 조사를 받고 관세 부과 조치에 이른 건 반도체가 유일하다. 이들과 세계무역기구(WTO) 분쟁까지 치달은 것도 이 품목이 유일하다. 2000년부터 2009년까지 10년 동안의 일이다. 이 10년의 교훈이 있다. 앞으로 추진될 비메모리 지원의 초점을 반도체 산업 인프라 구축과 원천 기술 개발에 둔다면 유사한 분쟁을 피하는 방어막이 된다는 점이다. 이런 지원은 문제 삼지 말자는 광범위한 공감대가 있다. ‘상용 기술’ 개발과는 구별된다. 그러니 생태계 양성은 이 맥락에서도 올바른 방향이다.

위험 분산 문제도 있다. 비메모리 진출은 불가피하나, 상당한 위험도 따른다. 국가적으로 반도체에 더 ‘올인’한다는 결정인 까닭이다. 우리 전체 수출을 더 들었다 놨다 할 것이다. 지금처럼 특정 기업들에 의존하는 형태로는 여러 외생 변수에 휘둘릴 가능성도 그만큼 커진다. 경쟁국의 집중 견제 가능성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생태계 구축은 기술력을 가진 중소·중견기업을 양성한다. 창의성이 밑천인 강소기업도 등장할 것이다. ‘올인’의 구조적 위험을 분산하는 방법이다.

반도체 시장의 나머지 반쪽인 비메모리 진출로 이제 우리는 ‘반(半)도체’에서 ‘전(全)도체’로 가는 첫걸음을 떼었다. 이 분야는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마스터키다. 경쟁도 치열하거니와 견제도 만만찮을 것이다. 결국 기술력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이 새 시대 기술력은 이제는 더는 손재주가 아니다. 창의성이다. 여기에 모든 것이 달렸다.

이재민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리셋 코리아 통상분과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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