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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2 (화)

“저장강박, 단순히 물건 치우는 걸로 해결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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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서울 영등포구 <저장강박 매뉴얼> 발간을 도운 윤철호 베이직병원 윤철호 정신건강복지과장 /우철훈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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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저장강박’이라는 단어가 등장한 건 불과 몇 년 전이다. 이전에는 ‘쓰레기집’이라 불렸고, 물건을 쌓아둔 당사자는 ‘세상에 이런 일이’와 같은 TV 프로그램에서 특이한 사람으로 소개되곤 했다. 강박적으로 물건을 수집하는 행위를 질병 혹은 사회 문제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울 영등포구는 지난해 지방자치단체 중 최초로 <저장강박 매뉴얼>을 발간했다. 여기에는 김진 정신과 전문의와 윤철호 정신건강사회복지사(36)의 도움이 컸다. 윤 복지사는 12년 동안 병원과 지역사회에서 다양한 정신장애인을 만났다. 그는 저장강박과 관련해 “저장강박만 가지고 있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며 우울증, 조현병, 치매 등 다른 질환과 함께 봐야 한다고 말했다.

질병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도 다 달라야 한다. 문제는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에너지가 많이 든다는 점이다. 따라서 윤 복지사는 “정부 지원과 병원 치료만으로는 절대로 해결할 수 없다”며 가족이나 이웃, 지역사회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지난 5월 15일 서울 도봉구의 한 병원에서 윤 복지사를 만났다.

-저장장애, 또는 저장강박이라고 부르는데 병으로 봐야 하나.

“물건을 쌓아두고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전에도 있었다. 다만 그때는 명칭이 없어 그냥 ‘쓰레기집’ 등으로 불렀다. 저장장애, 저장강박이라는 단어는 미국의 정신장애 분류체계인 DSM의 다섯 번째 개정판에서(DSM-5) 처음 나왔다. 진단 분류가 하나 더 생겼다고 해서 이걸 바로 병이라고 여겨야 하는 건 아니다. 특히 정신과는 암처럼 진단되는 게 아니라 여러 현상을 모아서 보고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에 저장하는 행위를 병이라고 잘라서 말하기는 어렵다.”

-저장을 하는 행위 때문에 일상생활에 문제를 겪으면 저장강박, 저장장애로 부를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렇지 않다. 강박적으로 저장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보면 우울증, 조현병, 치매 등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절대다수다. 오히려 저장강박만 가지고 있는 사람을 더 찾기 어렵다. 그런 사람은 12년 동안 한 명밖에 보지 못했다. 강박적으로 저장하는 사람들의 70%가 우울증을 동반하고 있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이런 경우 저장강박이라고 부르기 곤란하다.”

-우울증, 조현병, 치매 등 다른 질환과 함께 나타나는 이유가 뭐라고 보나.

“다른 정신과 질환이 행동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조현병 증상 중 하나가 망상이다. 조현병 당사자 중에 스티로폼을 모으는 사람이 있었다. 북한에서 댐을 무너뜨리면 물바다가 될 텐데, 자신이 살려면 스티로폼이 있어야 한다는 게 이유였다. 다른 사람이 봤을 때는 이상하지만 당사자에게는 저장행위가 합리적으로 연결돼 있다. 우울증 환자들은 에너지가 없다. 가령 고물상에 팔기 위해 폐지를 계속 모았는데 사람을 만나고 거래를 할 에너지는 없는 거다. 잘못됐다는 생각은 하지만 행동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당사자들은 쌓아둔 물건을 처분하는 데 굉장히 거부감이 크다고 들었다.

“스티로폼처럼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가치가 없는 물건도 당사자는 매우 가치를 높게 보거나 미래에 반드시 쓰일 거라고 생각한다. 물건이 쌓이는 과정을 자기 히스토리로 보는 사람도 있다. 가령 소변을 페트병에 넣어서 집에 모아두는 사람이 있었다. 자신의 건강을 체크하겠다는 게 이유였다. 따라서 이런 물건들이 갑자기 사라지면 크게 불안감을 느낀다.”

-‘저소득 노년층’에서 주로 나타난다는 특징을 보면 사회학적 접근이 가능할 것 같다.

“나이가 들면 판단력이 떨어져서 그렇다고 설명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우울감 때문이라고 본다. 저소득 노년층의 우울감이 높다는 건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단순히 돈이 없어서라기보다 전반적인 삶의 질 자체가 떨어져 있다. 건강뿐 아니라 경제활동을 못하게 되면서 사회관계망도 좁아지기 때문이다. 우울감이 높아지면 세로토닌이 떨어진다. 세로토닌은 행복을 느낄 때 나오는 호르몬인데 불안을 조절해주는 역할도 한다. 따라서 세로토닌이 떨어지면 불안감이나 걱정이 잔뜩 올라간다. 이런 걱정이 물건을 모아두는 행동으로 이어지는 거다. ‘나중에 필요하면 어쩌지?’ 하는 식이다.”

-거주지를 청소해주는 방식으로는 해결이 어려울 것 같다.

“그 방식은 재발할 확률이 굉장히 높다. 엄청난 상실감을 느끼기 때문에 금세 그 자리를 다른 물건으로 채운다. 병리학적·사회복지학적 등 다양하게 접근해야 한다. 주거공간을 드라마틱하게 치워줬다고 유지되는 게 아니다. 다시 물건을 모으지 않는 게 중요하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접근해야 하나.

“다른 질환이 있다면 이를 치료하면서 저장 문제를 같이 해결해야 한다. 가령 조현병 환자는 망상 증상이 사라져야 스티로폼을 모으지 않을 수 있다. 치매 증상 중 하나는 판단능력이 떨어지는 거다. 물건이 갖는 가치에 대한 판단능력이 떨어질 때 저장하는 문제가 나타날 수 있다. 만약 이런 질환이 없고 온전히 저장의 문제라면 그에 맞게 접근하면 된다.”

-약물, 심리치료, 복지로 해결방법을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우울증 약을 먹으면 불안감이 줄어들어서 저장행동을 멈출 수도 있다. 하지만 약물만으로 저장행동이 개선된다는 연구결과도 있고 그렇지 않다는 연구결과도 있기 때문에 심리치료와 지역사회의 지원이 병행돼야 한다. 특히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당사자와 개입하는 사람의 관계다. 개입하는 사람과의 관계가 좋아지면 저장 문제도 개선된다.”

-애초 관계가 형성돼 있는 가족이나 이웃이 개입하면 더 쉽겠다.

“해결 의지가 있는 가족 구성원이 있으면 조기에 해결된다. 하지만 당사자와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해결보다는 저장 문제를 가진 사람은 그 거주지에 남고 다른 가족들이 밖으로 나가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저장행동이 문제가 된다면 가족 교육이 반드시 필요하다. 강압적으로 물건을 치우라고 해서는 안 된다. 합리적인 이유를 가지고 있고 또 믿고 있기 때문이다. 조현병이나 피해 망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식의 접근은 증상을 더 악화시킬 수 있다.”

-저장행동을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안 준다면 굳이 해결하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닐까.

“민원이 없다는 건 이웃에게 구체적인 피해가 없다는 의미이고, 가족이 병원이나 주민센터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다면 문제될 정도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물건을 모은다고 해도 일상생활이 유지된다면 누군가 개입해야 할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하지만 문제가 심각한데 방치되고 있다면 사회가 개입해야 한다. 물건이 많이 쌓이면 화재나 감염의 위험이 높고 심지어 물건에 깔려서 사람이 다치거나 사망하는 경우도 있다.”

이하늬 기자 han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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