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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7 (금)

‘아파트’와 ‘채식주의자’가 세계를 휩쓰는 지금, 유독 눈에 밟히는 연구실의 ‘성별 불평등’[전문가의 세계 - 이종필의 과학자의 발상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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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이과라서? 아니, 남자라서 죄송합니다

경향신문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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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핑크의 로제와 브루노 마스가 함께 부른 ‘아파트’가 세계적으로 화제이다. 공개 직후부터 국내외 주요 음원차트를 싹쓸이했고 영국의 싱글차트 톱100과 미국의 빌보드 차트에서도 최상위권에 오르며 K팝의 새 역사를 쓰고 있다. 이미 온라인과 SNS에서는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아파트, 아파트’를 열창하며 동영상 밈을 수없이 쏟아내고 있다. 12년 전 싸이의 ‘강남스타일’ 열풍이 다시 재현되는, 아니 그걸 뛰어넘을지도 모를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널리 알려진 대로 로제의 ‘아파트’는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술자리 게임에서 영감을 얻었다. 내가 놀라웠던 점은 우리의 일상을 곡으로 옮긴 것이 전 세계 사람들을 흥겹게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이 이제는 정말 흔하게 적용되는 시대가 열린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로제의 ‘아파트’는 K팝의 역사에서 중대한 전환점이 되지 않을까, 팬의 한 사람으로 기대를 하게 된다.

로제의 ‘아파트’ 글로벌 음원차트 접수하며 화제…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은 여전히 초현실적 느낌
노벨상 이목 과학계로 쏠리지만 올 8월 네이처 인덱스 한국 특집판은 “R&D 투자 가성비 놀랍도록 저조”…해법 중 하나로 성비 균형 제시
정부 연구 책임자 중 여성은 17%, 연구비는 남성의 40% 불과…그래도 김빛내리·백민경 등 여성 과학자들의 약진에서 희망을 본다

솔직히 말해, 길거리 리어카에서 팔던 인기가요 모음곡 테이프로 인기를 가늠하던 ‘길보드’ 시절을 보낸 나 같은 세대에겐 빌보드 차트는 완전히 딴 세상의 이야기라 아직도 로제의 빌보드 핫100 8위 기록은 전혀 실감이 나지 않는다. 한국이 선진국이라는 사실도, 세계인들이 한국을 선망의 대상으로 보고 있다는 얘기도 일부의 이른바 ‘국뽕’에 불과한 게 아닌가 의심이 들기도 일쑤였다. 내 살아생전에 절대로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사건들, 빌보드 차트 진입과 오스카상 수상 등은 이미 현실이 되었음에도 그렇다.

세상물정에 이리 어둡다 보니 한강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소식도 아직 초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두어 해 전인가, 노벨상 시즌에 한강 작가의 수상 가능성이 높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이제 수상 가능성 소문이 나기 시작했으니 앞으로 10년, 20년 뒤에는 진짜 노벨상을 받을 수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그래서인지 올해 한강의 노벨상 수상은 너무나 느닷없는 소식으로 들렸다.

부끄러운 고백부터 하자면, 소설가 한강의 작품을 처음 접한 것은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이 전해진 뒤였다. <채식주의자>를 읽어 보니 먼저 담백하고 깔끔한 문장이 인상적이었다. 물리학을 연구하는 나는 평소 전공 관련 서적이나 논문, 대중과학서를 주로 읽어 와서 이런 문장을 접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지금까지 나도 대중과학서를 10여권 썼는데(어쭙잖은 SF 장편소설도 한 편 포함해서), 내가 쓴 글들이 모두 쓰레기로 느껴졌다.

흥미롭게도 한강의 글은 그렇게 담백하고 깔끔한 문장을 써서 끔찍한 상황을 덤덤하고 무심하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파헤쳐 대수롭지 않게 툭 던져 놓는 느낌이다. 그게 오히려 매섭게 가슴을 파고들었다. 아직 펼쳐들지 못한 <소년이 온다>는 어떻게 읽어나갈지 벌써 두렵다. 눈물이 지면을 적셔 책장을 넘길 수가 없었다는 수많은 독후감이 나에게도 필연적으로 예고돼 있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남성들이 <채식주의자>를 읽고 기괴함을 느꼈다고 한다. 부산에서 20년을 살았던 ‘갱상도 싸나이’인 나도 예외는 아니다. 아마도 그 기괴함의 실체는 ‘멀쩡한 세상’ 속의 ‘극성스러운’ 주인공 영혜였을 것이다. 그러나 ‘멀쩡한 세상’ 속의 ‘무난한 일상’이라는 개념은 그 멀쩡함과 무난함을 향유하는 사람들 중심으로 정의된 개념일 뿐이다. 그 멀쩡함과 무난함이 사실은 누군가에게 폭력적으로 강요된 결과임을 한강은 고발하고 있다.

그런 폭력이 극단적인 형태로 드러난 것이 아마 제주 4·3 사건과 5·18 광주일 것이다.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이들 사건은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잊을 만하면 사건의 진실을 왜곡하고 폄훼하는 목소리가 피해자들과 유족들에게 2차적으로 가해하고 있다. 제주에서는 지금도 4·3 희생자의 신고를 받고 있다. 5·18 당시 계엄군에게 성폭행당한 피해자들이 직접 입을 열기 시작한 것은 매우 최근의 일이다. 발포책임자를 포함한 사건의 진상은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오랜 세월 4·3과 5·18은 입 밖으로 꺼내기조차 어려웠다. 4·3 사건은 70년도 더 지났으나 지금까지도 그 트라우마 때문에 피해를 숨기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우리들도 잘 몰랐던 80년 광주의 진상을 세상에 널리 알리기 위해 한 외신기자는 자신의 목숨까지 걸었다. 30여년 전 대학 시절엔 그렇게 남겨진 기록을 사람들이 몰래 돌려보았다. 정권이 바뀌고 세기가 바뀌니 5·18의 이야기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이제는 한강 덕분에 4·3의 제주와 80년 광주가 우리의 지방 이야기가 아니라 전 세계인의 이야기가 되었다. 우리 이렇게 모진 세월을 살아왔노라고, 더 이상 세상 사람들에게 그 한스러운 이야기 좀 들어달라고 매달리지 않아도 된다. 그 힘든 시절을 어떻게든 버티고 살아낸 어르신들의 삶이 한강을 통해 제대로 평가되고 조금이나마 보상을 받게 되었다.

이런 까닭에 나는 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상이 두 배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아픈 현대사가 문학의 힘으로 이제 세상 모든 사람들이 후대에도 계속 읽고 알게 되는 세계의 역사가 되었다.

24년 전 김대중 전 대통령의 노벨 평화상에 이어 이제 한강 작가가 노벨 문학상도 수상하게 되니 사람들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노벨 과학상으로 쏠릴 수밖에 없다. 과학계 종사자로서 이제는 주위 사람들에게 “이과라서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자주 하고 다닌다. 과학 활동이라는 게 무슨 상을 받자고 하는 일이 아님에도 “너네는 아직…?”이라는 시선이 많이 느껴진다.

몇해 전까지만 해도 시월이면 과학계의 누구누구가 노벨상을 수상할 가능성이 있다는 언론보도가 나오곤 했었다. 요즘은 그런 보도조차 찾기 어렵다. 상이야 안 받아도 그만이지만, 올해 8월 ‘네이처 인덱스’가 지적한 한국 과학계의 현실은 뼈아프다. 네이처 인덱스는 네이처지가 자연과학분야의 80여 학술지 논문을 토대로 국가별 기관별 등의 기여도를 분석한 지표이다. ‘네이처 인덱스’는 1993년과 2020년에 이어 세 번째로 올해 8월 한국 특집호를 발간했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이던 2020년 특집호에서는 한국이 어떻게 방역 모범국이 되었는지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이번 특집호에서는 한국의 연구·개발에 대한 투자 가성비가 “놀랍도록 저조하다(surprisingly low)”고 평가했다.

작년 윤석열 대통령이 갑작스럽게 연구·개발 예산을 줄이기 직전인 2022년 기준으로 한국의 연구·개발 예산은 GDP 대비 5.2%로 이스라엘에 이어 세계 2위였다. 그러나 2023년 기준 국가순위는 8위(2023년 8월~2024년 7월은 7위)이며 인구 100만명당 연구자 기여도(28.6)는 순위가 더 낮다. GDP당 연구·개발 1위(5.6%)인 이스라엘은 이 지표가 59.4, 미국은 49.7, 독일은 47.6이다. 스위스는 연구·개발 비율이 3.4%로 높으면서도 인구당 연구자 기여도가 무려 144.5에 이른다. 그나마 한국의 전체 국가순위는 7~8위권에서 비교적 안정적인 편이다.

놀랍게도 2023년 기준 국가순위 1위는 처음으로 중국이 차지했다. 만년 1위 미국은 2위로 밀려났다. 연구기관별 순위는 더욱 놀랍다. 2023년 8월부터 2024년 7월까지 연구기관 10위 중에 중국 소속이 무려 8개이다. 나머지 둘은 미국의 하버드 대학(2위)과 독일의 막스플랑크연구소(7위)이다.

한국 대학들은 어떨까? 같은 기간 서울대학교가 54위, 카이스트가 83위로 100위권 안에 딱 둘이다. 연세대학교(124위), 성균관대학교(140위), 포항공대(178위)가 뒤를 잇고 있다. 전체 국가순위는 그렇다 치더라도, 국가대표급은 다른 여느 분야와 마찬가지로 대략 세계 10위권 안에 들기를 기대하기 마련이다. 특히 서울대학교는 오랜 세월 한국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들을 데려갔고 가장 많은 국가자원을 지원받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 그렇다.

‘네이처 인덱스’는 한국의 이런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여러 가지 면에서 조언했다. 학계와 산업계 사이의 연계 강화, 국제 연구협력 증진, 글로벌 인재유치, 그리고 연구자 성비 균형 등을 제안했다. 마침 <채식주의자>를 읽고 보니, 연구자 성비 불균형이 유독 눈에 들어온다. 서울대학교의 노정혜 교수가 ‘네이처 인덱스’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정부 연구과제를 수행하는 연구책임자 중 여성은 17.7%에 불과하며 평균 연구비 또한 남성 연구책임자의 평균 액수의 40.6%밖에 되지 않는다. 서울대의 경우 학부생의 36%, 대학원생의 49%가 여성이지만 정규직 교수의 19.7%만이 여성이다. ‘네이처 인덱스’가 한국 연구현장에서의 성비불균형을 비중 있게 콕 집어서 지적한 것은 무겁게 받아들일 만하다. 물론 ‘네이처 인덱스’가 과학기술의 모든 면을 보여주는 지표는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노벨 과학상과 관련해서 위안으로 삼을 여지도 있다. 올해 노벨 생리의학상은 마이크로 RNA 관련 연구자에게 수여되었는데, 서울대학교의 김빛내리 교수는 이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로서 마이크로 RNA의 생성과 작동과정을 규명한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올해 노벨 화학상 수상자 중 한 명인 데이비드 베이커 교수와 함께 ‘로제타폴드’라는 단백질 구조 예측 및 설계 AI를 개발한 사람은 서울대학교의 백민경 교수(당시 박사후연구원)이다. 노벨 과학상은 과학발전의 흐름을 바꾼 연구 성과의 ‘원조(originality)’에게 수여된다. 지금 우리의 과학자들도 한 걸음씩 그 원조에 점점 더 다가가고 있음은 사실이다.

글을 마무리하려고 보니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여기서 소개한 로제와 한강, 백민경, 김빛내리 모두 여성들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성별에 따라 불평등한 연구현장의 현실도 계속 마음에 남는다. 그런 까닭에 이과라서 죄송하다고 말하기 전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 <채식주의자>의 독후감으로 더 어울릴 것 같다.

“남자라서 죄송합니다.”



경향신문

▲이종필 교수

1971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1990년 서울대 물리학과에 입학했으며 2001년 입자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연세대·고등과학원 등에서 연구원으로, 고려대에서 연구교수로 재직했다. 2016년부터 건국대 상허교양대학에서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신의 입자를 찾아서> <대통령을 위한 과학 에세이> <물리학 클래식> <이종필 교수의 인터스텔라> <빛의 속도로 이해하는 상대성이론> 등이 있고, <최종이론의 꿈> <블랙홀 전쟁> <물리의 정석> <스티븐 호킹의 블랙홀> 등을 우리글로 옮겼다.


이종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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