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80년 5월 광주 송암동 서로 오인사격 후 보복 학살
김복동씨 5월22일 송암공단 앞 시내버스 전복 사건 목격
시민군 이강갑·최진수씨 “동료 1명 즉결사살…행방 묘연”
류시열 “군인들 하숙집 학생들 끌고와 사살했다고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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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초만 늦었어도 죽었을 것이여.”
1980년 5·18 당시 시민군이었던 이강갑(62)씨는 지난 9일 광주시 남구 진월동 효덕초등학교 인근에서 만나 39년 전 급박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시민학생수습위원회 위원이었던 그는 5월24일 시민군의 거점이었던 전남도청을 출발해 트럭을 타고 송암동 부근 효천역 방면으로 향했다. 광주에서 목포 쪽으로 가는 길목인 효천역 인근은 계엄군의 집단발포(5월21일) 이후 무장한 시민군과 계엄군의 총격전이 잦았던 곳이었다. 이씨는 “효덕동 부근에서 총소리가 난다고 해서 상황을 파악하러 나갔다”고 했다.
이날 오후 1시30분 군인들의 장갑차가 나타나 기관총 캘리버 50으로 사격을 시작했다. 주남마을에서 비행장으로 가던 11공수여단 병력이었다. 이씨는 잽싸게 인근 민간 재래식 화장실 안으로 숨어들었다. 뒤따라오던 11공수여단 부대가 주변에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효덕초등학교 뒤 놀이터에서 놀던 전재수(11)군과 원제마을 배수지에서 놀던 방광범(12)군 등이 사살당했다. 이 와중에 군 병력 사이에 오인전투가 벌어졌다. 11공수여단 63대대는 오후 1시55분께 송암동(송하·임암·행암동의 행정동 명칭) 효천역 500m 전방에 다다랐을 때 ‘공격’을 받았다. 전투병과교육사령부(전교사) 보병학교 교도대 병력이 11공수여단 병력을 시위대로 오인해 장갑차와 트럭에 90㎜ 무반동총 4발을 명중시킨 뒤 집중사격을 했다. 11공수여단도 즉각 응사했다. 이른바 군부대 간 오인교전으로 제63대대 병력 9명이 죽고 33명이 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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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공수여단 부대원들은 시위대를 찾는다며 집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집 안에 있다가 아무런 이유 없이 끌려 나와 즉결처분을 당한 송암동 주민도 다수였다. 김승후(18·공원), 권근립(24), 임병철(24·운전사)씨는 한꺼번에 떼죽음을 당했다. 이들은 검찰 기록에도 5월24일 오후 3시30분께 송암동 자신의 집 앞 노상에서 엠16 총상을 입고 사망했다고 적혀 있다. 박연옥(49)씨도 당시 광주에서 자취 생활을 하는 중학교 1학년 아들을 찾아 나섰다가 이날 숨졌다. 박씨는 계엄군의 총소리에 놀라 인근 하수구로 피신했으나 공수부대 군인들의 조준사격을 받고 결국 목숨을 잃었다.
40여분 동안 화장실 안에서 숨죽이고 있던 이강갑씨는 들고 있던 총을 밖에다 던지고 투항했다. 이씨의 등엔 총기소지자·폭도라고 선명하게 적혔다. 이씨는 “얼마나 두들겨 맞았던지 정신을 잃은 채 헬기로 수송됐다가 통합병원에서 사흘 만에 깨어났다”고 말했다. 함께 트럭에 탔던 시민군 최진수(57·서울)씨 등 4명도 길 건너편 민가로 피신했다. 공수부대원들의 집중사격을 받고 총을 천장에 숨기고 밖으로 나갔다. 최씨는 2006년 9월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면담에서 “(군인들이) 첫번째로 나간 사람의 관자놀이를 총으로 쏴 죽였다”고 말했다.
두번째로 나간 최씨의 관자놀이에도 총구를 겨눴다. 그때 대위 계급장을 단 장교가 “집 안에서 죽이면 시끄러우니 길로 끌고 나가라”고 명령해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당시 11공수여단은 주검을 그대로 방치하고 철수했다. 그래서 인근 마을 사람들이 그 주검을 가매장했다. 최씨는 그해 7월1일 담당 수사관과 현장검증을 나갔다가 주민들로부터 5월31일 공수부대원들이 주검을 수습해 갔다는 말만 들었다. 최씨는 “그 후 (첫번째로 나가 사살된) 그 사람의 행방을 알 수가 없다”고 했다.
송암동 일대 민간인 학살 사건(이른바 분뇨통 사건)은 아직까지 조사가 제대로 이뤄진 적이 없다. 송암공단 안 연탄공장 관리부장으로 근무했던 류시열(76)씨는 지난 3일 송암동 오케이자동차학원 옆 공터를 가리키며 민간인 학살 사건의 기억을 떠올렸다. “여기가 하숙집이었어. 일본 분(남자)이 하숙집을 했는데 5·18 때 군인들이 집집을 드나들며 수색을 했어. 그런데 하숙하던 학생들이 군인과 눈이 마주쳐서 몇명이 죽었다고 들었지….” 류씨가 지목한 하숙집은 도로 확장 공사로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하숙집 여주인과 제 아내가 계 모임 회원이어서 그 말을 들었다”고 말했다.
또 하나 규명해야 할 암매장 의혹은 송암동 분뇨통에 쌓아뒀던 주검들의 행방이다. 광주시가 관할하는 분뇨통은 가로·세로·깊이가 각 5m, 10m, 4~5m 정도 됐다. 류씨는 “군인들이 광주-목포 간 도로를 향해 조준사격을 한 뒤 사람들이 죽으면 똥땅코(분뇨탱크)에 쟁인다(쌓는다)고 했고 거그다 넣어분다고도 했어. 그리고 데리고 간 것은 봤제”라고 말했다. 류씨의 증언은 송암동에서 식당을 했던 김복동(당시 59)씨의 증언과도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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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암공단 앞 도로 시내버스 전복 사건으로 9명이 사망한 사건의 진위도 밝혀져야 한다. 김복동씨는 1995년 12월 검찰 조사에서 “5월22일 오전 7시께 벌통이 걱정돼 나갔더니 도로에 시내버스 한 대가 전복돼 있었다”고 진술했다. 운전사 1명이 운전대를 잡은 상태로 죽어 있었고, 3명이 차 안에 사망한 채 널브러져 있었다. 논둑과 논바닥 등에 5명의 주검이 보였다. 이 사건은 5월22일 새벽 5시께 승용차를 타고 귀가하던 황남열(43·교육공무원)씨 등 4명이 탄 승용차가 총격을 받아 운전자 1명이 숨졌던 사건과는 다르다. 김씨는 “낮 12시께 군인들이 벌통에서 30미터 정도 떨어진 시 관할 분뇨통 옆에 시신 9구를 눕혀 놓고 풀을 덮어 놓았다. 군인들이 9구의 시체를 실어다가 매장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고 진술했다.
글·사진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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