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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6 (일)

<5> 불한당들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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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소설 제1부 이야기의 서막 ⑤

이우학교 미술교사이기도 한 노길상 작가의 픽션 <불한당들의 시대>를 연재합니다. <불한당들의 시대>는 7세기 경의 한반도 역사를 극화(劇畫:그림이야기) 형식의 판타지 소설로 창작한 것입니다. 부석사의 연기 설화를 바탕으로 의상과 선묘, 그리고 두 사람과 관계된 실존 또는 가상의 인물들 사이에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편집자)

<불한당들의 시대> 1편부터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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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백정(白淨)과 비형(鼻荊)

사도태후는 특별히 새주(璽主)라는 자리를 만들어 미실을 앉혔다. 새주는 왕의 옥새를 출납하는 권한을 가졌고, 왕명은 왕과 무관하게 미실을 거쳐 공표되고 실행되었다. 허나, 정작 옥새의 출납은 미실이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새주는 허울일 뿐, 옥새를 실제로 보관하고 운용하는 것은 사도태후였다. 태후는 자신의 권력을 미실에게 하나씩 이양하는 모양새를 취하긴 하였으나, 정작 옥새는 사도태후의 품을 한시도 벗어나지 않았고 미실에게도 소장처를 밝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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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후는 목적한 바에 대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았고, 과단성은 성난 짐승과 같았다. 태후의 면모는 진지왕이 제거되는 과정에서 여지없이 드러났고, 국인(國人)들은 그런 태후를 두려워했다. 상대등 거칠부에서 노리부로 이어졌던 섭정은 태후의 뜻에 따라 순조로웠으나 태후는 사내들을 믿지 않았다. 사내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지조나 신의를 조변석개(朝變夕改)하는 잔망(殘亡)한 것들이었고, 그런 사내들은 항상 잔악한 모사(謀事)와 피바람을 일으켰다. 태후는 사내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렇다고 여인이 왕이 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세상에 없는 법도였다. 다만 자신과 미실이 막후에서 왕들을 조종한다면 세상의 일은 순탄할 것이었다. 그래서 백정(白淨)이었다. 백정은 요절한 동륜(銅輪) 태자의 큰아들이었다. 동륜태자는 오래전 아버지 진흥왕의 첩 보명공주를 겁탈하려 담을 넘다 개에 물려 죽었다. 그 사고로 동생 사륜(舍輪)이 왕이 되었는데, 그가 진지왕이었다는 것은 앞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다.

백정은 몸집이 유난히 장대하였고 얼굴은 기이했다. 왕족들은 그를 이물(異物)이라 부르며 조롱했다. 태자 동륜의 어이없는 죽음에 따른 왕가의 불안과 불만은 모두 백정을 향했다. 어머니 만호부인은 아들을 보호할 힘이 없었다. 백정은 고립무원의 환경에서 성장하였고, 그나마 황실 서고(書庫)는 유일한 친구이자 놀이터였다. 백정은 홀로 고적(古蹟)을 탐독하며 낮을 보냈고, 깊은 사색과 고민으로 밤을 새웠다.

사도태후가 백정을 찾은 때는 그가 열세 살이 되던 해였다. 사도는 그때 처음으로 한 사내의 존재를 진심으로 기뻐했다. 백정은 서둘러 왕이 되었다.

백정은 어린 아이임에도 의지가 침중하고 식견이 명철했다. 그런 손자를 할머니 사도태후는 흡족해했다. 백정으로 인해 대원신궁의 앞길은 탄탄대로임이 분명했다. 미실 또한 음사(陰事)의 기술로 육체의 열락에 이르는 법을 가르쳤다. 열세 살의 다른 아이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백정은 세상의 이치와 몸의 감각과 감정의 원리를 체득해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침중한 성격 탓에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으며 명철한 식견 탓에 사유의 깊이는 끝없이 여물기만 했다.

이미 팔척장신의 기골만큼이나 백정의 내실(內實)은 거대해지고 있었으니, 태후와 새주는 그런 어린 왕의 사정에 대해서는 짐작도 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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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백정이 왕이 된 지 십 수 년이 흘렀다. 십 대 소년에서 이십 대의 청년으로 성장한 백정은 그 키가 팔 척을 훌쩍 넘겼다.

반면, 사도태후의 건강은 급속도로 악화되고 있었다. 사도는 정확하게 때를 파악하고 신속하게 실행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즉시, 섭정을 미실에게 맡기고 영흥사(永興寺)로 거처를 옮겼다. 그제서야 태후는 거울에 비친 한 늙은 여인을 발견했다. 보잘 것 없었다. 때늦은 발견이었다. 태후는 자책하거나 낙담했다. 태후의 심사는 종잡을 수 없게 되었고, 거처의 모든 거울을 없애고 궁인(宮人)들의 지참도 금지하기에 이르렀다.

태후의 세도는 여전히 중천의 해와 같았으나 태후의 거실은 언제나 어두웠다. 영흥사 주변은 시위삼도(侍衛三徒:왕실직속경호부대)의 경호가 엄중했고, 오직 미실만이 문을 열 수 있었다.

'왕이 매일 새벽부터 석존(釋尊)께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미실은 다소곳이 앉아 어둠 속의 태후를 향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기특하구나."

사도태후가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음이 분명했다.

"장대한 기골과는 어울리지 않게 마음은 언제나 아이처럼 해맑습니다. 자신이 기도를 열심히 한다면 석존께서 태후마마의 건강을 되찾게 해주실 거라며..."

태후는 미실의 말을 끊었다.

"이것이 건강의 문제이더냐? 성쇠의 문제이니라. 달이 차면 기울 듯, 여름이 성하면 곧 가을이 오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말씀이 쓸쓸하옵니다.'

미실은 옷고름을 접어 눈가를 훔쳤다.

'그래도 백정이 효자구나. 할미를 걱정하는 마음이 갸륵하다.'

태후의 칭찬에 미실도 고개를 끄덕였다.

"백정이 혼인할 나이가 지났거늘, 너는 아직도 때가 아니라고 여기느냐?"

"송구하옵니다. 겉으로 거한(巨漢)의 무르익은 몸이긴 하나, 아직 심정이 여리고 유치하여 보살핌이 필요합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가당할 것이라 여겨진다만. 비(妃)를 들여도 너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고, 너의 후계를 준비해야 할 시점이기도 하다."

미실은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표정을 숨기기 위해, 자신의 속사정을 들키지 않기 위한 방어적 행동이었다. 태후는 어둠 속에서 그런 미실을 낱낱이 관찰하고 있었을까? 태후는 묵묵히 듣고 있는 미실에게 이와 같이 타일렀다.

"나는 이제 늙어 하루하루가 불안하기만 하다. 불안하면 조급할 것이고, 그래서 너를 닦달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네가 적절한 때를 잘 선택하리라 믿는다. 오늘은 옥새로 왕명을 출납할 일이 없으니, 이제 그만 물러가도 좋으니라."

태후의 긴 한숨을 뒤로하고 미실은 직접 문을 닫았다. 그제야 고개를 든 미실의 얼굴은 홍조를 띠고 있었다. 매사 신중하고 거침없는 미실의 얼굴이 왜 붉어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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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이 왕이 되자 미실이 직접 음사(陰事:성교의 기술)를 행했다. 기골장대 한 외양과는 다르게 태어나면서부터 고립되어 외로운 성장기를 보낸 백정은 따뜻한 정에 목말라했고, 그 때문인지 매우 섬세한 감정의 소유자였다. 삼십 대 여인의 농염한 체취와 유난히 희고 부드러운 피부의 촉감은 백정을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새롭고 황홀한 경지로 인도했다. 또래의 사내들이 겨우 몽정(夢精)에 눈뜰 때, 백정은 음사의 최고 권위자인 미실을 통해 열락(悅樂)에 이르는 파정을 맛보았던 것이었다.

미실은 음사를 통해 백정의 생각과 감정을 낱낱이 확인하려 했다. 미실의 혀와 손끝의 오묘한 놀림에 백정은 매번 농락되기 일 수였고, 그것은 십 대의 사내아이가 일찍이 상상치도 못했던 황홀경이었다. 백정은 열락에 휩싸여 그의 내밀한 감정까지 모두 드러낼 수밖에 없는 지경에까지 다다랐다. 미실은 백정을 완전히 지배하지 않으면 자신의 지위뿐만 아니라 대원신통의 안위마저 위태로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실의 음사는 결사적이었다.

어린 왕은 미실을 여인처럼 때로는 친어머니처럼 따랐다. 거대한 몸집과 기괴한 얼굴과는 다르게 백정의 마음은 어리고 여렸다. 외면당하고 고립된 성장 과정에서 억눌렸던 감정의 골은 미실의 풍만한 육신의 골에서 해방을 만끽했다. 어린 왕은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따스한 체온을 미실의 품에서 마음껏 누렸고, 때로는 엄마처럼 때로는 연인처럼 그 사이를 오가며 미실은 적절하게 백정을 농락했다. 때로는 냉정도 필요했다. 차갑거나 따뜻함을 오가며 상대의 애를 말리는 것, 그것은 음사의 법칙이었다. 미실에게 모든 것을 가르쳤던 할머니 옥진궁주는 음사의 대상에 대해 과도한 감정의 이입을 경계하라했다. 즉, 상대방을 진실로 사랑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었다. 미실에게서 사랑의 감정은 음사에서 제일 중요한 시중(時中)의 때를 놓치게 만드는 절대적 방해 요소였다.

그러나, 백정이 성장하며 미실이 미처 고려하지 못한 변수가 생겼다. 그것은 일찍이 선대(先代) 지증왕이 가졌다던 한 자(尺) 다섯 치(寸)의 양물(陽物:남자의 생식기)을 백정이 물려받은 것이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둘의 관계는 서서히 반전되기에 이르렀다. 백정의 그것은 크기와 길이 더군다나 단단한 근육으로 구성된 것이어서, 그 모양은 마치 문설주와 같았다. 미실의 몸이 반응하는 데에 따라 왕의 양물은 절묘하게 운동했다. 할머니 옥진과 이모 사도태후가 누누이 강조하던, 음사의 절대적이며 최고의 경지인 시중의 원리가 백정의 양물에 이르러 온전히 구현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매일 밤, 미실은 전인미답의 황홀경에 다다랐다. 그 경지는 석존(釋尊)의 장광설(長廣舌)로도 미처 그려지지 못했고, 경경위사(經經緯史)에 일가를 이룬 경전과 역사의 박사들조차 가늠하지 못하던 신세계였다. 그 세계에 다다르는 문은 육체의 열락으로서만 가능하였고, 오직 백정의 거대한 양물로서만 주유(周遊)할 수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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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실이 매일 밤 육신의 절정을 만끽하며 나뒹굴 때, 서라벌에는 이상한 소문이 나돌았다. 바로 비형랑에 대한 소식이었다. 소문은 십 수 년 전의 일을 마치 어제의 일처럼 기억하고 있던 노인들의 입을 타고 빠르게 퍼졌다. 노인들은 항상 이와 같은 수식(修飾)으로 말을 시작했다.'까마득하게 오래된 일인데도 아직 기억에 생생하군. 젊은 놈들은 세상 구경도 못 할 때의 일이었지. 어머니의 눈 밖에 난 아들이 왕좌에서 쫓겨나 결국 죽임을 당했어. 귀신이 된 왕, 즉 왕귀(王鬼)는 구천을 떠돌다 이승의 정인(情人)을 다시 찾아왔지. 둘은 이레의 낮과 밤 동안 사랑을 나누었는데,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어. 맙소사! 이승의 정인이 왕귀의 아들을 임신해버렸다네! 세상 사람들 그 어느 누구도 믿지 않았어. 여인의 부모조차도 말이야. 그런데 점점 여인의 배가 불러오더니 급기야 아기가 태어났네! 난리가 났지. 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며 사량부에 있었던 그녀의 집으로 몰려들었어. 당연히 왕실에서도 그 사실을 알게 되었고 말이야. 그런데, 눈보라가 무섭게 몰아치던 날 밤, 산모가 갓난이를 안고 홀연히 사라져 버린 거야. 사람들은 왕귀가 데리고 갔다는 둥, 산모가 정신이 이상하여 동반자살을 하였다는 둥, 오만가지 낭설이 떠돌았지. 태후가 몰래 자객을 보내 죽여서 불태웠다는 소문도 있었지. 그랬던 그 아들이 이제 건아(健兒:건강하고 씩씩한 사나이)가 되어 돌아온다는구먼? 그 아이의 엄마 이름이 뭐였더라? 그래, 도화녀였어. 몸에서 복숭아 냄새가 난다고 했던....'

끼어들기를 벼르던 다른 노인이 말을 이었다.

'까마득하게 오래된 일인데 나도 기억에 생생하군. 요즘 젊은것들은 세상 구경도 못 할 때의 일인데도 말이야. 그 왕귀의 아들이 비형랑이라는군. 얼마 전 첩첩산골에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들어 사람들을 모았다던 그치 말이야.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 여겼더니 왕귀의 아들이었던 게야. 역시 왕의 종자는 틀려, 암 틀리고말고.'

소문은 삽시간에 서라벌 전역으로 퍼졌다. 왕위를 다시 돌려받을 것이라는 반역의 기운까지 감지될 정도였다. 그런데도, 매일 밤 백정과의 음사에 여념이 없던 미실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고, 오직 미실과 말을 썩었던 사도태후 또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백정은 지밀(至密:왕의 거처)에 속한 내관과 사인들을 은밀하게 불렀다. 그리고 소문의 진상을 파악할 것과 비형랑을 입궐시킬 것을 명했다. 처음으로 왕의 하명을 받은 내관과 사인들이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왕의 표정과 어투에선 거부할 수 없는 위엄이 서려 있었다.

며칠 후, 비형랑이라 알려진 인물이 왕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크지 않은 몸집이었지만 두 눈에선 서기(瑞氣)로운 빛이 형형했다. 비형랑은 왕의 거대한 몸집에 일견 주눅 들었으나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다. 특이한 것은 비형랑의 코였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가짜 코가 덩그러니 달려 있었다. 왕은 피식 웃었다.

'코가 석 자(尺)라는 말만 들어보았지, 정녕 네 코가 석 자구나. 연유가 있는 것이냐?'

"오래전 동상에 썩은 것을 도려내고 가짜 코를 달았사옵니다."

'그랬더냐? 너의 사연은 들었느니라. 비형랑이라고 한다지?'

'그렇나이다. 사람들이 소인의 코를 놀리며 붙인 이름입니다.'

왕은 다시 웃으며 비형랑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코만큼이나 유난히 큰 화살집이 눈에 띄었다.

'듣자 하니 활의 명수라지? 보여줄 수 있겠느냐?'

비형랑은 애써 호기롭게 대답했다. 내관들은 대궁(大宮:왕의 침전) 앞뜰에 과녁을 설치했다. 구름이 달을 가려 사위(四圍)는 어두웠다. 백보의 거리를 두고 비형랑은 활시위를 겨누었다. 시위를 떠난 화살의 소리가 날카로웠다. 다섯 발 모두 과녁의 중심을 꿰뚫었다. 왕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내관들에게 하명했다.

'이제 비형랑은 짐과 함께 월성에서 살 것이다. 대궁 옆에 거처를 마련해 주려무나.'

내관들은 새주(璽主)마마의 윤허가 있어야 한다며 머뭇거렸으나, 왕이 거대한 손을 뻗어 무작스럽게 내관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내관의 발이 허공에서 발버둥 쳤다. 비형랑에게 집사(執事) 벼슬이 내려졌다.

이로부터 수십 년 후, 왕이 된 아들이 아버지 비형랑을 문흥대왕(文興大王)이라는 시호(諡號)로 추존(追尊)하게 되리라곤 그 때는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도화녀의 등 뒤에서 울리던 양중이의 말이 허튼소리만은 아니었던 것이었다.

그 날 이후로 월성(月城)의 밤은 소란스러웠다. 비형랑의 코골이 소리가 대궁의 담을 넘어 월성 전체에 울렸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비형랑의 코골이 소리가 축시(丑時)에 시작되어 인시(寅時)에 그쳤기 때문에 불침번을 서는 사인들과 나인들 외에는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사인들이 지밀내관들에게 코골이의 연유를 물었으나, 어느 누구도 감히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왕이 그들을 숨죽이게 했던 것이다.

왕은 미실이 모르는 자신만의 영역을 서서히 조금씩 만들기 시작했다.

또 그날 이후로 월성(月城)의 밤에 소리 없이 나타나는 검은 그림자들이 있었으니, 이들은 즐비하게 늘어선 전각의 지붕을 타고 비형랑의 처소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마치 발 없는 귀신처럼 허공을 날아다녔고, 치미 사이를 미끄러지듯 오갔다. 매일 밤 비형랑의 코골이 소리를 쫓아 어김없이 나타났으며, 비형랑도 이들과 어울려 숲이 우거진 곳으로 사라졌다. 그리곤, 묘시(卯時)를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비형랑 혼자 숙소로 돌아왔다. 사인들은 왕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왕은 낱낱이 캐물었다.

"네놈들은 보고만 있었단 말이냐?"

"몸이 하도 날래어 도무지 따라잡을 수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종마루를 타고 날듯이 뛰어다니니 잡을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요."

"발 빠른 병사들로 미행해 보지 않았더냐?"

사인들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당연히 그래 보았습지요. 그렇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었습니다요. 그 놈들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요. 귀신입니다요, 귀신!"

다른 사인이 말을 거들었다.

"여우가 둔답 한 것일지도 모릅니다요. 개중엔 여우도 있었습니다요, 제가 분명히 두 눈으로 확인했습니다요."

"귀신에다 여우? 네놈들이 제정신인 게야? 그렇다면, 어떻게 생긴 놈들인지는 알아보았고?"

사인들이 머리를 긁적이며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워낙 날랜 데다 야밤중에만 나타나는지라... 그림자만 겨우 쫓아다닐 지경이었습니다요."

왕은 사인들을 물리고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비형랑을 불러들이라는 명이 내려졌다. 잠시 후, 비형랑이 대전으로 들어왔다. 큰 코가 걸음걸이에 맞춰 흔들렸다. 왕은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문은 에두르지 않았다.

"네가 밤마다 귀신들을 거느리고 논다는 말이 있다."

비형랑이 주춤하였으나 왕은 질문을 이어갔다.

"귀신들이 용케도 네가 있는 곳을 탐지하여 밤마다 나타난다는데, 네가 진정 왕귀의 아들..."

비형랑은 왕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귀신이 아닙니다. 산중에서 저와 함께 살았던 두두리들이옵고, 소인의 코골이 소리를 듣고 찾아오는 것입니다."

왕은 큰소리로 웃었다. 거대한 몸통에서 공명된 소리가 대궁 내부를 쩌렁쩌렁 울렸다.

"크하하하! 두두리? 호오~ 그것 참 흥미롭구나. 그들을 짐에게 데려올 수 있겠느냐?"

비형랑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세상에 드러나기를 원치 않는 자들이라 탐탁지 않아 할 것이옵니다. 어명이라도 소용없습니다."

"짐의 명이어도 소용이... 없다?'

비형랑의 대답에 순간적으로 발끈했던 왕은 말을 끌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짧은 침묵이 흘렀으나, 왕이 다시 입을 뗐다.

"그러면 이렇게 하자. 짐이 너의 뒤를 쫓을 것인즉... 오늘 밤이다."

비형랑은 마땅한 답도 없이 뒷걸음치며 물러났다. 왕은 그냥 씨익 웃기만 하였다.

밤이 되었다.

음사(陰事)를 마친 미실은 숨이 가빴다.

"이제 비(妃)를 들일 때가 되었나 봅니다.'

미실이 돌아앉은 진평의 등에 손을 짚고 말했다. 몸의 열기에 손이 데일 것만 같았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요? 제가 혹여 새주마마의 심기를 불편케 하여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옵니까?"

미실은 눈가의 잔주름을 일으키며 웃었다.

"그럴 리가요. 왕께서는 변함이 없으십니다. 언제나 한결같으세요. 저를 향한 따뜻한 마음이 느껴집니다. 음사로 알 수 있는 진심이라는 것은 속일 수가 없는 것이거든요. 호호호."

웃는가 싶더니 미실은 이내 깊은 한숨을 쉬었다.

"저의 몸이 점점 늙어간다는 것이 문제이겠지요. 왕의 옥체는 나날이 창성하는데 저의 몸은 쇠잔 일로이니... 얼마 전 태후께서도 같은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미실은 피곤한 몸을 일으켜 손을 뻗었다. 시립하고 있던 나인들이 옷을 입혔다.

"이제 그만 퇴청하겠습니다. 내관들의 말을 듣자 하니 왕께서 밤늦도록 서책을 탐하신다고 하던데, 너무 애면글면하지 마십시오. 옥체를 보중(保重)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태후마마에 대한 효(孝)입니다. 유념하세요."

왕은 머리를 깊이 숙였다. 지극히 정성스럽고 공손한 왕의 태도에 미실은 만면의 미소를 머금으며 대궁을 나섰다. 나인과 사인들이 총총걸음으로 그 뒤를 따랐다. 새주를 둘러싼 무리들이 사라진 후 한동안 백정은 서책을 뒤적였다. 사경(四更:새벽 1시부터 3시 사이)이 되자 코골이 소리가 들려왔다. 백정은 돋보기를 벗고 내관을 불렀다. 내관들은 미리 준비하고 있던 검은 옷을 왕에게 입혔다. 그것은 밤 그늘에서 왕을 숨겨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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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사방에서 날카로운 바람소리가 일어나더니 두두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마치 발 없는 귀신이 허공에 미끄러지듯 쏜살 같이 움직였다. 귀신이라 착각 할만 했다. 비형랑의 코골이 소리가 이정표인 것은 분명했다. 도처에서 나타난 그림자들은 비형랑의 처소로 정확하게 날아들었다. 모두 도착하자 제일 앞선 이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이내 기와를 타고 내려가 살미(山彌)를 발판 삼아 몸을 날렸다. 날렵하게 공중제비를 돌더니 대청으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길게 늘어진 그림자는 분명 여우의 머리와 꼬리를 하고 있었다. 내관들의 호들갑이 거짓부렁은 아니었다. 여우가 문을 열고 침소에 들어가자 코골이가 멈추었다.

내관들은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내관들의 걸음으론 가당치 않은 일이었다. 왕은 크고 긴 두 팔을 내두르며 성큼성큼 비형랑과 두두리들을 쫓았다. 순식간에 월성을 벗어난 두두리들은 남천(南川)을 타고 내달리다 중악(中岳)에 다다랐다. 낮에도 어두운 중악의 숲은 사람들의 왕래가 없는 곳이었다. 두두리들은 거침이 없었다. 왕이 주춤하는 사이 숲 속으로 종적을 감추었다. 졸지에 칠흑 같이 어두운 숲 속에 홀로 남겨진 왕은 멈춰서야만 했다. 그제야 위기를 느낀 왕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어둠 속에서 수십여 개의 푸른 눈이 왕을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한 비린내가 물큰했다. 기갈 든 짐승의 침 냄새였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짐승의 아가리에 제 발로 뛰어든 꼴이 된 것이다. 서늘한 안광을 내뿜으며 거친 숨소리가 왕의 발밑까지 조여들었다. 더욱 역한 냄새가 풍겼다. 그러나, 왕은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한낮의 햇빛도 들지 않는 숲 속에서 달빛을 기대하는 것은 가당찮은 일이었다. 왕은 팔을 휘두르거나 기합을 질러 보았으나 부질없었다. 왕이 몸부림을 칠 때마다 인육(人肉)내음이 더욱 멀리 퍼질 뿐이었다. 순간, 뒷목을 노린 짐승이 달려들었으나 왕의 등에 받쳐 꼬라박고 나뒹굴었다. 왕은 발바닥으로 짐승을 짓이겼다. 짐승의 신음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어르릉' 거리던 다른 짐승들도 달려들었다. 팔과 다리를 한 번 움직일 때마다 '깨갱' 소리를 내며 짐승들이 여기저기 나자빠졌다. 왕 주변으로 짐승들의 시체가 쌓여만 갔으나, 인육에 눈이 뒤집힌 짐승들의 수는 계속해서 늘어만 갔다. 왕은 급격하게 힘을 잃어갔고 물리거나 할퀴어진 부위에서 피가 품어져 나왔다. 피 냄새는 짐승들을 더욱 미치게 만들었고, 급기야 중악의 모든 짐승들이 왕을 향해 달려들기에 이르렀다.

아침이 되었다. 지밀 내관들이 대전 기둥에 기대 졸고 있었다. 간밤에 두두리들과 왕의 뒤를 쫓다 나가떨어진 자들이었다. 육경(六更:오전 5시부터 7시까지)을 알리는 고동소리에 내관들은 기지개를 켜다 깜짝 놀랐다. 대전 앞마당에는 이리의 시체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죽은 이리들의 정수리에는 화살이 박혀 있거나 날카로운 것으로 베인 대가리가 겨우 붙어 있는 것도 있었다. 연유를 알 수 없는 이리들의 시체에 허둥지둥 갈피를 못 잡는 내관들은 그제야 간밤에 두두리들을 쫓았던 왕이 생각난 듯 급히 대전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웬 놈들이냐? 왕께서 어느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하셨으니 썩 물렀거라!'

왕의 침상을 겹겹이 에워싼 두두리들이 내관들을 밀쳐내며 고함을 질렀다. 쫓겨난 내관들은 대궁사신(大宮私臣:지밀의 경호와 왕과 관계된 일을 처리하는 부서의 수장)에게 몰려가 두두리들이 왕을 사로잡고 있다고 알렸고, 깜짝 놀란 대궁사신은 새주 미실에게 급히 연통을 넣었다. 미실이 황급히 입궁하여 대궁의 문을 열라 하였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급히 시위삼도의 병력과 미실을 경호하는 낭도들이 대궁을 포위했다. 그러나, 담을 넘거나 벽을 부수고 대궁 영내로 진입할 수는 없었다. 대궁전에서 날아오는 화살이 병사들을 꼼짝도 못 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시위삼도에 속한 궁수들은 차마 왕의 거처를 향해 활을 쏠 수는 없었다. 미실은 대궁사신과 지밀내관들을 불러 추궁했다.

'저들은 어떤 자들이냐?'

대궁사신은 어안이 벙벙하여 말을 못했고, 아연실색한 내관들이 지난 며칠간의 일을 고했다.

'저들은 두두리라 불리는 자들이 온데... 비형랑이 우두머리입니다. 며칠 전 왕께서 비형랑을 궐내에 들이셨는데, 비밀을 지키지 않으면 살려두지 않을 것이라 하셔서...'

미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오금이 저린 지밀내관들이 울부짖었다.

'네놈들에게 분명 지밀에 관한한 터럭하나라도 보고하라 일렀거늘... 나를 기망하려들었다?'

미실은 분이 삭지 않는 듯 연신 식식거렸고 노여움이 극에 달한 떨리는 목소리로 내관들을 추궁했다.

'그런 자들이 왕을 위해(危害)하려 대궁을 습격했다는 말이더냐?'

그 순간, 시위삼도의 장수가 급보라고 외치며 미실에게 귓속말을 전했다. 미실의 안색이 하얗게 질리며 입술을 떨었다. 급보의 내용은 이랬다. 비형랑이란 자는 죽은 진지왕의 유복자이며 왕위를 다시 되찾고자 의도적으로 왕에게 접근하였다는 것과, 지난밤 왕을 함정으로 몰아 위독한 상황으로 만들었다는 것과, 현재 왕의 생사를 알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왕이 대궁에 인질로 잡혀있는 것인지, 이미 불귀의 객이 된 것인지 알 수 없으니 시위삼도의 군사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무턱대고 두두리들을 공격했다간 살아있는 왕을 위해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미실은 혼절할 것만 같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일이었다. 사도태후에게 이 일이 알려진다면 지금까지 쌓아 올린 믿음은 한순간에 무너지고 말 것이다. 미실의 망설임은 계속되었고 군사들은 미실의 명을 기다리고만 있었다. 어느 누구 하나 마땅한 해법을 찾지 못하였고, 어느덧 해는 서쪽 하늘로 기울고 있었다. 다시 시위삼도의 장군이 묘안이 있다며 알현을 청했다. 그의 복안은 이랬다. 해가 지기를 기다려 어둠을 틈타 날랜 군사들을 침투시키자는 것이었다. 어둠을 잘 이용하기만 한다면 두두리들이 미쳐 눈치 채기 전에 기습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미실은 그제야 만면의 미소를 띠며 한숨을 쉬었다. 서산 너머로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때였다. 대궁 앞마당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던 이리들의 시체에 불화살 한 발이 날아와 박혔다. 기름을 미리 뿌려놓았는지 순식간에 거센 불꽃이 일어났다. 대궁 주변이 대낮처럼 환해지자, 장수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미실은 더 이상 주저할 수 없었다. 넋 놓고 기다렸다간 어떤 황망한 사고가 일어날지 모를 일이었다. 미실은 호위 낭도들에게 영흥사로 향할 것을 명했다. 두두리들에게 유린되는 황실의 위엄을 더 이상 묵과할 수는 없는 일이었고, 더군다나 죽은 진지왕의 아들이 살아 돌아왔다는 사실을 사도태후에게 알리고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만 할 때라 판단했다.

그것은 시중(時中)에 따른 단호한 조처였다. 설사 진지왕의 아들이 왕을 겁박하여 군사들을 장악하려 해도, 사도태후가 옥새로 날인하지 않는다면 어떤 어명도 소용없을 것이다. 사태의 위급을 사도태후에게 알려 적확한 조치를 취해야 할 때라는 압박이, 실기(失期)하여서는 돌이킬 수 없다는 강박이 미실을 어지럽게 했다. 어떤 추궁을 받더라도 서둘러야만 했다. 날랜 걸음의 낭도들만이 새주의 가마를 호종했다.

대궁 앞마당에서 일어난 불은 검은 연기를 일으키며 월성의 하늘을 가득 매웠다. 역한 냄새 때문에 코를 막을 지경이었고 매운 연기에 눈을 뜨지 못했다. 그 때, 검은 그림자들이 연기에 숨어 대궁의 담을 마치 귀신처럼 미끄러져 내려가더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들의 몸놀림은 지극히 순식간에 일어난 것이어서 어느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았다.

한편, 미실을 태운 가마는 서천(西川)을 가로지르는 금교(金橋)를 지나고 있었다. 이 다리를 건너면 영흥사(永興寺)를 둘러싸고 있는 천경림(天鏡林)이 나타날 것이다. 천경림은 세월을 가늠할 수 없는 고목들이 울창한 숲으로, 나라에 기쁜 일이 들 때에는 나무들이 꽃을 피웠고 국운이 위태로울 때는 슬피 운다고 알려진 신령한 숲이었다. 어떤 이는 나무들이 천인(天人)으로 변하여 승천하는 것을 직접 보았다고도 하고, 또 어떤 이는 목귀(木鬼)들로 변한 고목들이 시뻘건 아가리를 벌리고 산 사람을 잡아먹는 것을 보았다고도 했다. 어쨌거나 국인(國人)들은 천경림을 경외하였고, 왕실에서도 오래전부터 숲의 상서로운 기운을 범상하게 여겨 왕가 직속의 사찰을 세웠으니 그것이 영흥사였다. 이를 통해 만고청청(萬古靑靑)한 천경림과 같이 왕실의 무궁한 번영을 기원하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사도태후가 조섭(調攝)을 구실로 별궁처럼 사용하고 있었다.

그날따라 천경림엔 안개가 자욱하여 갈 길 급한 미실을 더욱 조급하게 했다.

영흥사의 불빛이 보인다는 낭도들의 말에 한 편으론 안심이 되기도 하고 한편으론 어떻게 말해야 할지 막막하고 두렵기만 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미실은 머리를 싸매고선 흔들리는 가마에 몸을 맡겼다. 그때 역한 냄새의 연기가 가마 문틈으로 새어 들어왔다.

얼마나 지났을까? 깜빡 졸았던 그녀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떴을 땐, 가마가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고 있지 않았다. 호종하는 낭도들을 불렀으나 대답이 없었다.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미실은 가마의 쪽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밖은 안개가 자욱하여 분간이 어려웠다. 다시 낭도들을 불렀다. 까마귀 소리만 되돌아왔다. 가마 속에서 무작정 기다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쪽문에 드리운 발을 올려 조심스럽게 얼굴을 내밀었다. 낭도들은 온데간데없었고, 사방에 낭자한 유혈은 숲 속으로 이어졌다. 미실은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치마를 걷어 올린 미실은 무작정 숲길을 뛰기 시작했다. 언제나 낭도들이 호종하여 가마를 끌었으니 정한 길은 알 수 없었다. 더군다나 밤안개 자욱한 천경림의 숲 속이었다.

미실은 결사적이었다. 영흥사의 불빛을 발견해야만 살길이 열리리라. 미실은 뛰고 또 뛰었다. 그러나 제자리를 계속 맴돌 뿐 불빛은 어디에도 없었다. 미실은 절망했다. 미실은 그래도 포기할 수 없다는 듯 뜀박질을 멈추지 않았다. 그때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의 노래가 들려왔다.

'파랑새야 파랑새야 저 구름 위의 파랑새야~

어찌하여 다시 날아들더니 구름 위로 날아 가는가

파랑새야 파랑새야 나의 콩밭의 파랑새야~

이미 왔으면 가지 말지 또 갈 것을 어찌하여 날아 왔는가'

아주 오래전, 사다함(斯多含)이 미실에게 들려주던 그 노래였다. 그때 미실은 막 영글기 시작한 십 대의 소녀였고 사다함은 그녀의 첫사랑이었다. 매일매일 들뜨고 설레었던 마음이란 가슴에 담아둘 뿐 겉으로 표현할 길이 없었다. 그러나 진흥왕의 생모 지소태후와 할머니 옥진궁주의 명에 의해 미실은 노리부와 결혼해야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사다함은 노래를 지어 불렀다. 파랑새의 노래, 즉 청조가(靑鳥歌)가 그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사다함의 마음을 담은 청조가는 국인들의 심금을 울렸다. 몇몇이 따라 부르더니 급기야 서라벌 전역에서 유행했고, 당연히 미실에게도 전해졌다. 미실은 몰래 울면서 따라 불렀다. 몸은 노리부에게 매였으나 마음은 언제나 사다함의 곁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어느 날 홀로 궁을 빠져나온 미실은 사다함을 찾았다. 그러나 사다함은 실연의 아픔을 감당하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후였다. 미실은 절망했다. 어떠한 위로도 미실이 받은 충격을 달래지 못할뿐더러 미실의 주변엔 위무해줄 이 아무도 없었다. 미실은 사다함의 뒤를 따를 작정까지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낙담한 미실은 자책했고 스스로를 증오했다. 그 이후로 미실은 사랑의 감정을 극도로 꺼려했고, 할머니 옥진궁주의 가르침에 따라 오직 음사(陰事)에만 매진했다. 그래야만 스스로를 달랠 수 있었고, 그래야만 사다함과의 추억을 지울 수 있었다.

'파랑새야 파랑새야 저 구름 위의 파랑새야~

나는 죽어 무슨 귀신 될까,

나는 죽어 호신(護神)되어 그대에게 날아들어,

매일 그대와 함께 천년 만년...'

안개 속에서 사다함의 그림자가 노래를 부르며 손을 내밀었다. 고목처럼 거친 손마디였으나, 미실은 사다함의 고통이 느껴져 북받친 감정을 주체할 길 없었다. 가슴 깊은 곳에 아주 오래전에 밀봉된 감정이 스멀스멀 되살아났고, 미실은 사다함의 품에 안겨 흐느꼈다.

"울지 마세요, 울지 마세요. 그대~"

안개에 가려진 얼굴이 희미했지만 부드럽고 잔잔한 목소리는 오래전의 사다함 그대로였다.

"미안합니다. 그때 소녀는 용기가 없어 당신을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미안합니다. 흐흐흑."

"아닙니다. 아닙니다. 그대의 잘못이 아닙니다. 나는 다시 환생하여 그대의 보호신이 되리라 하였습니다."

사다함은 품에 안긴 미실을 꼭 껴안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대, 이제 눈물을 멈추고 이리로 오십시오. 저와 함께 못다 이룬 사랑을 찾아, 우리들의 파랑새를 찾아..."

미실은 사다함의 손에 이끌려 안개 자욱한 숲을 헤치고 또 헤쳤다. 치마 매듭이 나무에 걸려 풀어헤쳐졌고, 저고릿고름도 흩날리는 치맛자락과 함께 스르르 풀렸다. 풍만한 미실의 몸이 이리저리 흔들이며 연무 속을 뛰어다녔고, 어느새 발가벗겨진 자신을 깨닫지 못한 체 깔깔 웃기만 하였다. 마냥 행복한 그녀의 웃음소리는 연무 낀 숲 속 너머로 아득해지기만 하였다.

프레시안

언덕 너머로 빠르게 다가오는 가마를 발견한 위병들은 일주문의 목책을 서둘러 거두었다. 미실의 가마를 지체하게 했다간 어떤 불호령이 떨어질지 모를 일이었다. 방울소리를 울리며 빠르게 지나가는 가마를 향해 위병들은 모두 허리를 깊이 숙였고, 가마는 쏜살같이 일주문을 통과하여 고두(庫頭)를 향했다. 비구(比丘)의 숙소를 고두라 하였으나 오래전부터 사도태후의 거처로 사용되고 있었다. 가마의 쪽문이 열리더니 미실이 급한 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서두르는 법이 없었던 미실이 총총걸음으로 다가오자, 큰일이 난 것을 직감한 나인들이 오두방정을 떨며 문을 열어젖혔다.

사도태후가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미실은 엎드려 머리를 깊이 숙였다. 태후가 자리를 잡고 물었다.

"무슨 사변이라도 났더란 말이냐? 무슨 일인 게야?"

미실은 엎드린 채로 물건을 싼 보자기를 두 손으로 받들어 태후에게 올렸다.

"이게 무엇이냐? 오늘따라 네가 안 하던 짓을 하는구나."

사도태후는 매듭을 풀었다. 그 속엔 껍질이 벗겨지고 탈색된 요고(腰鼓)가 들어있었다.

"이것은 요고가 아니냐? 대관절 오늘따라 왜 이러는 것이냐? 갈피를 잡을 수가 없구나!"태후는 인상을 찌푸리며 들었던 요고를 아무렇게나 놓았다. 엎어진 요고가 바닥에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때였다.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아드님께서 노래를 부르며 즐겨 사용하던 것입니다."

미실에게서 사내의 목소리가 불쑥 튀어나오자 태후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누구냐? 네 놈이 대관절 누군데... 여기 있는 것이냐?"

"손자의 절을 받으십시오."

미실의 옷을 입고 있는 사내는 비형랑이었다. 비형랑은 일어나 손을 모으고 큰절을 올렸다. 태후는 두려움에 발버둥을 쳤다.

"밖에 누구 없느냐? 나인들은 군사들을 불러라! 어서!"

태후의 노기 어린 고함에도 밖에서는 일언 대구도 없이 잠잠했다. 태후를 시위(侍衛)하던 나인들은 이미 두두리들의 습격을 받은 이후였다. 고립을 자초했던 태후였기에 군사들의 근접경호는 애초에 없었다. 태후의 명을 받들 이는 고두 주변에는 아무도 없게 된 것이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알아차린 태후는 노여움을 애써 진정시켰다.

"네가 진지의 아들이란 말이냐? 도화가 너의 어미이고?"

"그렇습니다. 비형랑이라 하옵니다."

비형랑의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태후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호호호호! 너는 그 말을 믿으라고 하는 소리냐 웃으라고 하는 소리냐? 죽은 진지가 네 어미에게 씨를 뿌렸다? 어이없어 말문이 막히는구나! 호호호."

주춤하는 비형랑을 향해 태후는 꾸짖듯이 말했다.

"너의 골(骨:외모)을 한번 보거라? 너의 몰골 어디에서 왕실의 품격이 느껴지느냐? 왕실의 골품(骨品:외모의 품격)은 잡인들의 것과는 근본이 다른 것이다. 어디서 굴러먹던 도적놈이 성골(聖骨)을 함부로 입에 담는 것이냐!"

사자후를 토하는 것처럼 태후의 목소리는 고두 내부에 쩌렁쩌렁했다. 세상을 마음대로 쥐락펴락했던, 아니 지금도 그러한 태후였다. 스스로 권좌를 물리고 뒷방 늙은이를 자처하였으나, 지존의 위엄은 변함이 없었다. 비형랑은 백정을 처음 봤을 때처럼 태후의 기세에 움츠러들었으나 애써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비형랑이 주춤하자 태후는 거침없이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옛다. 네가 바라는 것이 금전(金錢)이라면 이거나 받고 썩 물렀거라! 순순히 물러난다면 오늘 일은 없던 것으로 할 터이니!"

태후는 십장생이 새겨진 붉은 화각함을 열어 금과 옥으로 만든 비녀와 귀고리를 내던졌다. 비형랑 앞으로 흩어지며 굴렀다. 비형랑은 입술을 깨물었다. 태후가 다시 호통치며 말했다.

"그것으론 부족하단 말이냐? 좋다. 그렇다면 이것 모두를 가지고 썩 물렀거라!"

태후는 다른 함을 열어 금은보화를 쏟아 엎었다. 비형랑이 묵묵히 듣고만 있자 태후는 노기등등한 표정으로 당장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로 몰아붙였다. 그때였다. 격자문을 박차고 난입한 자들이 태후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런 늙고 교활한 할망구야! 수작 부리지 말고 어서 옥새를 내놓아라!"

여우 거죽을 둘러쓴 기달과 두두리들이었다. 지엄한 태후의 안전(案前)에서도 기달은 물불을 가리지 않았고, 그의 난폭함 앞에서는 태후마저도 몸을 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이 불한당은 옥새를 노리고 있는, 단순한 도적떼가 아니지 않은가!

"옥새라니? 네 놈들의 배후가 누구 관대 옥새 운운하는 것이냐? 네 놈들의 정체를 밝혀라!"

위기상황을 어떻게 모면해야 하는지 태후는 그 방법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기달에 맞서 태후 또한 물러남 없는 단호한 태도와 어투로 다그쳤다. 어둠 속에서 기달의 이빨이 빛났다. 마치 여우의 그것처럼 날카롭고 예리했다. 성큼성큼 다가온 기달은 다짜고짜 주먹을 내질렀다. 붉은 선혈이 사방으로 튀며 태후의 몸은 겨울바람을 맞은 낙엽처럼 힘없이 허공에 떴다. 우당탕 소리와 함께 태후는 병풍 위로 나가떨어졌고, 따라온 기달의 주먹질은 멈추지 않았다. 계속해서 태후의 얼굴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내가 여우 다루는 법을 좀 알지. 이 늙은 여우야, 어서 옥새를 내놓아라!"

난생처음으로 겪는 충격과 고통이었다. 태후는 고문 받는 타인의 고통을 즐길 줄만 알았지, 자신에게 무자비하게 가해지는 폭력을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골산의 거친 환경에서 잔뼈가 굵은 기달의 주먹을 감당해낼 리 만무했다. 이미 코뼈가 부러지고 앞니가 몽땅 빠진 이후였다. 핏물이 바닥을 흥건하게 적셨다. 태후는 그제야 비형랑이 입고 있는 미실의 옷을 물었다.

"네가 입고 있는 옷은 미실의 것이 아니더냐! 그렇다면 미실도 네 놈들이?"

기달이 태후의 머리를 뿌리 체 뽑아버릴 듯이 휘어잡았다. 늙은 여인의 몸이 마치 추풍낙엽처럼 이리저리 휘둘렸다. 기달이 낄낄거리며 말했다.

"아~ 그 숲 속에서 미쳐 달아난 년? 아편 연기를 조금 피웠더니, '사다함'이라 막 흐느끼며 부르짖더니 갑자기 옷을 벗어던지고 안개 속으로 뛰어가던걸? 왕족의 계집들은 갈피를 못 잡겠다니까?"기달은 다시 태후의 멱살을 잡고 거칠게 다그쳤다.

"이 요망한 늙은 여우 년아! 딴소리 말고 어서 옥새를 내놓으란 말이다. 계속 어기적대면 네 년의 성골(聖骨)은 형체도 없이 아작 나고 말 것이다. 어서!"

급기야 기달은 허리춤에서 칼을 빼들었다. 나무꾼들이 가지를 자르거나 고기를 가를 때 쓰는 조그마한 나대칼이었으나 끝이 매우 예리하게 빛났다. 비린 쇳기가 태후의 코를 찔렀다. 역겨워진 태후는 구역질을 간신히 참으며 말했다.

"옥새가 너희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어떤 놈이 배후에 있는지 알 수 없으나, 월성에 왕이 버젓이 살아 있는데 가져가 본들 어디에 써먹겠느냐? 왕이 네놈들을 가만히 놔둘 성 싶으냐? 어림도 없지. 내 목숨 값은 후하게 치를 것이니 이쯤에서..."

기달이 난데없이 또 깔깔거리며 웃었다. 태후의 멱살을 바짝 당기고선 조롱하듯 말했다.

"네 년이 궁금해 하던 뒷배가 그 왕이라면 어쩔 것이냐? 이 모든 일을 사전에 철두철미하게 계획하고 실행한 것이 네년이 믿고 있는 바로 그 왕이라면? 깔깔깔! 이제 정신이 좀 차려지십니까요, 태상태후마마?"

눈을 동그랗게 뜬 태후의 얼굴을 코앞에 두고 기달은 계속해서 웃었다. 태후는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으며 절규하듯 말했다.

"그럴 리 없다. 우리 백정이 그럴 리 없다. 얼마나 이 할미를 아끼고 사랑하는 아이인데, 절대 그럴 리 없다!"

드디어 잠잠하던 비형랑이 무릎을 세웠다.

"왕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친 아들을 눈 하나 깜짝 않고 죽인 요망한 늙은이라, 내가 아무리 손자라 강변해 본 들 눈 하나 깜짝 안 할 것이다. 기대를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왕의 예상은 틀리지 않는군요. 왕께서 이 말씀을 꼭 전하라 하셨습니다. 이제 세상은 늙은이의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니, 오늘로서 대원신통의 맥은 끊겼다라고."

비형랑이 말을 마치자, 격자문에 붉은 기운이 어른거렸다. 기달이 문을 젖히자 고두 주변의 전각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기달이 호탕하게 웃으며 비형랑을 바라보았다.

"역시 왕의 계획은 빈틈없이 착착 맞아떨어진다니까! 이제 슬슬 불놀이를 구경해볼까? 하하하!"

기달은 부싯돌을 켜며 태후의 침소 여기저기에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불꽃은 격자문의 창호지에 옮겨 붙으며 빠르게 번졌다. 기달은 환호성을 지르며 문밖으로 뛰쳐나갔고, 비형랑이 태후를 향해 최후의 통보를 전했다.

"왕의 마지막 말입니다. 옥새를 들고 나오시면 천수를 누리는데 효를 다할 것이나, 그렇지 않다면 지금까지의 잘못을 소신공양으로 속죄하시라 했습니다."

프레시안

왕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대궁 앞마당의 불길이 잦아든 이후였다. 뼈만 남은 이리들의 시체가 겨우 불씨를 흩날리고 있었고, 두두리들은 대궁전의 격자문을 활짝 열어젖히고선 월대 계단을 내려왔다. 그들은 가마를 메고 있었다. 시위삼도의 군사들이 대궁으로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왔다. 순식간에 대궁 앞마당은 군사들로 가득 찼다. 수천의 궁수와 창병이 겨누고 있는 데도 복면을 한 두두리들은 당황하거나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이제 그만 창을 거두어라!"

가마 속에서 왕이 호통을 쳤다. 두두리들에게 볼모로 잡혀있는 왕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당당하고 호기로운 목소리였다. 두두리들과 대치하고 있는 장수와 군사들이 어리둥절해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마의 쪽창으로 왕의 큰 손이 불쑥 튀어나오더니 군사들을 가리키며 불호령을 쳤다.

"어서 무기를 거두라고 하지 않느냐? 네놈들이 왕의 명을 거역할 참이더냐?"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가늠을 할 수 없어 혼자서 끙끙 앓던 한 장수가 벌벌 떨며 앞으로 나섰다.

"외람되오나 옥체를 보여주시옵소서. 저희들은 대가(大家:왕을 지칭하는 궁궐용어)께서 무사 안녕하신 것을 확인 해야겠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고얀 놈들! 왜 이리 성가시게 구는 것인지..."

두두리들이 가마를 내려놓자 왕이 곧 거대한 몸체를 드러냈다. 왕은 노기 어린 표정으로 군사들을 꾸짖었다.

'이놈들아!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어서 영흥사로 향해야 하느니라! 태후마마의 안위가 경각에 달렸거늘! 어서 서둘러라!'

복면을 한 두두리들이 왕의 어가를 재빠르게 몰아 월성의 대문을 빠져나갔다. 영문을 알 수 없는 군사들은 서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어가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두두리들의 걸음은 마치 말을 타고 달리는 듯 재빨랐다. 군사들이 겨우 꽁무니를 따라잡을 정도였다. 왕은 헉헉거리며 따라오는 군사들을 바라보며 알 수없는 미소를 지었다.

영흥사를 모두 집어삼킬 듯이 불은 거셌다. 태후 침소의 불길을 잡기 위해 모든 군사들이 동원되어 지붕 위로 물을 퍼붓고 있었으나 불길은 점점 거세지기만 했다. 이내 지붕이 내려앉을 것만 같았다. 왕이 도착한 것은 기둥을 타고 지붕으로 불이 번진 이후였다. 왕은 불타는 고두 전각 앞에서 '할마마마!'라고 소리치며 절규했다. 군사들과 비구들이 분주하게 물을 퍼 날랐으나 불길이 잡히지 않자,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듯 진평은 금의를 벗어던졌다. 근육으로 탄탄한 몸이 불길에 어른거리며 타오를 듯이 이글거렸다. 물통을 빼앗아 든 왕은 물을 끼얹고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 두두리들도 촌분의 머뭇거림도 없이 왕의 뒤를 따랐다. 군사들이 말릴 틈도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잠시 후, 지붕이 무너지며 불꽃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발을 구르던 군사들의 탄식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지켜보던 모든 이들이 화마가 왕을 집어삼켰다며 대성통곡을 할 즈음, 두두리들이 왕을 호위한 체 불길을 헤치고 나왔다. 탄식은 곧 환호가 되었다. 왕은 검게 그을린 태후의 몸을 품에 꼬옥 안고 있었다.

"할마마마, 할마마마! 얼마나 놀라셨습니까? 이제 제가 왔으니 안심 하소서. 소인이 조금만 늦었다면 할마마마를 여읠 뻔했습니다. 저의 불효를 용서하여주시옵소서!"

진평은 검게 그을린 태후의 몸을 끌어안고 대성통곡을 했다. 울음소리가 얼마나 지극한지 군사들과 비구, 뒤늦게 나타난 문무대신들이 숙연해질 정도였다. 모두 왕의 과감한 행동이 태후를 살렸다며 입을 모아 칭찬했고, 불길 속을 마다하지 않는 왕의 용기와 효심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태후 홀로 눈을 부릅뜨며 백정을 노려볼 뿐이었다. 백정의 큰 손은 아무도 알 수 없게 태후의 입을 막고 있었고, 숨을 쉴 수 없었던 태후는 옥새함을 부여잡고 있던 손을 스르르 풀었다. 혼절한 태후를 안고 왕은 울부짖었다.

"어의, 어의는 어딨는가? 어서 태후마마를, 어서 태후마마를!"

왕의 통곡은 한동안 계속되었고, 두두리들의 명에 따라 신속하게 움직인 군사들이 불길을 잡고서야 진정되었다.

그날 있었던 영흥사의 큰 불은 삼백 오십 호의 전각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다행히 두두리들의 진화로 천경림까지 번지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화전(火田)으로 불을 놓고 끄는 법에 익숙했던 두두리들에겐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국인들은 두두리들이 태후와 천경림을 살렸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행방이 묘연해진 미실은 어느 누구도 구태여 행적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 다만, 천경림에 연무가 짙은 날이면 여인의 웃음소리가 들린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어떤 이는 알몸의 여인이 깔깔 웃으며 숲 속을 뛰어다니는 것을 목격했다고도 했고, 그 모습이 미실을 닮았다고도 하였다. 그 이후로 안개가 끼는 날이면 노소(老少)를 불문하고 천경림에는 남정네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나, 그들은 단지 가던 길 돌아보는 노루만 발견할 뿐이었다.

전신에 화상을 입은 태후는 그 이후로 마음의 병이 깊어져 실어(失語)하였다. 일그러진 자신의 모습을 비관하여 수차례 자살을 시도하였으나 미수에 그쳤다. 왕은 영흥사의 중수(重修)를 서둘렀다. 다음 해에 복원된 고두에서 태후의 삭발식이 거행되었다. 태후는 비구니가 되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드문드문 남은 태후의 머리칼이 삭도(削刀:삭발의식에 쓰이는 칼)에 잘려나갈 때, 왕은 울음을 참지 못했다. 그 모습이 하도 간곡하고 지극하여, 삭도를 놀리던 승려의 눈에도 눈물이 맺혔다.

계속...

프레시안

글 그림 : 노길상

기자 : 노길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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