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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7 (목)

변곡점 맞은 트럼프의 대외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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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다음주의 질문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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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로 독트린은 살아 있고, 건재하다.”

존 볼턴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17일 피그스만 침공 작전 58주년 기념식에서 한 말이다. 그는 이 자리에서 쿠바와의 관계 정상화를 사실상 원점으로 돌리는 제재뿐만 아니라 중남미의 반미 사회주의 정권인 쿠바와 니카라과, 베네수엘라 정권의 교체를 천명했다.

먼로 독트린, 피그스만 침공, 존 볼턴은 미국 역사의 제국주의적 행태나 최악의 대외정책을 상징한다.

1800년대 제임스 먼로 당시 대통령이 천명한 먼로 독트린은 아메리카 대륙은 미국의 영역이니 유럽 열강은 간섭하지 말고, 대신 미국도 유럽과 그 열강의 문제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미국 최초의 본격적인 대외정책 독트린이다. 아메리카 대륙에 은거하는 미국의 고립주의가 아니라 그 대륙에 대한 미국의 헤게모니 선언이다. 먼로 독트린은 그 뒤 미국이 중남미 국가에 간섭하는 근거가 됐다. 멕시코와의 전쟁을 통한 텍사스와 캘리포니아 획득, 스페인과의 전쟁으로 쿠바의 사실상 식민지화, 2차 대전 이후에도 칠레의 아옌데 정권 붕괴 공작, 파나마 침공,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정권 붕괴를 위한 콘트라 반군 공작 등이 그것이다.

그 와중에 일어난 반작용이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 혁명이다. 존 케네디 당시 미국 행정부는 1961년 쿠바 혁명을 좌초시키려고 중앙정보국 주도로 쿠바 망명자들을 훈련시켜 쿠바 피그스만에 침공시켰다. 이들은 쿠바 혁명군에 격퇴되어 사망하거나 대부분 체포됐다. 케네디 자신뿐만 아니라 미국의 모든 대외정책 전문가들에 의해 가장 멍청한 대외정책의 하나로 회자된다. 피그스만 침공은 쿠바의 안보 우려를 증폭시켜, 쿠바가 소련의 미사일 기지를 유치하는 결정을 이끌었다. 이는 미-소의 3차 세계대전 위기를 부른 쿠바 미사일 위기의 원인이다.

그런데 미국한테는 꺼내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사건이 다시 ‘기념’되고, 그 자리에서 먼로 독트린이 떠받들어졌다. 볼턴은 피그스만 침공을 능가하는, 미국 대외정책 사상 최악의 결정인 이라크 전쟁의 열렬한 주창자이자 옹호자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된 이유 중 하나는 소련 붕괴 이후 미국의 지나친 대외 개입에 대한 반대였다. 옹호자들에게는 ‘자유주의적 국제질서’, 비판자들에게는 ‘자유주의적 패권’(리버럴 헤게모니)이라는 미국의 이 대외정책 노선은 미국식 가치에 부응하는 국제질서와 정권을 만드는 것이 핵심이다. 하지만 미국은 지금 아프가니스탄, 시리아, 이라크, 예멘 등 중동 분쟁에서 승리 전망 없이 수렁에 빠져 있다. 러시아와의 관계도 악화되어 우크라이나에서는 내전을 겪고 있고, 동유럽 국가들은 안보 위협을 느끼고 있다. 그 사이 중국은 힘을 길러 미국에 맞서고 있다.

트럼프는 기존의 미국 대외정책이 “완전하고 총체적인 재앙”이라며 러시아와의 관계를 개선하고, 중동 분쟁을 끝내고, 중국을 경제적으로 견제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미국의 대외정책을 혁명적으로 바꾸는 이단아로 주목된다. 하지만 그도 전임 빌 클린턴이나 조지 부시, 버락 오바마를 답습하는 기미를 보이고 있다. 클린턴은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를, 부시는 클린턴 개입정책의 상징인 개입한 국가에서의 ‘국가건설’(네이션 빌딩) 정책을 일축하고는 “강력하나 겸손한” 대외정책을 내세웠고, 오바마는 지나친 대외간섭의 교리인 ‘워싱턴 플레이북’을 따르지 않고 “국내에서 국가건설”에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모두 공수표였다.

트럼프 역시 자신이 천명했던 중동에서의 철군은 지지부진한 상태에서 오히려 이란 봉쇄를 위한 긴장을 높이고 있다. 쿠바 혁명 이후 미국 역대 행정부의 ‘중남미 숙제’였던 쿠바와의 관계 정상화를 간단히 되돌렸다. 이에 더해 니카라과와 베네수엘라 등에서 유례없이 동시 정권교체를 추구하고 있다. 트럼프가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에서 강경파들의 주문인 ‘선 비핵화, 후 제재완화’라는 빅딜론으로 돌아선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미국의 국력을 과잉 전개해 분쟁을 악화시키고, 미국을 수렁에 빠뜨린 전임 행정부와 트럼프 행정부의 차이는 점점 옅어지고 있다. 볼턴이 안보보좌관으로 피그스만 침공을 기념하면서 먼로 독트린을 부활시키는 풍경은 분명 트럼프 대외정책의 변곡점이다.

정의길 국제뉴스팀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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