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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4 (월)

[통역으로 통하는 세상]조기 영어교육 마케팅…원어민·모국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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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사진설명: 원어민, 모국어란 말이 ‘영어에 능통한 내 아이’라는 환상을 부추기기 위해 남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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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왔고 올해에도 어김없이 시작되었다. 학습지를 비롯한 사교육 업체들이 아파트 단지 곳곳, 파라솔과 함께 임시 매대 같은 것을 세우고 공세적인 판촉행사에 돌입한 것이다.

며칠 전, 유치원에서 큰아이를 데리고 나와 둘째가 있는 어린이집으로 향하던 차였다. 아이를 재촉하며 종종걸음을 치는 필자에게 중년 아주머니로 보이는 영업직원이 말을 걸었다.

“엄마! 이제 파닉스 시켜야지. 강남 엄마들은 세 살짜리부터 다들 시켜.”

일단 어느 쪽이 나이가 많고 적건 간에 초면에는 서로 존댓말을 썼으면 한다. 다짜고짜 ‘엄마’라 부르는 것도 거슬린다. 당신의 엄마가 아니다.

그런데, 강남이 뭐길래. 강남에 살고 있지도 않은데 왜 강남 엄마들을 따라해야 하나. ‘강남 엄마’들이 자녀 교육에 열 올리는 사람들의 대명사가 된 양 설명하는 것도 딱히 설득력 있지 않다. 아이를 소신껏 키우고 있는 강남 엄마들은 억울할 일이다.

어떤 업체에서는 판촉행사를 하며 태블릿PC로 수업이나 교재 샘플을 보여주기도 한다. “원어민이 가르쳐서 원어민 수준을 만들어준다”는 그들의 주장과는 달리 미세하게 틀린, 솔직히 원어민은 아닌 것 같은 표현이나 발음에 갸우뚱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물론 필자는 교육 전문가가 아니다. 하지만 영어로 국제회의 통역 일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런 교재로 공부하기만 하면 아이가 원어민이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안다. 원어민, 모국어란 말이 ‘영어에 능통한 내 아이’라는 환상을 부추기기 위해 남용되고 있다. 원어민은 또 뭐길래.

한 번은 끈질긴 구독 권유를 받고 “아이가 알파벳의 기본적인 발음을 이미 알고 있고 영어는 천천히 가르쳐보려 한다”고 한껏 좋게 거절하는데 말을 뚝 자르더니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들 생각엔 아이가 아는 것 같겠죠.”

이어서 메타인지(자신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인지하는 것) 운운하는데 그만 폭발, ‘내가 통역사라서’ ‘내가 영어 좀 해봐서 아는데’ 식으로 또박또박 맞서놓고는 나 자신의 유치함, 졸렬함에 집에 돌아와서도 한참을 부끄러워했던 기억이 있다.

영어 쓰는 일을 하고 있고 아이 영어 교육에 대해서는 나름의 소신이 있다는 얘기를 해 봐야 얻을 게 없었다. 예전의 누군가는 또 혀를 쯧쯧 차며 ‘엄마가 한국어를 잘 못해서’ 아이가 언어발달이 더딜 거라며 짐짓 전문가인 양 진단을 내렸다. 아이가 말하는 걸 들어본 적도, 심지어 아이를 본 적도 없으면서.

통역사니까 한국어를 잘 못할 거라는 추측 또한 어설프기 짝이 없다. 어눌한 국어실력 가지고는 암만 영어를 잘해도 살아남을 수 없는 직업이다.

그런데 이 역시 한글 교육 상품을 팔기 위해 하는 말이었다. 영어 상품을 영업하다 안될 것 같으니 방향을 튼 것이다. 아무리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해도 돈벌이 때문에 엄마들의 불안감 키우는 마케팅이 도를 한참 넘어선 건 분명하다.

아파트 단지 곳곳에 늘어선 파라솔마다 자칭 영어교육, 조기교육 전문가들이 포진해 집요한 영업활동을 펼치는 흔한 봄의 풍경. 끝끝내 거절하면 또 다른 카드를 꺼내든다. 형편상 비용이 부담되어 그러시냐는 이른바 ‘골지르기’ 카드다. 교묘하게 얕잡아보듯 얘기하는 모습을 보며 대체 영업 압박이 얼마나 심했기에 이럴까 싶어 안타깝기도 하다.

미안하지만 이런 식의 지르고 부추기는 마케팅에 현혹되지 않는다. 뿌듯함과 자괴감 사이를 수없이 오가며, 죽도록 영어공부를 해봤기 때문에 영어를 모국어로, 원어민 수준으로 구사하기가 만만치 않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강남 엄마들은 이러지 않아요’ ‘돈이 있으면 이러지 않아요’ 하는 말에 흔들리기엔 말의 수준이 너무 떨어진다.

경향신문

우리나라 교육열이야 워낙 유명하지만, 유독 영어 교육과 관련해서는 불안감과 열등의식, 그리고 환상에 기댄 상술이 활개 치는 것 같다. 통역 일을 하며 우리나라 사람들은 영어실력을 원한다기보다는 영어를 잘하는 사람의 이미지를 갈망하는 거라고 느껴질 때가 있는데 엄마로서 경험하게 되는 영어 교육의 인상도 별반 다르지 않아 안타깝다.

박소운 국제회의 한영통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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