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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6 (토)

'살해범의 조현병' 그 누구도 보건소에 알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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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보건소가 강제입원 1차 판단, 법무부·진주시·정신병원 등 증세 알고도 관리요청 않고 방치

"정보보호법 걸려" "통보 권한 없어"… 병원도 市도 책임지지 않았다

18일 경남 진주시 한일병원 장례식장. 전날 새벽 가좌동 한 아파트에서 일어난 방화·살인 사건 피해자 가족 10여명이 민갑룡 경찰청장을 만났다. 이 아파트 4층에 살던 안인득(42)이 자기 집에 불을 지르고, 대피하던 이웃들에게 흉기를 휘둘러 5명이 숨지고 15명이 다쳤다.

유족들은 민 청장에게 "경찰은 왜 이 지경이 되도록 방관했느냐"고 했다. 범인이 주민을 위협하는 등 이상(異常) 행동을 수차례 보여 경찰서와 파출소에 신고하고 민원도 넣었다는 것이다. 유족들은 "우리가 세 본 것만 10번도 넘는다"고 했다.

중상을 입은 강모(53)씨의 딸은 "엄마가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가다 안씨가 난동을 부려 고무장갑을 낀 채로 관리사무소와 파출소로 달려간 적도 있는데 별다른 조치가 없었다"고 했다. "진주경찰서에 찾아가 민원을 넣었더니 (안씨) 위층에 사는 우리가 층간 소음을 일으킨 게 원인이라고 하더라"고 했다.

안은 조현병을 앓았다. 병력(病歷)은 법무부, 정신병원, 진주시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기관도 중증 정신질환자를 관리하고, 강제 입원시킬 수 있는 시(市) 정신건강증진센터(진주시 보건소)에 알리지 않았다.

안이 입원했던 정신병원은 "본인이 알리길 원하지 않았다"고 했고, 시청은 "우리는 알릴 권한이 없다"고 했다. 경찰은 "주민 말만 듣고 정신병이 있다고 단정할 수 없었다"고 했다. 대부분의 조현병 환자는 적절한 치료·관리를 받아 정상 생활을 한다. 하지만 안은 3년 가까이 치료를 안 받았다.

본인이나 보호자 동의 없이 정신질환자를 강제 입원시킬 수 있는 1차 권한은 경찰과 시·군 정신건강증진센터에 있다. 경찰은 정신질환자가 남에게 해를 가할 수 있는 경우, "응급입원 시켜달라"고 정신의료기관에 요청할 수 있다.

범행을 저지른 안인득은 여러 차례 폭력성을 보였다. 2010년에도 처음 보는 사람에게 흉기를 휘둘렀다. 2018년 9월부터 2019년 3월까지 불과 6개월 동안 안이 술집 주인을 폭행하거나 아파트 주민을 위협한다는 신고가 접수돼 경찰이 여덟 차례 출동했다. 두 건의 폭행 중 한 번은 안이 망치로 다른 사람을 위협했다. "무섭다"는 아파트 주민들의 민원도 많았다.

하지만 경찰은 보건소나 정신의료기관에 안의 응급입원을 요청하지 않았다. 아파트를 관할하는 개양파출소 관계자는 "피해 주민 말에 의존해 안이 정신질환자라고 단정하기 어렵고, 교대 근무 때문에 그와 두 번 이상 대화한 직원이 없었다"고 했다. 경찰 관계자는 "전문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현장에서 응급입원 대상인지 판단하기 어렵다"고 했다. 출동 당시 흉기를 휘두르는 등 직접적인 위협이 없는데 강제로 입원시켰다가 거꾸로 고소당한다는 것이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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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관리사무소 관계자는 "안씨 관련 민원이 많아 경찰에 강제 입원시킬 수 없느냐고 했지만 '이재명 경기도지사 형님 사건 이후 조건이 까다로워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이재명 지사의 형은 정신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은 적이 있는데 이 지사와 형 가족 사이에 강제 입원 여부를 놓고 논란이 됐었다.

진주시보건소에 있는 시 정신건강증진센터는 "이번 사건이 벌어지고서야 안씨 이름을 처음 들었다"고 했다. 응급입원 요청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관리대상에서 빠져 있었던 것이다. 박정숙 진주보건소 정신건강관리팀장은 "정신병원이나 경찰, 보호자 등이 정신질환 환자를 관리해달라고 요청하지 않는 이상 안씨가 환자인지 알 방법은 없다"고 했다.

현행법상 정신의료기관은 정신질환자가 치료받을 경우 환자 거주지 관할 정신건강증진센터나 보건소에 알릴 의무가 있다. 단, 환자 본인이 거부할 수 있다. 안을 진단·진료한 정신의료기관은 두 곳이다. 2010년 안이 폭행으로 구속됐을 때 충남 공주치료감호소는 안을 조현병으로 진단했다. 법무부 관계자는 "정신감정만 받고 집행유예로 풀려났다"며 "치료감호를 받은 게 아니기 때문에 환자 상태를 관할 보건소에 알릴지 검토하지 않았다"고 했다.

안은 2015년 1월부터 2016년 7월까지 진주정신병원에서 조현병 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병원도 보건소에 상황을 알리지 못했다. 병원 관계자는 "관련 절차를 설명했더니 안씨가 개인정보보호법을 언급하며 '보건소에 알리지 말아 달라'고 했다"고 전했다. 현행법에는 의식이 없는 긴급환자나 압수수색 영장이 발부된 경우를 제외하면 환자 동의 없이 정신질환 사실을 다른 기관에 전달하면 불법이다.

안은 진주시에도 조현병 진단서를 여러 차례 제출했다. 기초생활수급자 자격을 얻기 위해서다. 진주시 관계자는 "진단서는 자격 심사 목적이지 이를 다른 기관에 알릴 권한은 없다"고 했다.

백종우 경희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안씨처럼 혼자 사는 정신질환자 수가 늘어나면서 이상 행동을 최초 발견하는 사람이 보호자가 아닌 경찰인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며 "경찰관이 조현병 등에 관한 지식을 갖출 수 있도록 교육하고, 정신질환 관련 신고가 들어오면 정신건강 전문가의 신속한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고 했다.

법원은 18일 살인과 방화, 살인미수 혐의로 안을 구속했다. 안은 경찰 조사에서 "평소 주위로부터 불이익을 당한다는 생각이 들어 홧김에 불을 질렀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경찰은 안이 2~3개월 전 범행에 쓰인 흉기를 사고, 방화 3시간 전 집 근처 주유소에서 휘발유를 구입하는 등 범행을 사전 계획했다고 보고 있다.

[진주=김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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