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은전
작가·인권기록활동가
사진작가 최민식이 찍은 어떤 사진을 보고 숨이 딱 멈추어진 적이 있다. ‘부산, 1965’라고 적힌 사진 속에선 한 소년이 땅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구걸을 하고 있는 것이었는데, 마치 기도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침을 한번 꼴깍 삼키고 조심스럽게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뒤통수엔 커다란 땜통이 있었고 윗도리를 입지 않아 드러난 왜소한 등허리엔 날갯죽지가 툭 튀어나와 있다. 공손히 손을 모으기 위해 소년의 온몸이 팽팽하게 긴장해 있었다. 그토록 노골적인 구걸도, 그토록 적나라한 시선도 적이 충격적이었지만 내 시선을 더 오래 붙든 것은 사진 옆에 쓰인 작가의 말이었다.
“나는 자신의 운명과 대결하며 씨름하고 있는 슬프고 고독한 사람의 모습을 전하고 싶었다.” 구걸하는 소년에게서 ‘굴복’이 아니라 ‘대결’을 읽어내는 일, 그것은 가난을 뼈저리게 경험해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일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최민식은 한국전쟁이라는 민족적 재난 위에 태어난 가난한 소년이 자신의 운명과 싸우는 치열한 현장에 몇푼의 동전을 던지는 일은 온당치 않다 여겼던 것 같다. 그는 소년의 준엄한 대결을 사진으로 기록했고, 그것이 그가 자기 시대와 대결하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대결’이라는 단어 때문에 나는 땅바닥에 코가 닿아 있을 소년의 얼굴이 궁금해졌다.
소년은 그 뒤 어떻게 되었을까. 한국 사회가 기아를 벗어나 국가를 재건하고 고도성장을 이루었던 그 세월을 소년도 무사히 함께 통과했을까. 부랑아 수용소 ‘선감학원’의 피해자들을 만난 뒤 나는 아마도 그러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가난을 없애는 게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을 없애는 손쉬운 길을 택한 국가가 명랑한 사회 건설을 위해 거리의 소년들을 쓰레기처럼 청소하는 동안, 가난을 뼈저리게 경험한 사람들은 자신보다 더 가난한 이들이 당하는 폭력에 눈감았다. 먹고사는 일이 죽기 살기로 힘들었던 시절, 사람들은 그렇게 가난에 투항하고 말았다.
선감도로 끌려간 소년들은 밤낮으로 얻어맞으며 강제노역에 동원되었다. 고통을 견딜 수 없었던 소년들이 목숨을 걸고 바다를 헤엄쳐 탈출했다. 탈출에 성공한 소년들은 다시 거리에서 신문이나 껌을 팔았지만 경찰은 집요하게 그들을 붙잡았다. 또다시 소년들이 붙들려간 곳들은 모두 간판에 복지와 교육을 내걸고 있었는데, 이를테면 형제복지원이나 삼청교육대 같은 곳이었다. 스펙터클이 넘치는 이 막장 드라마는 선감학원 피해자들에게 비슷한 패턴으로 반복되어서, 이 추격전이 얼마나 국가적이고 조직적이었는지를 보여준다. 그것이 바로 ‘가난의 지도’일 것이다.
선감학원이 폐쇄될 즈음 태어난 나에게 그 지도는 비현실적으로 충격적이어서 마치 사라진 고대의 유물을 보는 것처럼 신비로울 지경이었다. 어떻게 그런 폭력이 가능했을까. 어느 날 수용소의 역사를 연구하는 친구가 드라마 <왕초>(1999년)의 주인공인 ‘거지왕’ 김춘삼이 운영했던 악명 높은 부랑인 수용소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것이 내 고향 사천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고 말해주었을 때, 나는 마치 내 고향에서 공룡 화석이라도 발견된 것처럼 흥분하여 그 사실을 부모님께 알려드렸다. 그러자 엄마는 대수로울 것 없다는 듯이 “옛날엔 동네에 거지들이 많았다. 그들은 남의 것을 훔치지. 무서웠어” 하며 가진 자의 공포를 대변했고, 아버지는 “자기 것이 없으면 남의 것이라도 뺏어야지” 하며 없는 자의 억울함을 항변했다.
내 가장 똘똘한 친구의 석사 논문 주제에 대해 두 사람은 훤히 꿰뚫어 보고 있는 듯하면서도 동시에 매우 심드렁하였으므로, 나는 그들이 살아 있는 공룡처럼 느껴졌다. 나에겐 몹시 비현실적인 사건이 저 세대에겐 익숙한 풍경이었음을 깨달을 때, 나는 꼭 내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노년에 접어든 소년들은 선감학원의 진상규명과 국가의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평생 국가의 추격으로부터 달아나야 했던 사람들은 방향을 바꾸어 일생일대의 대결을 시작했다. 나는 이것이 선감학원이라는 하나의 시설에 대해서가 아니라 가난에 대한 거대한 상식, 혹은 거대한 침묵을 진상규명하라는 것처럼 들린다. 국가의 폭력에 눈감았던, 가난을 뼈저리게 경험했으므로 가난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어떤 시대의 생존 질서. 그러니 이것은 정말로 엄청난 대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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