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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509] 공정한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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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사회생물학


미국에 유학해 대학교수까지 됐지만 나는 끝내 미국 시민권을 신청하지 않았다. 그곳에서 안정된 직장을 갖고 살다 보면 자연스레 미국 시민이 될 텐데 서두를 까닭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마음 한구석에 언젠가는 조국으로 돌아가리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게도 미국 시민권을 선망했던 때가 있었다. 하버드대 기숙사 사감이 된 후 내가 지도하던 학생이 로즈(Rhodes) 장학생으로 선발돼 영국 옥스퍼드대로 떠나는 걸 보며 나도 미국에서 태어났더라면 도전해봤을 텐데 하며 부러워했던 기억이 난다. 우주 망원경을 만든 천문학자 에드윈 허블,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가수 크리스 크리스토퍼슨 등이 로즈 장학생이었다.

금년도 로즈 장학생 명단에는 하버드대를 졸업한 박진규라는 한국계 청년이 들어 있다. 그는 미국의 ‘불법 체류 청년 추방 유예 제도(DACA·다카)’ 수혜자로서 로즈 장학생의 영예를 안은 최초의 인물이다. 그는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는 학생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로즈 장학생이 되어 오는 10월 옥스퍼드로 유학을 떠나지만, 트럼프 행정부의 다카 폐지 정책 때문에 영영 미국으로 되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

몇몇 정치인이 그의 ‘비범한 능력’을 들먹이며 그에게 미국 시민권을 부여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고 있지만 정작 그는 뉴욕타임스와 보스턴글로브에 기고한 글에서 정의를 설파하고 있다. 존 롤스의 ‘공정한 게임’ 모델을 거론하며 천재나 경제적으로 탁월한 인재만 미국 시민이 될 수 있다면 그건 정의로운 사회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미국의 불법 이민자들은 정작 자신들은 혜택을 받지도 못하는 미국의 의료보험이나 사회보장제도를 위해 꼬박꼬박 세금을 내고 있다. 그는 로즈 장학생이라서가 아니라 이미 미국 사회의 일원이기 때문에 당당히 시민권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은 지금 공정한 나라이기를 포기하고 있다.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사회생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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