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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8 (금)

[단독] 최초의 주미공사관 '피서옥' 도면, 130년 만에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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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년, 임시정부 100년]

"피서옥은 독립정신의 산실… 미국의 독립과정서 영향 받아 독립신문·독립협회 설립도"

'알렌의 주선으로 O스트리트 1513번지 피서옥(皮瑞屋·피셔의 집)을 임대했다. 참찬관과 두 서기관을 보내 살펴보았더니 붉은색 벽돌로 새로 건축한 남향의 3층 집이어서 넉넉히 생활할 만하다고 한다.'

1888년 1월 미국 워싱턴 DC에 도착한 초대 주미(駐美)공사 박정양(1841~1905)은 공사관을 개설하고 본격적인 업무를 시작했다. 건물 이름은 피서옥. 참찬관 호러스 알렌의 지인 피셔(Fisher)가 소유했던 건물이라 이렇게 불렸다고 추정돼 왔다. 박정양 공사가 쓴 '미행일기(美行日記)'에 '매년 임대료를 은화 780원씩 주기로 약정했다'는 대목이 나오지만, 이름과 주소지 외엔 남아 있는 정보가 없었다.

최초의 주미공사관으로 사용됐던 '피서옥'의 실체가 130년 만에 공개됐다. 주미대한제국 공사관 복원 공사를 총괄한 김종헌 배재대 교수는 "공사관의 원도면을 찾는 과정에서 2015년 미국 메릴랜드주 국립문서보관소(NARA)에 보관된 피서옥의 인허가 서류와 도면을 찾았다"고 17일 밝혔다. 박정양 공사는 청의 압력으로 채 1년도 미국에 머물지 못하고 11월 소환됐고, 남은 공관원들은 1889년 2월 피서옥에서 두 블록가량 떨어진 로건 서클 15번지로 공사관을 옮긴다. 보수·복원 공사를 거쳐 지난해 5월 개관한 대한제국 공사관 건물은 두 번째 건물이다.

◇벽난로가 있는 응접실서 각국 관료 접견

서류에 따르면 피서옥은 1887년 4월 27일 인허가를 받았다. 4동이 함께 지어진 3층 벽돌 건물이다. 높이는 12.2m, 처마까지 높이가 8.84m인 경사 지붕을 갖고 있었다. 평면도를 보면 내부 공간 구조가 드러나 당시 공관원들의 생활상을 알 수 있다. 1층 현관을 지나면 긴 홀이 있고 그 옆에 벽난로가 있는 응접실이 있다. 김 교수는 "이 응접실이 박정양 공사 등이 미국을 비롯한 각국 관료, 외교관, 군인들을 접견했던 공식적 업무 공간"이라고 했다.

피서옥에서 실제 거주한 사람은 박정양 공사, 이상재 서기관 등 공사관원 5명을 포함해 12명. 김 교수는 "조선에서 파견된 외교관들이 벽난로가 있는 응접실에서 사람을 만나고, 주방에서 요리된 음식이 하인에게 전달돼 식당에서 식사하고, 계단을 통해 2~3층의 침실로 올라가 잠을 자는 등의 서양식 생활을 했음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고 말했다.

◇"피서옥은 독립 정신의 산실"

김 교수는 "피서옥은 박정양과 이상재가 적극 참여해 독립협회와 독립문, 독립신문을 만들게 된 독립 정신의 뿌리이자 산실"이라고 강조했다. 박정양은 피서옥에서 지낸 11개월 동안 미국 독립운동의 선구자인 조지 워싱턴 생가를 비롯해 워싱턴 기념탑, 알링턴 국립묘지를 돌아봤다. 그가 쓴 '미행일기'에는 워싱턴 기념탑을 방문한 후 "한 나라의 국민이 독립에 대한 공적을 잊지 않고 이를 새겨놓았다"고 적은 대목이 나온다(1888년 3월 2일).

박정양은 1896년 내부대신·총리대신 서리로 '독립신문' 창간과 독립협회 설립을 적극 지원했다. 중국 사신을 맞이했던 영은문(迎恩門)을 허물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운 것은 그가 직접 본 워싱턴 기념탑에서 영향받았다. 김 교수는 "불과 100여 년 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미국의 수도 워싱턴 피서옥에서 박정양은 독립(independence)의 개념을 정확히 인지했고, 미국의 독립 과정에서 깊이 영향받았다"며 "이를 조선의 시대적 상황에 맞는 국가적 개념의 '독립'으로 전환시키고자 한 것"이라고 했다. 중국 공사에게 알리지 않고 미국 대통령을 직접 만났다는 이유로 소환당하고, 끊임없이 중국 공사로부터 압박을 느끼면서 '독립'에 대한 가치를 누구보다 깊이 인식하게 됐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22일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열리는 '항일문화유산의 현황과 보존 활용 방안' 심포지엄에서 이 같은 내용을 발표할 예정이다. 그는 "피서옥이 있던 자리엔 지금 콘도미니엄형 아파트가 들어서 있어 아무런 흔적을 찾을 수 없다"며 "표지석이라도 세워서 의미를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허윤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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