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7.03 (수)

[세상 읽기] 대한민국 100년, 청산 없는 역사 / 김누리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겨레

김누리
중앙대 교수·독문학


2019년은 역사적인 해이다. 2·8독립선언, 3·1혁명, 상해임시정부 수립이 모두 100주년을 맞는다. ‘대한민국’이 자주독립운동의 불길을 타고 먼 타국에서 탄생한 지도 한 세기가 된 것이다.

대한민국이 거쳐온 지난 세기는 실로 참혹한 시대였다. 근대사의 온갖 모순과 갈등을 우리처럼 첨예하게 겪은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 식민지배, 냉전과 분단, 전쟁과 군사독재로 점철된 한국 현대사는 그대로 제국주의, 민족주의, 사회주의, 자본주의, 민주주의 등 근대의 모든 이념이 서로 부딪히고 뒤엉킨 역사의 현장이었다.

지난 100년의 한국 현대사를 돌아볼 때 가장 놀라운 점은 가혹한 역사가 빚어낸 수많은 비극에도 불구하고 과거가 제대로 청산된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대한민국처럼 과거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은 나라가 또 있을까? 일제 고등계 형사가 해방 이후에도 독립투사를 심문하는 나라, 일본군 장교가 해방된 나라의 대통령이 되고, 그것도 모자라 그 딸까지 대통령으로 삼는 나라, 파시스트 친일파가 만든 노래를 ‘애국가’라고 부르는 나라 ― 이것이 대한민국이다. 친일 과거청산과 관련해서 보면 해방 공간에서 친일파가 민족주의자를 제압한 ‘반민특위’ 무장해제가 역사의 향방을 가른 결정적인 분수령이었다.

문제는 친일의 과거만이 아니다. 양민학살의 과거, 군사독재의 과거, 사법살인의 과거, 고문범죄의 과거, 어용학문의 과거 ― 무엇 하나 제대로 청산된 적이 없다. 지금도 여전히 수많은 노덕술, 송요찬, 박정희, 양승태, 이근안, 갈봉근들이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청산되지 않은 과거는 한국 사회의 구석구석에 감돌고 있는 미묘한 악취의 진원이다. 특히 친일의 역사, 독재의 역사는 현재진행형이다. 당장 신문을 펼쳐보라. ‘위안부’ 피해자와 강제징용 배상 문제, 간첩조작 사건, 5·18 망언 등은 모두 청산되지 않은 과거에서 발산되는 일상화된 악취다.

과거청산은 사회개혁의 전제조건이다. 과거청산 없이는 사회개혁도 없다. 독일의 경우를 보라. 독일의 68혁명은 ‘과거청산 혁명’이었고, 이를 통해 독일은 ‘과거청산의 나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이것이 70년대 전면적인 사회개혁의 든든한 토대가 되었다. 우리의 경우 촛불혁명의 열기가 이리도 쉬이 사그라진 이유는 독일과는 달리 정치혁명이 과거청산 혁명으로 한발짝 더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과거청산은 또한 국가발전의 동력이기도 하다. 독일은 철저한 과거청산을 통해 국제적으로 도덕적 권위를 회복했고, 국내적으로 사회적 정의를 구현했다. 이것이 국가발전의 발판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에 반해 한국은 과거청산의 부재로 인해 국제적으로 도덕적 권위를 인정받기 어려웠고, 국내적으로는 냉소주의와 허무주의가 팽배한 나라가 되었다. 한국 사회를 휘감고 있는 거대한 무력감과 패배주의의 뿌리는 청산되지 않은 과거에 닿아 있다.

새로운 100년을 목전에 둔 대한민국의 최우선 과제는 청산되지 않은 과거가 뿜어내는 ‘백년 동안의 악취’를 걷어내는 일이다. 더 이상 과거청산을 유예할 수 없다. 법원, 검찰, 경찰, 국정원, 국회, 학교 등 사회의 각 영역에서 과거에 대한 단죄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냉철한 평가 작업은 이루어져야 한다.

과거를 둘러싼 투쟁은 미래를 향한 투쟁이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 한국 민주개혁 세력의 거듭된 실패는 바로 ‘과거 투쟁’ ‘역사 전쟁’을 방기한 데에 기인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네이버 메인에서 한겨레 받아보기]
[▶한겨레 정기구독] [▶영상 그 이상 ‘영상+’]

[ⓒ한겨레신문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