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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2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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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막다른 순간에 올려다보는 새벽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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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주기 맞아 소설집 2종 출간

이즈음은 사그라들었지만 1970년대 대기업들이 발간하기 시작한 사보 덕분에 문인들이 짧은 소설, ‘콩트’를 쓰는 일이 많았다. 기업들이 높은 원고료를 책정하면서 문인들의 쏠쏠한 부업거리로 각광받았다. 물론 짧은 소설이라고 결코 부업으로 치부할 만한 하급 장르는 아니다. ‘바늘구멍’을 통해 들여다보는 세상살이의 진면목을 전광석화처럼 잡아내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만만한 작업이 아니다.

세계일보

소설가 박완서(1931~2011) 8주기를 맞아 짧은 소설집 2종이 ‘작가정신’에서 나란히 출간됐다. 한 권은 박완서가 생전에 유일하게 남긴 짧은 소설집 ‘나의 아름다운 이웃’ 재간행판이고, 또 하나는 ‘인간사, 인생사의 복잡하고 오묘한 켯속을 명민한 눈길로 날카롭게 짚어내며 따뜻이 끌어안았던 박완서의 문학정신’(오정희)을 기리는 후배 작가 29인의 짧은 소설 모음집 ‘멜랑콜리 해피엔딩’이 그것이다.

1981년 ‘이민 가는 맷돌’이라는 제목으로 처음 나온 박완서의 ‘최초이자 유일한 콩트집’은 1995년 지금의 제목으로 바뀌어 다시 출간됐고, 이번에 표지를 바꾸어 세대가 교체된 독자들에게 다시 새롭게 선보였다. 주로 1970년대 풍경이 눅진하게 담긴 이야기들이 진설돼 있지만 지금 읽어도 시간의 흐름과 무관하게 흥미롭게 읽힌다. 시대가 흘러도 바뀌지 않는 남녀 간 애정과 결혼문제와, 많이 개선됐다고는 하나 여전히 투쟁 국면에 있는 한국 사회 여성들의 조건이 그러하다.

예컨대 ‘아직 끝나지 않은 음모3’에 등장하는 여성 ‘후남’이는 그 시절로서는 드물게 독립적으로 키워진 주체성 강한 여성이지만 남성 중심 사회 현실에서는 끝내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자신이 당한 설움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딸을 강하게 키웠음에도, 사내커플인 후남이가 회사를 그만둬야만 남편이 잘리지 않는 현실에서 딸의 사직을 눈물을 머금고 강요하는 형국이다. 후남이는 어머니의 ‘배신’에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지고, 남편과 함께 갔던 스카이라운지에서 홀로 고배를 마시며 ‘칼’을 벼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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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박완서 후배작가들은 “부끄러움을 깨닫게 해주는 거울이자 등대”라고 그를 기렸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박완서는 초판본 서문에서 “콩트 쓰는 맛을 방 안에 들어앉아 창호지에 바늘구멍을 내고 바깥세상을 엿보는 재미로 비유한 바가 있다”면서 “바늘구멍으로 내다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멀리, 적어도 이삼십년은 앞을 내다보았다고 으스대고 싶은 치기”를 고백했다. 이번 재간행본에는 딸 호원숙씨가 서문을 붙여 “낭만적 사랑의 꿈을 버리지 않으셨던, 그러나 ‘너의 삶의 주인은 너’라고 끊임없이 일깨워주는 어머니”를 기렸다.

후배 작가들의 헌정 소설들은 이즈음 사람들의 다양한 관계와 삶의 진실에 포커스를 맞춰 새롭게 전개된다. 권지예는 망령 난 어머니가 생전에 안아달라고 할 때마다 거부했던 아픈 기억을 달래기 위해 양로원 앞에서 프리허그를 하는 딸을 ‘안아줘’에 그렸다. 백가흠은 다문화시대 소통의 어려움을 넘어서 인간들의 근본적인 고독을 짧게 변주한 ‘오마르입니다’를 기고했다. 백수린은 ‘언제나 해피엔딩’에서 영화관 아르바이트를 했던 ‘민주’의 기억을 더듬는다. 영화가 끝나면 문을 열고 손님을 안내해야 하니까 늘 모든 영화의 결말을 미리 볼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한마디는 ‘짧은 소설’의 결코 짧지 않은 여운을 상징적으로 대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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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이 어떻든, 누군가 함부로 버리고 간 팝콘을 치우고 나면, 언제나 영화가 다시 시작한다는 것만 깨달으면 그 다음엔 다 괜찮아져요.”

이번 박완서 오마주 소설집에는 이밖에도 강화길 김사과 김성중 김숨 김종광 박민정 백민석 손보미 오한기 윤고은 윤이형 이기호 이장욱 임현 전성태 정세랑 정용준 정지돈 조경란 조남주 조해진 천운영 최수철 한유주 한창훈 함정임 등이 참여했다. 서두에 붙인 헌사에서 이들은 “여성에게 삶의 매 순간이 투쟁임을, 문학이 순응이나 타협이 아니라 격렬한 싸움임을, 평생 온몸으로 체현하며 살았던 사람”(윤이형), “한국어로 소설을 읽는 사람이 남아 있는 한, 언제까지고 읽힐 것”(정세랑), “막다른 순간에 올려다보는 새벽별이고, 부끄러움을 깨닫게 해주는 거울이고, 방향을 반듯하게 인도해주는 등대”(함정임)라고 선배 작가를 기렸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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