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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1919 한겨레] 일본 하층민에게 조선은 기회의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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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40년만에 6천배 늘어 30만명 거주

일본 지배층 아닌 상업 노동 종사자들 다수



한겨레



<편집자주>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입니다. 역사적인 해를 맞아 <한겨레>는 독자 여러분을 100년 전인 기미년(1919)의 오늘로 초대하려 합니다. 살아숨쉬는 독립운동가, 우리를 닮은 장삼이사들을 함께 만나고 오늘의 역사를 닮은 어제의 역사를 함께 써나가려 합니다. <한겨레>와 함께 기미년 1919년으로 시간여행을 떠날 준비, 되셨습니까?



조선 땅에 살고 있는 일본인은 병자년(1876) 54명(남자 52명, 여자 2명)을 시작으로 을묘년(1915)엔 그 수가 30만3659명(남자 16만3012명, 여자 14만647명)까지 늘었다. 40년 사이에 6천배 가까이 늘어난 재조일본인들은 지배자로 군림하면서 피지배자인 조선인들과 다른 자신들만의 거류지를 형성해오고 있다.

식민지의 도시 경성에선 일본인과 조선인의 거주지역이 청계천을 경계로 남과 북으로 나뉘었다. 조선인 거주지는 북촌, 일본인 거류지는 남촌이라 불렸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이 이뤄지면서 동리 이름이 조선식인 ‘동’(洞)과 일본식인 ‘정’(町) 두 가지로 나뉘는데, 이에 따라 조선인들은 주로 ‘동’에서 거주하고 일본인들은 ‘정’에서 터 잡게 되었다.

거주지뿐만 아니라 상가나 유흥시설도 이중 구조를 보이게 되었다. 조선인 번화가는 북쪽의 종로인 반면, 일본인 번화가는 남쪽의 본정(本町, 충무로)·황금정(黃金町, 을지로)·명치정(明治町, 명동)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활동사진관부터 유곽에 이르기까지 일본인을 상대로 하는 곳과 조선인을 상대로 하는 곳은 별도의 지역에 세워졌다. 조선극장·단성사·우미관이 조선인 대상이었다면, 희락관·대정관·황금관·중앙관은 일본인 대상이었다. 유곽은 총독 관저가 있었던 용산에 집중되어 있었다.

지역이 나뉘어 있었지만 문화나 생활양식에서 일본인이 처음부터 압도적 우위에 있던 것은 아니었다. 이는 조선에 살던 일본인 상당수가 경찰과 군인 같은 지도층보다는 일본에서 상업과 노동 일에 종사했던 하층민이었다는 점과도 관련이 있다.

원래 경성부의 일본인 거류지는 일본공사관이 자리한 남촌의 왜성대(倭城臺, 중구 예장동)를 중심으로 형성돼왔다. 이 지역은 진고개(진흙투성이의 언덕)라고 불리던 변두리 마을로 조선인 거주지보다 오히려 열악한 환경이었다. 한성의 기존 노른자땅은 이미 양반세력이 차지한데다 일본의 위세가 청나라에 미치지 못한 점 등이 초기 이주지역을 결정짓는 한 요인이었으나, 더 주요한 원인은 이주 1세대가 일본 내 주류세력이 아닌 점에서도 찾을 수 있다. 조선은 일본 내에서 자기 기반을 잡지 못한 이들에게 ‘기회의 땅’이었던 셈이다.



△참고문헌

-하시야 히로시 지음, 김제정 옮김,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도시를 건설하다>(모티브북·2004)

-이동훈, ‘‘재조일본인’ 사회의 형성에 관한 고찰’(일본연구·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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