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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도 조국 찾겠다” 연해주에 묻힌 영웅들의 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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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3·1운동 100년, 2020 동아일보 100년]

항일투쟁의 현장 러시아 연해주를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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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러시아 당국의 명령에 의해 라게르산의 비탈진 달동네로 한인들이 쫓겨나면서 신한촌이 조성됐다. 당시 흔적은 사라졌고, 지금은 신한촌 기념탑만이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기념탑 주변을 둘러싼 철제 울타리에는 후손들이 묶어놓은 태극기와 “당신들을 잊지 않겠습니다” “기억하겠습니다”라고 적힌 천띠가 걸려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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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영웅의 흔적은 쓸쓸했다. 묵묵히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그의 일생이 일제에 의해 순국한 마지막 장소에서도 고스란히 묻어났다.

최근 찾은 러시아 연해주(프리모르스키) 우수리스크시 북쪽 외곽 소비에트스카야 언덕. 이곳은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1858∼1920)이 1920년 4월 일제의 총칼에 목숨을 잃은 곳이다. 당시 일제는 러시아 적군(赤軍)에게 연해주 지역 일본인들이 목숨을 잃자 이에 대한 분풀이로 무고한 한국인 수백 명을 학살하는 ‘4월 참변’을 일으켰다. 하지만 당시 잔혹했던 역사를 알려주는 기념비나 안내판은 찾아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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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형은 ‘연해주 독립운동가 중에서 최재형의 지원을 받지 않은 이가 없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평생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최재형이 순국한 우수리스크시 외곽 소비에트스카야 언덕에서 소강석 한민족평화나눔재단 이사장(오른쪽)과 고려인들이 함께 아리랑을 부르며 그를 추모하고 있다. 우수리스크=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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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최재형이 마지막까지 조국 독립에 헌신한 이곳에서 소강석 한민족평화나눔재단 이사장(새에덴교회 담임목사)이 하모니카 연주를 시작하자, 함께 자리했던 고려인 최 나젤르다 씨(84)가 정확한 한국어 발음으로 아리랑 한 곡조를 읊었다. 찬 빗줄기가 내리던 이날 최재형을 향한 후손들의 작은 묵념이었다.

동아일보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최근 한민족평화나눔재단과 함께 고난한 독립투쟁의 흔적이 남아 있는 러시아 연해주, 중국 동북3성의 항일 유적지를 찾았다.

● 독립 영웅들의 발자취

최재형은 항일 독립운동사에서 독특한 이력을 가진 인물이다. 함경도 경원에서 노비로 태어난 그는 아홉 살이 되던 해 국경을 넘어 연해주에 둥지를 틀었다. 이후 러시아 군대를 상대로 군수물품을 납품하며 연해주 최대의 한인 거부(巨富)로 거듭났다.

그가 추구한 삶은 단순한 경제적 윤택함이 아니었다. 최재형은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에 임명되는 등 그가 모은 재산을 독립자금으로 내놓았다. 재정적 지원뿐 아니라 구국운동단체 동의회(同義會)와 권업회(勸業會) 창립, 대동공보 발간 등 연해주의 독립운동 막후에는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특히 안중근 의사는 1909년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기 위해 하얼빈으로 떠나기 전까지 최재형의 집에 머무르며 거사를 준비했다.

우수리스크 시내에는 최재형의 발자취가 일부 남아 있다. 볼로다르스카야 거리 38번지는 최재형이 마지막까지 거주한 곳이다. 한때 러시아인 소유로 넘어갔지만, 최근 재외동포재단 지원으로 고려인민족문화자치회가 구입해 ‘최재형 기념관’으로 재단장하고 있다.

최재형은 1962년 한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하지만 냉전시기 사회주의 계열이라는 평가 탓에 본격적인 연구가 부족했다. 1937년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하며 연해주 독립운동 자료가 체계적으로 보존되기 힘들었던 측면도 있다.

우수리스크 미르교회에서 만난 고려인 홍 안톤 이바노비치 씨(82)는 “1937년 강제 이주하는 기차 안에서 태어난 저를 포함해 대부분 고려인이 연해주 독립운동사에 대해 배울 기회가 없었다”며 “러시아에 머물고 있는 독립운동가 후손들에게 한국어와 한국사 교육을 지원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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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형이 마지막까지 거주한 곳. 이곳은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최재형 기념관’으로 거듭날 예정이다. 우수리스크=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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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뿌리

쑤이펀(라즈돌나야)강은 우수리스크에서 유일하게 동해로 흘러가는 하천이다. 독립운동가 이상설(1870∼1917)은 “내 몸과 유품, 유고는 모두 불태워 쑤이펀 강물에 흘려보내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유언을 남겨 이 강물에 뿌려졌다. 죽어서라도 조국을 찾고 싶었던 그의 뜻을 기리기 위해 강변에는 이상설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2001년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이 세운 것이다.

이상설은 1907년 헤이그 특사 활동이 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임시정부보다 앞선 최초의 망명정부 대한광복군 정부를 만들고, 초대 대통령에 오르는 등 연해주 지역 독립운동의 핵심 인물이었다.

이처럼 연해주는 우리 민족의 항일 투쟁사가 오롯이 배어 있는 땅이다. 1863년 함경도 농민 13가구가 처음 이주한 뒤 한때는 한인만 20만여 명에 이르렀다. 블라디보스토크시 외곽 라게르산에 위치했던 ‘신한촌(新韓村)’에는 1만여 명의 선조가 거주했다. 이곳에서 1919년 3월 결성된 대한민국민의회는 그해 4월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흡수·개편되면서 임정의 한 축을 이뤘다.

갖은 고난과 핍박을 견뎌낸 신한촌이지만 지금은 모든 흔적이 사라졌다. ‘신한촌 기념탑’만이 당대의 역사를 품고 홀로 서 있다.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 60주년과 3·1운동 80주년을 기리기 위해 1999년 세워진 이 기념탑은 3.5m 크기의 기둥 3개와 8개의 돌로 구성돼 있다. 돌기둥 3개는 남·북한과 해외 동포를 상징하고, 돌 8개는 조선8도를 뜻한다.

소강석 이사장은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연해주는 해외 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한 곳”이라며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은 올해 후손들이 이곳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우수리스크·블라디보스토크=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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