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 교수의 의학 세계사/서민 지음/416쪽·1만7000원·생각정원
르네상스를 일으킨 원동력은 다름 아닌 ‘병(病)’이었다. 14세기 중반 유럽 인구의 3분의 1가량을 죽게 만든 흑사병이 그 주인공이다. 르네상스 이전까지 중세 유럽은 1000여 년간 신(神)의 지배 아래 놓여 있었다. 의학 역시 약초(허브) 등을 이용해 내과 치료를 하는 가톨릭 사제들이 의사보다도 더 신임을 받던 시절이다.
흑사병이 유행하자 사람들은 사제의 조언대로 신에게 빌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심지어 일반인의 사망률이 약 30%였지만 사제의 사망률은 42∼45%에 이르렀다. 교회가 치료는커녕 사제가 먼저 죽어가는 현실을 보며 대중은 교회와 신에 대한 믿음을 거두기 시작했다.
신권이 하락하는 것과 달리 왕권은 강화됐다. 흑사병 대유행을 끝낸 것은 간절한 기도가 아닌 국가가 만들기 시작한 위생과 검역 절차였다. 15세기에 들어서면서 유럽 각국은 방역 시스템과 여행증명서를 발급했다. 현재까지도 전 세계 모든 공항과 항만에서 이뤄지는 검역은 흑사병 유행이 시초가 된 셈이다.
이처럼 의학의 발전으로 달라진 세계사의 결정적 장면들이 생생하게 담겼다. 단국대 의대 교수이자 재치 있는 대중 강연으로 잘 알려진 저자의 경험 덕분에 의학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인들도 술술 읽을 수 있는 게 가장 큰 장점이다.
저자는 실험실 속 천재적인 과학자의 노력보다 서로 다른 문명의 만남이나 사회의 급격한 변동이 의학 발전의 가장 큰 원동력이라고 강조한다. 고대 그리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비롯해 끊임없는 갈등과 충돌로 사람과 사회, 지식까지 교차할 수 있었다. 덕분에 히포크라테스처럼 서양 의학의 기초를 닦은 인물들을 배출할 수 있었다.
최근 인공지능(AI) 등 첨단 의료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면서 의사라는 직업이 사라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그러나 치료는 단순한 약물 투여와 수술에 그치지 않는다. 플라세보 효과처럼 의사와 환자의 공감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치유는 AI가 대신할 수 없는 의료의 핵심이라고 강조한다.
“의학의 역사를 모르는 민족에게 건강은 없다”는 저자의 재치 있는 말처럼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 온 의학자들의 치열한 분투가 흥미롭게 펼쳐진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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