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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9 (금)

이슈 '미투' 운동과 사회 이슈

미투 피해자 돕는 피해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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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일러스트 이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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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주씨는 직장 내 성폭력 피해자이면서 다른 피해자들의 조력자다. 그는 2016년 5월 전남 CBS에 PD로 입사했다. 그 전에는 기자였다. 수습 기간 내내 그는 일상적인 성희롱에 시달렸다. 윤모 당시 보도국장은 강씨를 바라보며 “피아노 치는 여자들은 엉덩이가 크다. 조심해야겠지?”라고 말했고 “내 성기에 뭐가 났다”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강씨는 성희롱을 성희롱으로 여기지 않는 분위기가 불편했다. 하지만 회사에 문제를 제기할 때마다 돌아오는 답은 “분위기 못맞춘다” “예민하다” 등이었다. 수습기간이 끝나자 회사는 해고로 답했다. 전남지방노동위원회가 부당해고로 판단해 강씨는 복직할 수 있었다. 그러자 회사는 ‘연봉계약서’를 들이밀며 계약기간이 끝났다며 강씨를 다시 해고했다.

■언론 믿지 못하고 망설이는 피해자

“그래도 선배는 상위 1%예요.” 전남 CBS의 성폭력 피해자는 강씨만이 아니다. 업무국장으로부터 추행을 당한 후배가 강씨에게 한 말이다. 업무국장은 노래방에서 후배의 입술에 뽀뽀를 하고 팔을 두 차례 쓰다듬었다. 후배는 곧장 문제를 제기하고 사과 받았다. 하지만 계약기간이 끝나자 후배는 회사를 나갈 수밖에 없었고 회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잘 굴러갔다.

미투 국면에서 강씨 사례는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전직 기자이자 PD라는 이유가 컸다. 그때마다 강씨는 후배 사건도 같이 다뤄달라고 언급했다. 하지만 후배 사건은 외면받는 경우가 더 많았다. 강씨는 “내가 두 번째 해고를 당했을 때보다 후배 사건이 외면받을 때 더 가슴 아팠다. 후배가 해고됐을 때 가장 많이 울었다”고 말했다. 현재 그는 후배의 서면을 함께 작성하고 있다.

사회 곳곳에서 미투가 터져나오면서 자연스레 다른 피해자들을 만나게 됐다. 후배가 왜 자신을 상위 1%라고 했는지 알게 됐다. 기자와 PD를 했던 강씨 입장에서 다른 피해자들의 대응을 들어보니 부족한 점이 보였다. 언론이 관심을 갖고 싶어도 사건 자체가 정리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강씨는 피해자들에게 가장 기본이 되는 ‘사건 일지’부터 만들게 했다.

언론과 피해자의 중간다리 역할도 자처했다. 언론사에서 연락이 오면 그에 맞는 피해사례를 구해줬다. 언론을 믿지 못하고 무서워하는 피해자 설득도 강씨 몫이었다. 그는 “나는 기자였고 PD이고 가족 중에 법조인이 있어 사건 진행에 도움이 됐다. 이런 환경은 사건을 해결하고자 하는 내 노력과는 무관하게 주어진 것이다. 그런데도 싸워나가는 게 너무 힘들었다”며 조력자로 나선 배경을 설명했다.

그는 국가인권위원회 결정문이 나오는 대로 회사로 돌아갈 예정이다. 그는 미투 이후 최근 1년에 대해 “살면서 이렇게 심도 깊게 사고해본 시간이 없었다”며 “직장 내 성폭력 사건과 관련해 좋은 선례가 별로 없다. 내가 좋은 선례가 되고 다른 피해자들이 좋은 선례로 남으면 서로는 물론이고 이후의 피해자들에게 도움이 된다. 그렇게 조금씩 변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내가 받은 도움, 갚고 싶어서…”

송보경씨도 성폭력 피해자이면서 조력자다. 문화예술계에 몸담고 있는 가해자는 언어적 성희롱에 이어 송씨의 팔꿈치를 눌러 제압한 다음 추행했다. 당시 송씨는 막 사진작업을 시작하려는 학생이었다. 몇 년이 지나 송씨가 SNS에 자신의 피해사실을 알리자 가해자는 전화로 “당시의 일을 사과한다”고 말했다. 송씨는 해당 통화 내용을 근거로 가해자를 고소했다.

가해자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는 사과까지 했음에도 “누가 시켜서 한 사과”라며 송씨를 허위사실 유포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한 개인이 성폭력사건을 알리고 이후 법적대응까지 떠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럴 때 조력자가 큰 도움이 된다. 송씨도 그랬다. 그는 “정신적으로 힘들어서 사건 대응을 못하고 있을 때 도움을 많이 받았다. 언젠가 갚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던 중 한국여성인권진흥원 ‘피해자 집중지원팀’ 채용공고를 봤다. 송씨가 개인적으로 피해자들에게 조력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전에는 개인의 역량으로 어디까지 도울 수 있는지 몰랐고, 피해자의 요청을 들어주지 못하면 모두 자신의 탓인 것 같아 힘들었다. 우리 사회는 성폭력 피해자에게 어떤 실질적인 도움이 필요한지 가르쳐준 적이 없다. 피해자도, 조력자도 개인의 경험과 판단에 근거해 사건을 진행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가 속한 집중지원팀은 피해자들의 신고부터 법률지원, 의료지원, 피해자 자조모임 등을 지원하고 있다. 자조모임은 피해자들끼리의 네트워크 형성을 위한 것이다. 건강상태가 좋지 않은 피해자 공판에 동행하기도 했다. 송씨는 수차례 자살을 암시했던 피해자와의 끈을 놓지 않으려 무던히 애썼다. 다행히 지금 피해자는 ‘동굴’ 밖으로 나왔다. 이럴 때 보람을 느낀다.

자신이 성폭력 피해자이기 때문에 더 조력을 잘할 수 있는 것인지에는 확신이 없다. 다만 “선생님은 제가 얼마나 고통받는지 모른다. 저는 고립되어 있다”고 말하는 피해자 때문에 낙담하진 않는다. 대신 “나도 고립돼 있었고 나를 도와주는 모든 사람들에게 빚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러지 않아도 된다. 힘들 때는 도움을 명확하게 받는 게 더 좋다”고 말한다. 이런 말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피해자들에게 도움이 된다.

그가 속한 집중지원팀은 올해 말까지만 운영된다. 보통 성폭력사건이 짧게는 1~2년, 법정으로 가게 되면 길게는 5년 가량 이어진다는 점에서 팀 운영기간은 지나치게 짧다. 사업이 끝나도 피해자들을 조력할 생각이냐는 질문에 송씨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많은 피해자들이 부채감과 책임감으로 서로를 돕고 있다. 하지만 피해자도 피해경험 이후의 삶을 모색해야 한다. 내게 고마워하며 ‘보경님처럼 저도 회복 이후에는 피해자들을 지원하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피해자들을 만나고 나면 마음이 복잡하다. 미투가 시작된 지 1년이 되어간다. 이제는 국가와 사회의 몫이 되어야 한다.”

이하늬 기자 han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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