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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8 (화)

SF·판타지문학 거장 켄 리우 "인간은 이야기로 세계를 이해하는 종(種)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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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켄 리우. [사진제공 = 리자 탕 리우]


보스턴발 답변서가 서울에 도착한 지난 17일, 소설집 '종이 동물원'(황금가지 펴냄)의 포털 사이트 리뷰는 42건이었다. 평점은 대다수가 별 10개 만점. "단편이지만 장편보다 생각하는 시간이 훨씬 길었다"거나 "환상문학계를 휩쓴 저력이 어떻게 다져졌는지 알겠다"란 상찬이 빼곡했다. 상상을 덧댄 서사로 독자를 문학의 문으로 이끄는 책이다. 켄 리우(42)를 이메일로 만났다.

소설 열네 편을 꿰맨 '종이 동물원'은 표제작부터 범상치 않다. 주인공인 잭의 어머니는 다문화 여성으로, 그녀는 마술적 특기를 가졌다. 종이로 접어 만든 동물에 숨을 불어넣으면 종이는 생물로 변했다. 종이 호랑이를 잭은 특히 아꼈다. 암(癌)으로 모친이 떠난 자리에 그 호랑이가 등장하고, 호랑이 내부엔 어머니 편지가 적혀 있다. 환상성과 문학성을 동시에 추구한 이 소설로 켄 리우는 2012년 세계적 권위의 휴고상, 네뷸러상, 세계환상문학상을 싹쓸이했다. 소설에 자전적 요소는 없을까.

"실제 삶과 겹치는 부분은 없어요. 저는 제 삶을 중계하기보다 제가 깨달은 진실을 환기시키는 이야기를 쓰는 데 집중합니다. 다만 할머니는 종이 접기의 달인이셨죠. 종이 동물이 생명을 얻어 움직이는 장면은 어린 시절의 환상을 토대로 썼습니다. 할머니의 사랑과 지혜를 기리는 제 나름의 방식입니다."

중국에서 태어나 11세에 도미한 리우는 중국계 미국인이다. 하버드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뒤 로스쿨을 졸업했다. 마이크로소프트에서 프로그래머로 일했고, 7년간 로펌 변호사로 일하다가 지금은 법률 컨설턴트와 소설가를 겸해 두 생을 산다.

"프로그래머, 변호사, 작가라는 직업은 제게 근원적인 행위의 변주(variations)에 지나지 않아요. 가상을 조합해 특정한 결과를 얻는 건 모두 똑같습니다. 하지만 글쓰기는 유별난 구석이 있죠. 기호를 조합해 만든 인공물이란 점은 같지만 궁극적인 힘은 감정과 공감이니까요. 그것은 인간으로서 우리가 누리는 경험의 기반이며, 저는 인간의 기반을 구현하는 게 즐겁습니다."

동심의 빛과 이주라는 어둠이 리우 소설에 공존한다. 표제작에서 이주 여성을 향한 오리엔탈리즘을 꼬집었다면 일본 731부대, 제주 4·3사건, 대만 2·28 사건, 문화대혁명 등 현대사를 아우른다.

"우리는 타 문화권 역사를 사소하게 치부하는 경향이 있어요. 세계사가 유럽사이자 서양의 식민지배사인 양 말이죠. 세계는 지난날의 참상과 불의가 낳은 결과물입니다. 인류의 일원으로서 우리가 물려받은 세계가 어쩌다 이런 모습이 됐는지, 모두를 포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울 의무가 있지 않을까요."

이쯤에서 그에게 문학의 본질, 나아가 이야기(story)라는 장르의 궁극적 역할을 물었다. "우리 인간은 이야기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도록 설계된 종(種)"이란 통찰을 내비친 리우는 "어떤 진실은 오로지 이야기를 통해 이해할 수 있을 뿐 데이터를 통해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처럼 까다로운 진실이 담긴 이야기를 가리켜 문학이라고 한다"며 명징한 소설관을 내비쳤다.

문학이란 장르에 참여하는 독자의 역할을 묻자 "독자는 작가만큼이나 많은 수고를 기울여야 한다. 이야기가 빚어낸 세계는 오로지 이러한 협업을 통해서만 생명을 얻는다. 책을 읽을 때 우리는 조물주가 되어 달라는 초대장을 받는다. 작가와 힘을 합쳐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독서의 즐거움"이라고 리우는 덧붙였다.

한국어판 표지에 나오는 호랑이 모형은 종이접기 대가 장용익 작가의 작품이다. "친절한 한국 독자가 책 표지 사진을 보여줬다. 아주 마음에 쏙 든다"며 만족감을 드러낸 리우는 "내 글쓰기의 본질은 은유적인 것을 선명하고 직접적인 것으로 변신시키는 일이다. 그것은 평평한 종이를 접고 포개고 끼우고 말아서 멋진 형상을 만드는 일과 같다"고 말했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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