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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7 (월)

[이상언의 시선] 경찰을 둘로 쪼개는 진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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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힘 빼기’ 라고 하지만 수사 등 핵심은 그대로

수사권 조정 명분 얻으려는 꼼수의 ‘무늬만 자치’

중앙일보

이상언 논설위원


‘자치경찰제’는 우리 국민에게 생소하다. 눈으로 직접 본 적이 없다. 제주도에 시범적으로 도입됐지만 도 전체 경찰 인력의 8%만 활용하는 약식형이라 주민조차 변화를 거의 느끼지 못한다. 자치경찰에 대해 어렴풋하게라도 아는 방법의 하나는 영화나 드라마를 떠올리는 것이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일본 드라마 ‘춤추는 대수사선’에는 도쿄 외곽에서 사건이 발생하고 관할 경찰서에 경시청의 경찰관들이 들이닥쳐 수사본부를 차리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지방 경찰인 경찰서는 방범·교통 등 ‘민생 업무’를 맡고, 주요 수사는 국가 경찰 기능을 겸비한 도쿄 경시청이 맡는 일본 경찰 구조가 드러난다. 드라마는 수사에서 배제된 경찰서 직원이 사건 현장에서 단서를 찾는,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해 국가 경찰의 코를 납작하게 하는 영웅담으로 전개된다.

미국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단면을 볼 수 있다. 뉴욕 경찰(NYPD)이 분주히 오가는 사건 현장에 검은색 밴이 나타나면 그 뒤는 십중팔구 차에서 내린 사람이 “FBI다. 이 사건은 이제 우리가 맡는다”고 폼 잡으며 말하는 장면이다. FBI(연방수사국)는 국가 경찰이고, NYPD는 뉴욕시 예산으로 운영되는 지방 경찰이다.

우리나라에도 곧 자치경찰제가 전면적으로 실시된다. 대통령 직속 위원회가 13일 기본 방안을 내놨다. 서울·제주·세종 등 5개(2개는 추후 선정) 지역에서 우선 실시하고 이후 전국으로 확대한다는 내용이다. 이 안에 따르면 해당 지역 시·군·구에 자치경찰대가 생기고, 지구대·파출소가 그곳에 속하게 된다. 자치경찰대는 교통, 지역 경비, 가정 폭력 등의 생활 안전 분야를 담당한다. 정보·외사·수사와 관련된 기능은 지금처럼 각 경찰서를 중심으로 국가 경찰이 맡는다. 지방경찰청과 경찰서가 국가 경찰 영역에 남는 것이 외국 제도와는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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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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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왜 하느냐다. 우선은 대통령 공약 사항이다. ‘권력기관 개혁’이라는 제목하에 공약집에 들어있다. 경찰이 과도한 권력을 갖는 것, 권력자를 위해 권한을 남용하는 것을 막자는 취지다. 한마디로 ‘경찰 힘 빼기’이다. 추진 중인 수사권 재조정이 실제로 이뤄지면 경찰이 더 큰 권한을 갖게 되니 힘의 분산이 필요하다는 게 정부 공식 입장이다.

경찰이 정말 힘센 조직인가. 경찰이 힘센 게 나쁜 일인가. 답이 쉽지 않은 질문이다. 경찰은 둘 다 아니라고 한다. 집권 세력부터 주취 폭력자까지 모두 경찰을 ‘핫바지’로 안다고 항변한다. 그렇지만 경찰이 우리 사회를 들었다 놨다 할 때가 있다.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이나 ‘드루킹 사건’처럼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건을 맡았을 때다. 정말 경찰 힘을 빼는 게 목적이라면 정보·수사에 손을 대야 한다. 현재의 자치경찰제 방안이 그대로 실행되면 청와대가 고위 경찰 간부 인사권을 그대로 틀어쥐고, 국가 경찰이 정보·수사 등 주요 기능을 독점하는 현실은 하나도 변하지 않는다. 차·포는 그대로 두고 상이나 졸만 떼어내는 셈이다.

경찰 힘 빼기 다음의 자치경찰제 실시 명분은 ‘지역 실정에 맞는 치안’이다. 위원회 안에는 ‘주민 밀착 치안 활동력 증진’이라고 표현돼 있다. 자치경찰대가 관할 지역의 특성에 맞춰 주민들이 바라는 분야에 경찰력을 더 투입한다는 것이다. 지금도 경찰은 그렇게 하고 있다. 더 할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역 특수성을 무시한 치안이라며 불만을 제기하는 시민이 많지도 않다.

자치경찰제 도입의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 왜 하필 이런 형태로 하려 하는가, 이런 의문이 든다. 대검찰청 관계자는 “청와대가 수사권 조정과 자치경찰제 도입을 함께 하기로 약속했다. 그래서 자치경찰제는 피할 수 없는 일이 됐다. 대통령 직속 위원회가 당초에는 최소한 경찰서까지는 지방 경찰로 이관하는 방안을 검토했다. 그런데 청와대 측 의견이 반영돼 지구대·파출소만 넘기는 수준이 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청와대가 국가 경찰의 힘을 크게 줄이지는 않는 쪽으로 유도했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위원회에서 활동한 한 대학 교수는 “청와대와의 실무적 협의는 있었다. 그렇지만 그쪽이 특정 방향을 제시한 것은 아니다. 현실적 수용 가능성을 고려해 위원들이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축소된 안을 선택하게 됐다”고 말했다.

결국 이런 유추가 가능하다. 정부 기축 세력은 자치경찰제가 필요하다고 믿지만 수사 등의 핵심 기능까지 내주는 것은 원치 않는다. 그래도 수사권 조정이라는 대업을 이루기 위해 안 할 수는 없으니 경찰 말단 조직 3분의 1 정도를 지방에 넘기는 ‘무늬만 자치’를 실시한다. 경찰은 ‘두 개의 경찰’에 따른 혼란을 걱정하지만 수사권 확대 선물을 바라며 침묵한다. 거룩한 목적에 수단의 적절성과 일의 디테일이 희생되는 또 하나의 사례가 이렇게 추가된다.

이상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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