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미투 운동`을 촉발한 불특정 다수의 여성을 올해의 인물(Person of the Year)로 선정한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 표지. [김재훈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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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포터' 시리즈를 읽으면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악의 세력에 가담한 이들은 볼드모트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못한다. 그의 이름을 호명하던 해리는 온갖 시련을 극복하고 '이름을 부르지 못하는 자'를 무찌르며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옛사람들은 이름에 힘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설화 유형 중에도 주인공이 위협적인 이의 진짜 이름을 부름으로써 그를 물리치는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무언가를 정확하게 부르는 행위는 리베카 솔닛에 따르면 "무대책, 무관심, 망각을 눈감아주고, 완충해주고, 흐리게 하고, 가장하고, 회피하고, 심지어 장려하는 거짓말들을 끊어낸다."
'맨스플레인'이란 단어로 세계적 반향을 일으킨 리베카 솔닛의 따끈따끈한 신작이 나왔다. 올해 전미도서상 후보에 오른 이 책은 제목부터 의미심장하다. 솔닛에게 오늘의 미국은 '이름들의 전쟁'이 일어나는 땅이다. 명명은 해방의 첫 단계다. 설화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정치인들의 부정한 짓은 정확히 호명하는 행위만으로 종종 사임으로 이어지곤 했다.
'흑인으로 걷다' '가스라이팅' '적극적 동의'와 같은 지금은 널리 쓰이는 말들이 초기에는 극심한 공격을 받았다. 힘겨운 투쟁 끝에 이 말이 지닌 힘은 인종차별과 여성차별의 벽을 한꺼풀 걷어냈다. 약 1년 전 미국에서는 영화계 거물 하비 와인스틴이 저지른 성범죄가 폭로됐고, 미투 운동의 거센 물결이 뒤따랐다. 와인스틴의 성폭력과 같은 일이 누적되면 여성이 공적 영역에서 움직이고 말할 공간을 축소시키는 효과를 가져온다. 물리적 공격과 침묵 강요는 실상 같은 일이다.
따라서 페미니즘은 침묵을 애써 깨뜨려왔으며 지금도 깨뜨리는 일을 한다. 미투의 확산은 숱한 협박을 받은 여성들이 그들의 이름을 발언하는 용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이 상태를 비정상화하는 것, 이 상태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침묵을 깨뜨리는 것이다. 모두의 이야기가 들리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이 또한 이야기들의 전쟁이다."
이 책은 가장 많은 분량을 페미니즘의 결정적 순간으로서 지난 대선을 복기하는 데 할애한다. 힐러리 클린턴은 일반투표에서 300만표에 가까운 격차로 이겼다. 이는 미국 대선 역사상 어느 백인 남성 후보가 받은 표보다 많았다. 그럼에도 패배 원인을 진단할 때 언론의 분석은 한결같이 '백인 노동자 계층에 더 관심을 쏟았어야 했다'는 것이었음을 고발한다. 심지어 43%밖에 클린턴을 찍지 않은 백인 여성들에 대한 비난도 쏟아졌다. 솔닛은 이 프레임 또한 여성만이 페미니스트여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음을 꼬집는다.
전방위적 활동가인 저자는 미투 운동과 대선은 물론 기후변화, 국가폭력, 젠트리피케이션 등 다양한 주제의 글을 이 책에 담았다. 무엇보다 압권은 미국이 당면한 '언어의 위기'를 묘사하는 지점이다. 언어는 갈등이 없는 곳에서 갈등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솔닛은 지금 우리가 겪는 위기 중 하나가 '언어의 위기'라고 진단한다. 실리콘밸리는 공유경제, 파괴적 혁신, 개방성과 같은 그럴 듯한 말로 정체를 눈가림하고, 감시 자본주의라는 말로 반격한다는 것이다.
실리콘밸리가 만들어낸 갈등은 이뿐이 아니다. 2014년, 평생 살아온 동네에서 살해된 알렉스 니에토는 당시 28살이었다. 백인 거주지에 들어왔다는 이유로, 백인 남성들은 그를 침입자로 여겼다. 붉은 재킷만을 보고 갱단으로 여겨 신고를 한 것이다. 하지만 그 재킷은 지역 풋볼팀의 유니폼이었다. 보안요원으로 일했기에 갖고 있던 테이저건으로 자신을 위협하는 개를 겨눴다는 이유로 그는 신고를 당한 뒤, 경찰에게 무려 59발의 총을 맞았다.
테크 기업이 만들어낸 골드러시로 샌프란시스코는 원주민을 몰아내는 곳이 된 지 오래다. 실리콘밸리의 구글 직원 중 흑인은 2%, 라틴계는 3%에 불과할 정도다. 부유한 백인 남성의 도시가 된 뒤 청소년 노숙인센터는 문을 닫았고 비영리조직, 복지단체 종교센터도 밀려났다. 솔닛은 니에토의 장례식에 참여한 뒤, 자신의 도시를 갈라놓는 것은 서로 다른 두 시각의 갈등임을 깨달았다.
오르는 집값으로 이 도시는 집을 잃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냈다. 통계에 따르면 샌프란시스코의 노숙자 중 73%는 이 도시에 집이 있던 사람들이었다. 젠트리피케이션은 비백인 인구가 살던 동네에 새로운 백인을 유입시켰다. 이는 단지 공동체가 파괴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폭력으로까지 이어졌다. 니에토 사건이 공론화되고 재판이 열리면서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시위와 추모제가 열렸다. 퇴거의 물결 때문에 자신의 삶을 위협당하는 이들에게 상징적 존재가 된 것이다.
솔닛은 결과가 미약할지언정 포기하지 않고 행동하라고 강조한다. 송유관 건설을 반대하기 위해 역대 최대 규모로 북미 원주민이 집결한 노스다코타주의 스탠딩록 집회는 환경 파괴를 단지 미국에 알리는 데 그치지 않았다. 많은 퇴역 군인이 무릎을 꿇고 미군이 오랫동안 원주민 억압에 가담해온 일을 사과하게 만들었다. 그들에게 자부심을 느끼게 하고 연대와 연결의 힘을 확인시켜준 것이다.
그는 간접적 영향을 칭송한다. 1980년대 반핵운동과 2011년 월가 점거 운동도 그랬다. 독재와 파괴를 막아 세울 유일한 힘은 시민사회였다. 그리고 시민사회의 싸움은 시종일관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이다. 스스로 이야기를 짓고, 기억하고, 다시 들려주고, 기념하는 것.
인종과 남녀, 계급 등을 위시한 온갖 갈등이 용광로처럼 끓고 있는 제국의 민낯을 엿볼 수 있는 귀한 증언이 가득한 책이다. 유려하고도 강인한 문체로 시대의 초상을 그려내는 작가의 문장이 빛을 발한다. 솔닛은 말한다. "언어를 정확하고 조심스럽게 쓰는 것은 의미의 분열에 대항하는 방법이자 우리가 사랑하는 공동체를 격려하고 우리에게 희망과 전망을 불어넣는 대화를 독려하는 방법이다. 모든 것을 그 정확한 이름으로 부르는 일, 이것이 내가 이 책에서 하려고 애쓴 일이다."
[김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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