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지난 2월 헤어진 전 여자친구 집 보일러실 유리창을 깨고 침입해 3차례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A(29)씨도 1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죄질이 매우 불량하다"면서도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합의서를 제출한 점 등을 고려해 형을 정했다"고 했다.
#3. 지난해 6월 술을 마시다 시비가 붙어 친구를 시멘트 바닥에 밀쳐 숨지게 한 혐의로 기소된 B(56)씨는 1심에서 징역 2년을 받았으나, 항소심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으로 감형됐다. "B씨가 잘못을 깊이 반성하고 있고, 피해 유족과 원만히 합의한 점을 고려했다"는 게 재판부 판단이다.
사람을 죽여도, 성폭행을 해도, 교통사고로 중상해를 입혀도 피의자와 피해자 간 합의는 참작된다. 대부분 감형요소로 작용해 처벌수위를 낮춘다. 과연 합의가 형벌을 결정하는데 영향을 미치는 것이 맞느냐는 의문이 끊이질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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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도 많고 말도 많지만…"합의는 필요한 제도"
흔히 ‘합의했다’는 말은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법원은 형량을 판단할 때 ‘처벌불원’을 중요한 요소로 고려한다.
하지만 개인과 개인 간의 합의가 사회질서 유지 등 국가적 차원에서 내리는 형벌에 반영되는 것이 적절한지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합의는 대부분 돈이 오간다. 때문에 ‘유전무죄 무전유죄’ 시비도 일어난다.
지적장애 어머니가 가장인 다섯 식구를 노예처럼 부린 ‘강릉 노예사건’의 피의자 최모씨 측은 "피해자와 합의했다"며 감형을 주장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지난 11일 "미성년자의 합의가 얼마나 진심에 의한 것인지 모르겠다"며 검찰 구형 7년보다 더 높은 징역 8년8개월을 선고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이례적’이다.
그럼에도, 법조계는 "합의제도의 존속 이유가 있다"는 입장이다. 서울고법의 한 판사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피해자에게 보상하려고 노력하는 이와 그렇지 않은 이를 똑같이 볼 수는 없다"며 "형벌은 범죄자에게 책임을 묻고, 범죄를 예방한다는 목적도 있지만, 범죄로 인해 발생한 피해를 실질적으로 회복하는 것도 형벌의 또다른 지향점"이라고 했다.
고법 부장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가해자가 반성하고 용서를 구하려는 태도는 피해자 입장에서 도움이 되는 행동"이라며 "법원은 돈을 줬다는 결과물만 놓고 따지는 게 아니라 진지한 반성이 있는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다"고 말했다.
형사 절차상 이뤄진 합의는 피해자들이 현실적으로 민사상 겪은 어려움을 해결해준다는 장점도 있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형사 사건이 마무리되고 피해 보상을 받기 위한 민사 사건을 진행하면 길게는 2~3년이 훌쩍 지나가 버린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는 또다시 2차 피해를 받을 수 있고, 고통을 계속 안고 살아야 한다"며 "이런 문제를 다소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이 합의다"라고 말했다.
◇"합의 때문이라는 주장은 무리"… 형량 자체가 낮아
‘합의’가 문제가 아니라 ‘낮은 양형 기준’이 더 근본적 원인이라는 지적도 있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살인죄의 경우 아무리 합의를 하고 용서를 받아도 징역 20년을 훌쩍 넘기는 판결도 많다"며 "일률적으로 합의 때문에 처벌 수위가 낮다고 평가하는 것은 무리"라고 했다.
예컨대 여자친구를 때려 숨지게 한 혐의는 상해치사죄가 적용된다. 형법은 상해치사죄의 법정형을 징역 3~30년 범위에서 선고하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양형기준’은 징역 3~5년을 선고하도록 제시하고 있다. 국민 기대치에 비해 높지 않은 것이다.
여기서 피의자와 관련해서 선처할 요소가 있으면 이를 반영해야 한다. 이씨 사건은 ‘처벌불원’이 인정됐다. 상해치사죄에서 처벌불원이 인정되면 권고형의 범위가 최대 5년에서 4년으로 줄어든다. 이에 따라 1심은 이씨에게 징역 3년에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같은 이유로 2심도 "생명을 침해한 것은 어떠한 방법으로도 피해를 회복할 수 없는 중대한 범죄"라면서도 징역 2년만 선고했다. 전 여자친구 집에 침입해 강간을 저지른 사건도 양형기준은 기본 징역 5~8년을 제시하고 있고, 처벌불원이 감안되면 징역 3~5년6개월을 선고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서울고법의 한 판사는 "요즘 분위기에 비춰 법원이 상해치사죄에 집행유예를 선고한 것이 이례적"이라며 "판사들도 국민들의 법감정을 의식해 과거보다 집행유예 관련해서는 더욱 신중하게 판단하고 있다"고 말했다.
◇"용서 없이 돈만 주면?"…합의 진정성 문제는 해결해야 할 과제
피해자가 합의를 거부하는데도 법원에 돈을 맡겨놓는 ‘공탁’을 ‘처벌불원’ 요소로 인정해주는 것도 시비거리다. 양형기준은 범죄에 따라 ‘상당금액을 공탁’한 경우 처벌불원으로 인정하고 있다.
지난 5월 며느리를 2년 가까이 상습 성폭행한 혐의를 받는 70대 노인이 공탁금 때문에 감형돼 논란이 일었다. 1심은 죄질이 나쁘고, 피해자와 합의를 하지 못했다며 징역 7년을 선고했지만 2심은 "5000만원을 공탁했고 깊이 반성하고 있다"며 징역 5년으로 감형했기 때문이다.
장다혜 형사정책연구원 박사는 "피해자 의사까지 꼼꼼이 감안하는 판사도 있겠지만, 공탁 그 자체만을 형식적으로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피해자 의사가 반영된 합의와 그렇지 않고 금전적인 노력만 있는 합의를 달리 구분해 감경요인에서 차등을 둬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미성년자나 장애인 등 스스로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없는 피해자와 관련해서 가족이 대신 합의를 해주는 제도도 비판받고 있다. 피해자 본인 의사인지 담보가 되지 않는 상태에서 합의라고 인정해주는 게 맞느냐는 것이다. 과거에는 피해 아동이 강력한 처벌을 원하는데도 부모가 돈을 목적으로 합의를 해주는 문제가 비일비재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법원이 미성년자 등에 있어서는 단순히 합의했다는 사실만 가지고 인정하기보다는 직접 확인하는 절차를 거치는 방향으로 개선되고 있다. 윤석희 한국여성변호사회 수석부회장(변호사)는 "법원이 국선 변호인을 피해자 대리인으로 지정해 진정한 합의 의사가 있는지 확인한다"며 "합의 의사가 진정한지에 대한 문제는 상당 부분 개선이 됐다"고 말했다. 윤 부회장은 다만 "대리인의 역량이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여전히 피해자 의사의 100%인지 확신할 수 없다는 한계점은 있다"며 "사각지대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보완하기 위한 체계적인 검증 절차가 마련돼야 할 필요성은 있다"고 했다.
[박현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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