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6.17 (월)

우주적 관점에서 인간사 관조하는 SF 속 불사신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매일경제

`맨프럼어스`는 우리나라를 포함한 몇몇 나라에서 연극으로도 각색되었다. /사진=올라운드엔터테인먼트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박상준의 사이언스&퓨처-20] '맨 프럼 어스(The Man from Earth)'는 2007년 미국에서 발표된 저예산 독립영화다. 이 작품은 유통 과정에서 상당히 이례적인 현상을 일으킨 것으로 유명하다. 몇몇 극장에서만 제한적으로 상영된 뒤에 곧장 DVD로 출시되었는데, 무단 복사된 파일이 인터넷에 퍼지면서 사람들 사이에 입소문이 돌더니 점점 작품 인지도가 올라간 것이다. 급기야는 영화 제작자가 파일 공유 사이트 이용자들에게 '여러분들 덕분에 작품이 유명해져서 고맙다'는 감사 인사까지 내놓았다.

'맨 프럼 어스'의 주인공은 중년 지방 대학교수다. 그가 학교를 그만두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게 돼 동료 교수들이 그의 집에서 환송 모임을 한다는 것이 주된 줄거리다. 떠나는 이유가 뭐냐고 계속 추궁을 받자 주인공은 자신이 나이를 먹지 않기 때문에 10년마다 거처를 옮겨야만 한다고 대답한다. 인류의 원시시대였던 1만4000년 이전부터 지금까지 계속 지금 모습 그대로 살아왔다는 것이다. 동료들은 재밌는 농담으로 받아들이면서 그가 쓴 책이나 지나온 삶의 이야기들에서 꼬투리를 잡는 식으로 장단을 맞추려 하지만 그때마다 그가 내놓는 답은 막힘이 없고 설득력도 있다. 사람들 표정은 점점 심각해지기 시작한다.

매일경제

지구 생명의 모든 기억을 지닌 여인 `에마논` /사진=미우


'추억의 에마논'은 일본 작가 카지오 신지의 SF소설로 우리나라에는 츠루타 겐지가 각색한 만화로 알려졌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젊은 여성은 '맨 프럼 어스'보다 훨씬 스케일이 크다. 지구상에 생명이 탄생한 뒤로 수십억 년에 이르는 기억을 모두 간직하고 있다. 자신의 이름을 ‘에마논(Emanon)'이라고 밝히지만 사실은 영어 ‘noname'를 거꾸로 한 것뿐이다. 고유한 이름을 가지는 것조차 덧없다고 여기는 에마논. 그는 ‘맨 프럼 어스'의 주인공처럼 늙지 않는 육신을 지닌 것이 아니라 남자를 만나 여자아이를 낳고 그 여자아이가 새로운 에마논이 돼 앞 세대까지의 기억을 고스란히 물려받는 식으로 존재를 이어간다.

매일경제

학습만화를 넘어 교양서적의 반열에 오른 `피터 히스토리아` /사진=북인더갭


'피터 히스토리아(교육공동체 나다 글, 송동근 그림)'는 원래 학습만화로 기획된 작품인데, 훌륭한 내용을 인정받아 부천만화대상을 수상한 뒤 역사 교양서적의 반열에까지 오른 수작이다. 주인공 소년은 기원전의 수메르 문명부터 21세기 현대에 이르기까지 세계사의 굵직한 사건, 인물들과 현장에서 함께하며 인간과 사회, 역사에 대한 다양한 입장을 고민하게 된다. 주인공의 꿈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설정상의 여지를 두고 있지만 불멸의 존재가 등장하는 그 어떤 SF 못지않게 깊은 여운을 남긴다.

문학 작품에서 '불멸의 존재'라는 설정은 매우 긴 역사를 지녔다. 호러 장르를 대표하는 뱀파이어처럼 대부분은 전설 속 신비롭고 초월적인 캐릭터로 그려진다. 그러나 SF에 등장하는 불사신들은 판타지와 달리 현실적인 설득력을 지녔다. 그 설득력이란 불사신이란 존재가 어떻게 과학적으로 가능한지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시야를 통해 인류와 세상을 생생하게 관조하는 것이다. 그들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의 일생이란 늘 덧없이 지나가버리는 것이다. 정을 주면 주는 만큼 이별의 아픔도 크기에 그들은 가급적 사람들과 거리를 둔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평범한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불멸의 삶이 무슨 의미인지, 왜 우주는 자신과 같은 존재를 낳았는지 궁금해하고 번민한다.

좋은 SF는 항상 독자의 시공간적 시야를 넓혀주는데, 그 방법론이 되는 설정은 여러 가지가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시간여행이고, 인간이 아닌 외계의 지적 존재를 등장시켜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가지가 바로 불사신, 불멸의 존재다. SF에 등장하는 불멸의 존재들은 항상 우리 같은 보통 인간들보다 더 넓은 관점에서 세계와 우주를 보고, 그 통찰적 지혜를 전하려 한다. 과학기술이 가속 발달하는 지금 시대라면 문명의 안정적인 발전을 위해 넓은 시야는 더 시급한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인류 대다수는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한 근시안적 태도를 버릴 준비가 돼 있을까?

매일경제

장수종족은 왜 지구를 탈출했을까 /사진=오멜라스


로버트 하인라인의 SF소설 '므두셀라의 아이들(1958)'은 장수 인간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평균수명이 유달리 긴 사람들끼리 모인 종족이 과학기술의 힘까지 보태어 보통 사람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몇백 살의 수명을 누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자 가혹한 핍박이 뒤따른다. 대다수 보통 인간들이 보인 반응은 다름 아닌 질투와 시기였던 것이다. 적지 않은 동족들이 체포되거나 살해된 상황에서 남은 사람들은 가까스로 우주선으로 지구를 탈출한 뒤 새로운 안식처를 찾아 우주 방랑의 길에 나선다. 냉전 시대의 한가운데에서 이 작품을 발표한 SF 작가가 당시의 인류 전체에 던졌던 이 소설 형식의 질문은 과연 21세기인 지금은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박상준(서울SF아카이브 대표)]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