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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6 (토)

"다이어트약 필요" 한마디에.. '살빼는 마약' 원하는 대로 처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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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혼여성들이 육아·생활 정보를 공유하는 ‘맘카페’에서 최근 서울 지역 한 피부과 이름이 여러 차례 오르내렸다. "OO병원에서 처방 잘해준다", "약을 먹는 순간 배가 고프지 않다", "2주 만에 8kg 빠졌다"는 내용이었다.

지난 5일 기자가 ‘다이어트 약’을 잘 지어주기로 입소문이 난 이 병원을 찾았다. "펜터민(식욕억제제) 처방 받고 싶다"고 요구하자, 병원 관계자는 익숙한 듯이 답했다.

"몇 달 치 원하세요? 1주일 치 1만원, 그다음부터는 5000원씩 올라가요. 보통 환자들이 한 달 치 이상 짓는 편입니다. 처방전은 10분이면 나올 거예요."

의사가 키·몸무게를 묻더니 펜터민(Phentermine) 성분의 식욕억제제, 지방흡수 억제제, 포만감 증가제 등 약을 처방해줬다. 그러더니 벽에 붙은 ‘패키지 코스’ 광고 포스터를 가리켰다. "약만 드시지 말고…살이 빠지는 거랑 체형 바뀌는 건 다릅니다. 약 먹어서 살 빼봤자 똥배가 들어가는 게 아니에요. 배에 직접 주사를 맞으셔야 몸매가 삽니다. 저거(패키지 코스) 한 번 해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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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가 권한 광고포스터에는 ‘처방전 8주 치+에스주사’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주사의 종류에 따라 코스의 가격은 30만~150만원으로 천차만별이었다. 의사 처방전이 패키지 상품의 ‘미끼’처럼 느껴졌다. 패키지 상품을 거절하자 의사는 "일단 약 일주일 치 드시고 꼭 다시 방문해달라"고 말했다.

약을 손에 쥐기까지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별다른 절차가 필요하지 않았다.

기자는 서울 시내 가정의학과·피부과·내과 등에 10여 곳에 무작위로 전화를 걸어 "다이어트를 하고 싶은데 식욕억제제 처방이 가능하냐"고 물었다. 전화상이라 기자의 체격을 볼 수 없었지만, 모든 병원이 "처방 가능하다"고 응답했다. 키와 몸무게를 물어본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식욕억제제에는 펜터민, 펜디멘트라진, 마진돌, 로카세린 등 성분이 들어가 있다. 이 성분은 뇌하수체의 특정 부분을 자극해 입맛을 떨어뜨린다. 마약 성분을 포함해 향정신성의약품(마약류)으로 분류·관리되는 까닭에 ‘살 빼는 마약’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같은 성분을 장기간 복용하면 조현병 등 부작용이 발생한다. 이에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중도비만 이상인 사람에 한해 3개월 이내로 복용하도록 제한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 병원에서는 이들 약품을 ‘살 빠지는 상품’으로 광고하고, 맘카페·커뮤니티는 ‘약 잘 주는 병원’ 정보를 공유하고 있다. 실제 맘카페, 여성 커뮤니티 등에서 ‘다이어트약’, ‘식욕억제제’, ‘펜터민’ 등으로 검색하면 ‘식욕억제제 잘 주는 병원’ 이름이 뜬다. 직장인 성모(40)씨는 "서너 군데 병원을 바꿔가며 처방받는 경우가 일반적"이라며 "다이어트 코스를 개발해 환자가 원하는 만큼 식욕억제제를 처방해주는 병원도 많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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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인터넷 상에서 ‘살빼는 마약’으로 불리며 식욕억제제를 포함한 다이어트약이 인기를 끌고 있다. 사진은 서울 시내 한 약국 입국의 모습으로 기사와 관련이 없다. /조선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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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병원서 석 달 만에 3870정 마약성분 포함된 식욕억제제 처방
‘다이어트 약’ 오남용은 숫자로도 확인된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윤종필 의원(자유한국당)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처방된 식욕억제제는 2013년 1억 8500개에서 지난해 2억 4939개로 급격히 늘었다. 4년 만에 처방 건수가 35% 증가한 것이다. 하루에 1정씩 4주(28일)를 복용한다고 가정하면 약 890만명이 복용할 수 있는 양이다.

김광수 민주평화당 의원실에 따르면 지난 5월 18일에서 8월 31일까지 식욕억제제 처방횟수·처방량 상위 100명을 분석한 결과, 이 기간 100명이 총 15만 8676정의 식욕억제제를 처방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A(30)씨는 병원 한 군데에서 3108정의 식욕억제제(펜디멘트라진)를 처방받았다. 이 기간 매일 29알 꼴로 처방받은 것이다. B(58)씨의 경우, 병원 9곳을 옮겨 다니며 식욕억제제 3870정을 처방받았다. 그가 균일하게 약을 먹는다면 하루에 37알을 복용해야 한다. C(28)씨는 병원 한 곳에서 6차례 처방전을 받아, 암페프라몬 성분의 식욕억제제 2352정을 조제 받았다. 처방전 1장당 392정이다. 식약처 권고대로 하루 1정을 복용한다면 1년 1개월 치 약을 한 번에 처방받은 셈이다.

전문가들은 ‘치사량’이라고 했다."펜디멘트라진 10알만 복용해도 심장이 두근거리고 부정맥이 오는 등 심각한 부작용에 빠질 수 있어요. 매일 20~30정을 먹는다면 사망에 이를 수 있습니다. 도저히 혼자서 복용할 수가 없는 양입니다. 처방 의도가 의심스럽습니다. 심할 경우 이 약을 빻아서 가루로 만든 뒤 식품에 뿌려서 판매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오한진 을지대병원 가정의학과 교수 얘기다.

서울 시내 한 약국 약사는 "식욕 억제제 대부분은 향정신성 성분이 들어 있는 제품"이라며 "일단 식사량을 줄이기 때문에 살이 빠질 수 밖에 없고, ‘실제 빠지더라’ 입소문이 나면서 점차 처방전 접수가 많아지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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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욕억제제로 사용되는 마약류 의약품 /식품의약품안전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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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욕억제제 부작용으로 5명 사망하기도
전문가들은 식욕억제제를 과도하게 사용할 경우 심각한 부작용을 빠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식욕 억제제 성분을 3개월 이상 복용하면 폐동맥 고혈압 위험이 23배 증가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또 이 약을 많이 먹을 경우 불안, 의식 잃음, 사지 떨림, 과호흡, 혼란, 환각상태, 공격성, 공포로 인한 심리적 불안 상태 등이 나타날 수 있다. 심하면 중독에 이르러 경련, 혼수상태에 빠져 목숨도 잃을 수 있다.

정해진 복용량을 지키지 않거나 우울증 약 등과 함께 복용해도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 식욕억제제를 복용하다가 중단할 경우 체중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는 이른바 ‘요요 현상’에 빠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약의 투약양을 늘리거나 끊기가 어렵다고 전문가들은 전했다.

실제 2009년엔 30대 여성이 다이어트를 위해 마약 성분이 든 약을 계속해서 복용하다가 숨졌다. 경찰 조사 결과, 이 여성은 약물을 과다 복용했고, 자신이 원하는 만큼 약을 못 구하자, 친구 6∼7명에게 부탁해 계속 처방을 받은 것으로 조사됐다.

송석준 자유한국당 의원실에 따르면 지난해 식약처에 보고된 식욕억제제 부작용 건수는 395건으로 2014년(107건)보다 약 3.7배 늘었다. 부작용은 주로 불면증이나 두통이었지만 사망에 이른 사람도 지난 3년간 5명이나 됐다.

신현영 한양대명지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는 "향정신성의약품이 무조건 나쁜다고 할 순 없다"며 "음성적으로 약이 유통되게 하는 것보다는 정부가 정책을 개선해, 비만이라는 병을 치료할 약이 필요한 사람이 정당하게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양성화하는 방안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박성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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