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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7 (월)

전과자 여성과 학대받는 소녀, 서로를 구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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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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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미쓰백'(감독 이지원)의 마지막 쇼트를 생각한다. 카메라는 정지화면으로 저 멀리 물러선 채 두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프레임 맨 왼쪽엔 미쓰백 상아(한지민)가 서 있고, 반대편엔 어린 소녀 지은(김시아)이 서 있다. 두 여자의 시선은 서로를 향한 상태인데, 그 자체로 편안하며 아름답다. 환한 대낮, 평행구도의 부드러운 질감으로 찍은 이 쇼트는 '미쓰백'의 거의 유일한 희망의 순간을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이때 뿐이다. 우리는 이 순간을 빼면 다시는 아름답다는 상투어를 꺼내들 수 없을 것이다. 시간을 저 앞으로 거스를 수록 마주하는 것은 아름다움의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출구 없는 폐쇠회로로 던져진 '참혹'과 '비극' 투성이의 두 존재, 이들의 날 것 그대로의 생(生)이기 때문이다. 그럼 이젠 물어야 한다. 어떤 참혹과 비극인가.

상아와 지은은 서로의 존재만을 알고 있던 미지의 이웃들이다. 하지만 각자의 생을 힙겹게 저어가던 중 둘은 교감의 순간을 맞는다. 헐거운 옷차림에 맨발로, 그것도 캄캄한 한밤중 바깥에 서서 흐느끼던 소녀가 상아의 눈에 밟힌다. 그 순간 상아는 그냥 지나치는데, 소녀의 이미지는 그녀의 뇌리 속 지워지지 않을 인장으로 새겨진다. 상아는 이제 소녀의 학대받는 생을 도저히 외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만약 소녀를 외면한다면 영화 '미쓰백'의 서사는 진행되지 않을 것이다. 앞서 바라본 막바지 연대에의 순간에도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상아는 왜 소녀를 외면하지 못한 것인가. 한 사람 성인으로서 순전한 윤리·도덕 의식의 발로인 것인가.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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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지은이 상아의 어린 시절의 현현(顯現)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상아는 자신의 감추어진 과거가 지은이란 소녀에게 재연되고 있는 것을 이제 막 봤다. 상아의 어린 시절은 소녀 이상으로 수난의 범벅이였다. 어린 시절 모친은 알콜중독자였고, 부모로부터 갖은 학대에 시달렸으며, 버려진 채로 보육원에서 길러졌다. 여고시절, 한 남자에게서 성폭행을 당할 뻔했고, 이를 모면하려다 살인을 저질렀다. 상아는 불행한 전과자다.

'미쓰백'은 세상을 등지며 미쓰백이라는 가명으로 살던 그가 소녀를 구원하며 스스로도 구원한다는 이야기다. 자신의 과거를 삭제하며 다가오는 삶을 간신히 버텨내던 이 밑바닥 생애가 자신의 비극이 재연되고 있는 소녀를 구출함으로써 자신의 트라우마와 소녀의 트라우마를 함께 치유해 간다는 이야기다. 버림받은 두 여성이 서로의 손을 맞잡고 버팀목이 돼주는 이 연대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시리며, 여러번 가슴을 친다.

배우 한지민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드라마를 빼면 영화에선 한동안 눈에 띄는 주연 역이 없던 그는 모처럼 빛나는 캐릭터를 이 영화에서 찾은 듯하다. 이지원 감독은 '미쓰백'이 한지민의 영화임을 강조하려는 듯 클로즈업을 자주 구사하고 있다. 미쓰백으로 분한 그의 얼굴을 다양한 앵글로 거듭해 클로즈업함으로써, 그가 자아내는 비극적 파토스와 정념은 배가된다.

그럼에도, 이 영화에 아쉬움이 얼마간 없는 것은 아니다. 그 아쉬움이라 하면 재현의 윤리와 관련한 것이다. '미쓰백'은 때때로 지나치다 싶을 만큼 소녀의 아동학대 신을 공들여 찍는다. 언어로 묘사하는 것이 저어될 정도로 이 신들은 잔인하며, 과하다. 때로는 보여주지 않는 것이 보여주는 것보다 힘이 세다는 것을 '미쓰백'은 이 지점에서 간과하고 있다. 11일 개봉.

[김시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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