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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9 (수)

세계최초 ‘비디오 아트’의 탄생을 알린 경향신문···백남준이 판화로 보존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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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전시회 장소에서 피아노를 쳐보고 있는 파르나스 화랑의 주인 롤프 예를링의 모습이 담긴 사진. 백남준은 이 사진을 판화로 만든 뒤 친필 설명을 달아놓았다.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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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역사적인 ‘비디오 아트’의 탄생을 알리는데 경향신문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인 백남준(1932~2006)이 이를 오랫동안 기억하기 위해 29년 뒤 경향신문을 판화로 만들었다는 것 역시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백남준이 경향신문 위에 인쇄한 1963년 전시회 전단지를 판화로 만든 뒤 자필 설명까지 달아놓은 자료가 나왔다. 홍콩에 거주하는 미술품수집가 하영준씨(46)는 지난달 20일 서울에서 경향신문과 만나 백남준의 초기 작품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자료들을 공개했다. 하씨는 “한국에서 백남준 선생은 단편적인 모습으로만 알려져 있어 안타까웠다”며 “한국인들이 조금이라도 백 선생에 대해 더 잘 알게되기를 바라 공개에 응했다”고 말했다. 홍콩에서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하씨는 10여년전부터 백남준의 작품과 자료를 모으는데 몰두해왔다. 이날 경향신문에 공개한 자료들은 그 일부다. 하씨는 “여러곳에서 전시(대여)요청을 받았지만, 아직은 준비가 되어있지 않아 응하지 못했다”며 “백 선생의 모습을 더 잘 알릴 수 있다면 (전시를) 차차 검토해보겠다”고 말했다.

백남준은 31살이 된 1963년 3월, 7년간 준비한 첫 개인전을 독일 소도시 부퍼탈의 파르나스 갤러리에서 열었다. 제목은 ‘음악의 전시회-전자 텔레비전(EXPosition of music-ELectronic television)’으로, 전시장에 피아노와 함께 TV를 등장시켰다. ‘비디오 아트’의 시대를 여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1950년대에도 텔레비전을 사용한 예술은 있었다. 그러나 텔레비전의 겉모습이 아닌 ‘실체’를 이용한 예술은 없었다. 백남준은 이날 전시회를 저녁에 시작했다. 당시만해도 독일 방송국들이 ‘낮방송’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채영 백남준아트센터 학예팀장은 “텔레비전 13대를 사용했는데, 그중에는 고장이 나서 안나오는 텔레비전, 화면을 조작해서 울렁거리게 만든 텔레비전 등도 섞여 있었다”며 “텔레비전에서 방송이 나오는 메커니즘을 활용한, 텔레비전 자체를 예술 오브제로 사용해 전파까지 이용한 전시는 사상 처음이었다”고 말했다. 1963년 백남준의 전시회가 현대미술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이유다.

백남준은 이 전시회를 포스터와 함께 수천장의 전단지로 알렸다. 모두 백남준이 직접 디자인했다. 그런데 이 전단지는 똑같은 것이 단 한장도 없었다. 축쇄판으로 된 경향신문에 인쇄를 했기 때문이다. 경향신문은 이승만 정권을 비판하다가 1959년 4월30일 폐간조치를 당했다. 이에 경향신문이 행정처분취소 가처분신청을 내자 정부는 ‘무기한 발행정지 처분(정간)’ 조치로 응수했다. 경향신문은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뒤인 1960년 4월27일에 복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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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은 1963년 독일 부퍼탈에서 전시회를 열면서 수천장의 전단지를 만들었다. 백남준은 경향신문 축쇄판을 구해 전단지를 인쇄했다. 전단지 한장한장에도 ‘독창성’을 주기 위해서였다.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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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은 1992년 자신의 첫 전시회 자료들을 판화로 만들면서 그 이유를 짧게나마 설명했다. 하영준씨가 소장하고 있는 그 판화에 백남준은 친필로 “61년(1960년의 오기로 보임) 학생혁명 후 큰 형이 경향신문 축쇄판을 보내었다. 그 위에 안내장을 인쇄해 한장한장 틀리는 original(오리지날)을 만듦”이라고 썼다. 수천장의 안내장에도 ‘독창성’을 주기 위해 축쇄판 경향신문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백남준은 또 1993년 8월25일자 경향신문에 게재한 회고록에서는 “경향신문과는 그때(1963년 첫 전시회)부터 인연이 있다. 4·19때 정간됐던 경향신문은 복간후에 정간 기간의 신문을 모아서 축쇄판으로 냈다. 나는 이 조그만 크기의 신문에 흥미를 느껴 꼬박꼬박 모았다가 그 신문 3000장에다 내 전시회 안내장을 인쇄했다. 그러니 안내장 하나하나가 다를 수 밖에 없었다. 그 초대장을 지금까지 간직한 사람들이 20여명되고 한장이 100달러를 호가한다는 얘기도 들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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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의 1963년 전시회 포스터. 제목(EXPosition of music-ELectronic television) 중 대문자로 강조한 부문을 따로 읽으면 ‘추방(EXPEL)’이 되는데 그 의미는 여러가지로 해석된다. 정지윤 color@kyunghyang.com


백남준이 만든 전시회 포스터는 다시 봐도 눈길을 끈다. 전시회 제목(EXPosition of music-ELectronic television) 중 대문자로 강조한 부문을 따로 읽으면 ‘추방(EXPEL)’이 되는데 그 의미는 여러가지로 해석된다. 냉전과 이념대결을 추방하자는 뜻도 되고, 그간의 서양미술을 추방하고 새로운 예술을 만든다는 의미로도 보인다. 하씨는 “저는 추방이 아니라 새로운 것의 창조로 해석하고 있다”고 말했다.

첫 전시회 장소에서 피아노를 쳐보고 있는 파르나스 화랑의 주인 롤프 예를링의 모습이 담긴 사진에도 백남준은 친필로 재미있는 설명을 달아놓았다. 건축가였던 예를링은 1949년 자신의 건축사무소 건물에 파르나스 화랑을 열어 1965년까지 운영했다. 백남준을 비롯한 플럭서스(백남준이 참여한 전위적인 예술가그룹) 예술가들의 액션, 해프닝 공연을 많이 유치했다. 백남준은 “피아노 치는 롤프 예를링(파르나스 화랑주인)이 자기 어머니는 90세를 넘었으니까 자기도 오래 살 것이라고 자신하고 있었는데 그렇지 못하고 화랑 문을 닫은 후 UN의 아프리카 주재 건축가로서 특히 에디오피아에서 많이 일했다. 항상 내 소대가리 때문에 화랑이 망한다고 농담했다.(반쯤 사실) Mrs 예를링은 치과의로서 본 근교에서 건재한다”고 설명했다. 백남준은 첫 전시회 당시 파르나스 화랑 입구에 잘린 소머리를 달아 관객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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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첫 전시회 서문은 갤러리22의 운영자 장 피에르 빌헬름이 썼다.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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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씨가 소장하고 있는 자료 중에는 백남준의 첫 전시회 서문도 있다. 백남준이 가장 존경한다고 했던 장 피에르 빌헬름이 썼다.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갤러리 22를 운영하던 빌헬름은 무명시절부터 백남준과 플럭서스를 도와주는 든든한 후원자였다. 1959년 27살에 불과하던 ‘풋내기 예술가’ 백남준이 ‘존 케이지에 대한 경의’를 처음 발표한 곳이 바로 갤러리 22다. 백남준은 빌헬름이 세상을 떠난지 10년이 된 1982년에는 갤러리 22가 있던 자리에서 ‘장 피에르 빌헬름에게 보내는 경의’라는 퍼포먼스를 펼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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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은 미국 잡지‘뉴요커’ 1975년 5월호에 실린 자신의 기사에 장난스럽게 가필을 한 뒤 ‘TV set for the blind(장님을 위한 텔레비전 세트)’라고 적었다. 뉴요커는 이 기사에서 백남준을 “비디오아트의 조지 워싱턴(미국 초대 대통령)”이라고 표현했다.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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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씨는 백남준을 “공룡과 같은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공룡 화석을 하나하나보면 단편적인데 모두 모아놓고 보면 전체가 보이듯이, 백남준도 장난스런 퍼포먼스나 기발한 작품 등을 모아서 보면 정말 큰 그림이 보인다”는 것이다. 하씨는 백남준이 잡지에 끄적인 낙서와 메모같은 희귀한 자료도 소장하고 있다. 백남준은 ‘뉴요커’ 1975년 5월호에 실린 자신의 기사에 삽입된 얼굴 그림에 장난스럽게 가필을 한 뒤 ‘TV set for the blind(장님을 위한 텔레비전 세트)’라고 적었다. 뉴요커는 이 기사에서 백남준을 “비디오아트의 조지 워싱턴(미국 초대 대통령)”이라고 표현했다. 하씨는 “(백남준과 파격적인 퍼포먼스를 펼친 첼리스트)샬롯 무어먼이 A4 용지에 백남준이랑 어디어디 실렸다고 쓴걸 보고 뉴욕에 있는 조카에게 책방을 뒤져보라고 해서 찾아낸 자료”라고 말했다.

백남준은 ‘상대적으로’ 국내에서 저평가된 예술가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 작가임은 분명하지만 백남준의 진가를 아는 사람은 한국에 그리 많지 않다. 백남준의 예술세계가 어렵기도 하지만, 작품의 저작권을 갖고 있는 유족과 국내 기관의 불화 등 여러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당장 내년 10월부터 영국의 유명 현대미술관 ‘테이트모던’이 각국을 돌며 대규모 백남준 회고전을 여는데 한국은 아직 포함되지 않았다. 이채영 백남준아트센터 학예팀장은 “전체적으로 비디오아트, 현대미술에 대한 관객층이 엷기도 하고 백남준 선생 작품에는 한국적 맥락이 없다보니 이해가 쉽지 않은 면도 있다”며 “좀 더 많이 알리기 위해 우리를 비롯한 기관들이 더 노력해야겠다”고 말했다.

‘백남준 마니아’를 저차하는 하씨의 바람 역시 같았다. 하씨는 “당장 테이트모던의 런던 전시회부터 더 많은 사람, 특히 한국인들이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며 “내가 소장품을 공개한 것이 대중들에게 백남준을 알리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홍진수 기자 soo4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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