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당 대우에 목소리 내는 젊은층… 퇴사하며 상사 고발하는 글 맡겨
김씨는 과거에도 사직서를 대필했었다. 새 직장의 평판 조회에 대비해 다니던 회사에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다는 요청이 많았다. 사직서도 '회사에 다니며 그간 뭘 얻고 배웠다'는 식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특정인을 고발하며 '너 죽고 나 죽자'는 사직서 주문이 많다. 대필 작가들은 '논개 사직서'라고 부른다. 회사 내규를 알려주며 특정인이 처벌받게 써달라는 사람도 있다. 대부분 회사 생활 10년 미만인 젊은 직장인이 많다. 김씨는 "최근 20~30대 직장인들은 '부당한 문제는 공론화하고 가해자를 처벌받게 하는 것이 정의'라는 인식이 강하다"고 말했다.
대필 작가 최모(39)씨는 주로 대학 입시용 자기소개서를 많이 써왔다. 그런데 올 상반기에는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반성문을 써달라는 의뢰가 더 많았다고 한다. 사내 성희롱·성폭력 사건의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선처를 구하는 내용이다.
자기소개서는 사전 인터뷰를 하기도 하는데, 미투 사건에서는 신원 노출을 꺼려 의뢰자가 초고(草稿)를 쓰면 최씨가 고치는 식으로 일한다. 최씨는 "초고를 받아보면 상황을 정당화하는 데에 급급한 경우가 많다"고 했다. 최씨는 이런 초고를 '경찰 조서'처럼 고쳐준다. 최근 한 대기업 사원은 "직접 쓴 반성문을 피해자가 퇴짜 놨다"며 최씨에게 대필을 의뢰했다. 최씨는 "술에 취해 노래방에서 여자 후배의 엉덩이를 2회 더듬었다는 식으로 경찰 조서처럼 고쳐주고 진심으로 사과하라고 권유했다"고 했다.
자서전 대필은 과거에는 성공한 60~70대 기업인이 요청하는 경우가 많았다. 최근에는 유튜브 등에서 활동하는 20~40대 1인 방송 제작자(BJ) 가운데 에세이나 자서전을 써달라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온라인에서 성공한 이들이 오프라인 강연이나 방송 출연을 위해 경력으로 책을 낸다는 것이다.
종류가 다양해지고 있지만 대필 시장 '최고 상품'은 여전히 자기소개서다. 한 대필업체는 "공공기관 입사 지원 때 학력·연고를 쓰지 못하게 하면서 지원서가 중요해졌다"며 "올해 자기소개서 대필·첨삭 요청은 작년보다 50% 늘었다"고 했다.
대필 의뢰자 대부분은 "심사위원의 마음을 움직이는 글로 만들어 달라"고 요구한다. 대필 작가들은 "지원서를 받아보면 뽑는 사람 처지가 아니라, 자기 관점에서 '내가 이렇게 중요한 사람'이라는 점만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복문을 단문으로 고치는 것만큼이나 이런 관점을 교정하라는 조언을 자주 한다"는 것이다.
대필 수요가 늘어나고 있지만 작가 간 경쟁도 심하다. 대필 작가 단체인 '한국대필작가협회' 회원은 2015년 결성 당시 125명이었지만 올해 300명으로 두 배가 넘었다.
[박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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