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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6 (일)

병천이표 병아리 부화기, 병천이를 대학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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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따라 6년전 귀농 박병천군, 자기추천 전형으로 건국대 합격]

인터넷·백과사전 뒤져 닭 연구, 못쓰는 냉장고 등 재활용

시중값 3분의1의 부화기 개발… 세계적 기업 카길 장학생에 선발

어머니 "반대했던 귀농이 아들 대학 보낸 1등 공신"

"농축산업의 미래! 박병천 인사드립니다!"

순간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던 입학사정관과 담당 교수가 웃음을 터뜨렸다. 지난달 13일 서울 광진구 건국대의 동물자원학과 자기추천전형 우선면접장에서 벌어진 일이다. 이날 우선면접 대상자는 단 1명. 전북 장수군에서 차를 타고 3시간 걸려 올라 온 박병천(18·장수고 3학년)군이었다. 면접관들이 웃음을 터뜨리자 긴장이 조금 풀린 박군은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말했다. 박군은 자기소개서에 자신을 '미래 농축산업 혁명을 통한 글로벌 비전을 실현할 인재'이며 '세상과의 소통능력과 창의적인 도전 정신을 갖춘 농축산업 인재'라고 표현했다. 이틀 뒤, 박군은 건국대로부터 합격 통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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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아리 에디슨’ 박병천군이 지난달 30일 전북 장수군 천천면 집 옆에 있는 창고를 개조해 만든 연구실에서 2개월쯤 된 토종닭 병아리와 오골계 병아리를 보여주고 있다. 이 병아리들은 박군이 음료수 냉장고를 개조해 발명한 ‘병천이표 부화기’(박군 뒤편)에서 부화했다. /이정원 기자


박군은 2006년 아버지 박동흥(44)씨를 따라 전북 장수군으로 귀농한 '산골 소년'이다. 그는 병아리를 길러 분양하고, 부모님이 기른 농산물을 장에 내다 판다. 하지만 산골 소년이라고 우습게 보면 안 된다. 박군은 지구촌 곡물시장의 40%를 차지한다는 세계 최대 농산물 기업 카길(Cargill)의 한국 법인 카길애그리퓨리나의 장학생이다. 카길애그리퓨리나 강경욱 마케팅담당 이사는 "병천이는 또래답지 않게 미래 계획이 뚜렷하고 꿈이 확실한 학생"이라며 "병천군 같은 친구들이 축산업의 미래를 짊어질 수 있도록 장학금을 지원했다"고 말했다.

박군의 별명은 '병아리 에디슨'이다. 귀농한 이듬해인 2007년부터 병아리를 키웠다. 박군은 인터넷과 백과사전을 뒤져 닭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부화기를 만들려고 맨 처음엔 아이스크림 통에 백열전구를 달고 달걀을 넣었다. 100기의 부화기를 만들고 부수고를 반복하다 2008년 3월, '삐약삐약' 하는 소리가 나서 달려가 보니 하얀 솜뭉치 같은 병아리가 알을 깨고 모습을 드러냈다. "평생 못 잊을 순간이었죠. 내가 아빠가 된 기분이랄까요."

2007년부터 지금까지 박군의 부화기에서 태어난 병아리만 1만2000마리 정도다. 지금도 집 근처 야산에 있는 박군의 닭 사육장에는 200여 마리 중닭이 있다. 인공 부화기 발명도 발전을 거듭했다. '병천이표 인공 부화기'는 종란 기준 90% 이상 부화율을 보이며, 자동 온도조절, 전란주기 설정, 전력 절약 기능이 있다.

"시중 부화기(500란 기준)는 200만~300만원 정도 하는데, 병천이표 인공 부화기는 100만원 정도예요. 못쓰는 음료수 냉장고 등을 재활용해서 만들기 때문에 훨씬 저렴해요. 그런데 시중 부화기 이상으로 부화율이 높으니까 훨씬 좋은 거죠." 주민들은 이렇게 박군을 칭찬한다. 박군은 닭 외에도 원앙, 청둥오리, 앵무새, 거위, 꿩, 메추리 등 조류의 부화에 성공했다.

박군이 2010년부터 부화일기, 귀농일기를 올리는 블로그(병처니's story)엔 지금까지 62만여명이 방문했고, 하루 방문자 수는 1000명이 넘는다. 블로그 글 중엔 이런 것도 있다.

"두 발 달린 닭도 부화하는데 네 발 달린 내가 부화를 못 하겠나?" (2011년 8월 11일 부화일기)

아버지가 귀농을 제안했을 때 가족들은 반대했었다. 서울 토박이였던 어머니 나영자(41)씨는 "삼형제 교육 걱정에 귀농을 반대했지만, 그렇게 반대했던 귀농이 우리 아들 대학 보내는 데 일등공신이 됐다"고 말했다.

박군은 당초 대학 진학을 망설였다. 힘들게 농사짓는 부모님께 짐이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군은 병아리 분양, 부화기 판매 등으로 돈을 벌었고, 대학 진학을 도와주겠다는 기업체도 나타났다.

"어떤 조건에서도 사람의 먹을거리를 안정적으로 생산하는 공장을 만들고 싶어요. 병아리로 시작한 제 연구가 대학에서 더 체계적으로 바뀌겠죠?" 병아리 에디슨이 말했다.


[장수=이옥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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