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민주화운동기록관은 20일 미국 언론인 팀 셔록이 기증한 문건에 대한 해제 작업을 마치고 1차 결과를 발표했다. 5·18기록관은 미국정부의 5·18관련문서 3500여 쪽에 대해 그동안 번역과 분석 작업을 진행해 왔다.
미 문건에는 전 전 대통령이 계엄군의 5·18진압작전을 지휘하고 있었다는 정황을 뒷받침 하는 내용이 곳곳에 등장한다. 1980년 5월25일 주한미국대사관이 국무부에 보낸 2급 비밀 문서에는 “육군 실력자 전두환은 자신이 광주의 과격세력에게 속았다면서 이제는 군사행동이 필요하다고 결론지었다 함” 이라고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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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26일 미국대사관이 당시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였던 리처드 홀브룩에게 보낸 전문에서도 “(전두환 장군이)광주로 진입해야 한다는 극심한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다”면서 “월요일밤(5월26일) 자정에 광주로 진입할 것임”이라는 내용이 있다.
이같은 전문은 5월27일 새벽 이뤄진 옛 전남도청 진압작전을 전 전 대통령이 결정했다는 것을 뒷받침한다. 당시 계엄군은 공수부대를 앞세워 도청과 전일빌딩을 무력으로 진압했고 5·18 열흘간의 항쟁도 막을 내렸다.
전 전 대통령은 자신이 5·18진압작전에 개입했다는 사실을 부정해 왔다. 그는 2017년 펴낸 <전두환 회고록>에서 “보안사령관과 중앙정보부장서리를 겸직하고 있었으나 1980년 5월18일부터 5월27일 사이의 그 어느 시간에도 전남 광주의 그 어느 공간에도 나는 실재하지 않았다”면서 “당시 나는 계엄군의 작전계획을 수립하고 지시하거나 실행하기 위한 어떤 회의에도 참석할 수 없었고 참석한 일이 없다”고 주장했다.
또 “그 당시 나는 광주에서 진행되는 작전상황과 관련해 조언이나 건의를 할 수 조차 없었다. 5월27일 광주가 수복되기까지 정보 및 수사 기능은 완전히 마비된 상태였다”고 적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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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당시 전 전 대통령 측이 미국에 거짓 정보를 흘려 광주의 상황을 왜곡해 위험한 것처럼 부각 시켰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주한미대사관이 광주 상황을 담아 5월26일 국무부에 보낸 전문에는 “자경단원이 활동하고 있으며 심지어 인민재판이 열려 처형도 있었다고 함”이라는 내용이 있다. 또다른 전문은 “과격파들이 실권을 장악한 것으로 보임, 인민 재판부가 설치되어 몇몇 처형이 있었음. 학생 시위는 혁명정부 설치를 주장하는 미상 무장 과격세력에 의해 전반적으로 대체되었음”이라며 상황을 왜곡해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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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한 시민이 무등산으로 도피해 은거했다는 내용도 있다. 1980년 6월5일 미 국방부 전문에는 “1개 대대 규모의 무장 반란군들이 광주 인근 산악지대(무등산)으로 도주하였음. 도주한 젊은 무장 반란군들이 이전에 알려진 것보다 더 많다고 하였음. 전남 지역에서 약 2000여명이 무기를 확보하고 무인지대로 들어간 것으로 보임”이라고 적혀있다. 또 간첩이 광주에 침투해 독침사건 등 공작활동을 하고 있다는 등 북한의 남침 징후가 있다고 퍼뜨렸다.
이러한 내용을 확인한 연구진은 전두환 신군부가 위기 상황을 부각해 미국으로부터 인정받는 발판으로 이용하려 한 것으로 봤다. 나의갑 5·18기록관장은 “미국이 한국의 공산화를 막겠다는 명분으로 전두환의 철권통치를 용인했다”며 “전두환 신군부가 미국 정부를 어떻게 속였는지 드러났다”고 밝혔다.
<강현석 기자 kaj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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