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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2 (수)

중국인이 왜? 백제 무덤서 찾은 ‘다문화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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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형석의 시사문화재]

하남 감일동 굴식 돌방무덤 52기

출토품·석실 얼개 전형적 중국풍

무덤 주인, 대륙 혼란기에 건너온듯


한겨레

하남 감일동 고분군의 일부인 5호 무덤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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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적인 중국계 무덤입니다. 여기 살던 토착세력의 것들이 아닙니다.”

백제 고고학 전문가인 권오영 서울대 교수가 무덤 내부를 보고 한마디했다. 주변의 학자들은 고민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거나 끄덕거렸다.

지난달 18일 낮 폭염 속에 경기도 하남시 감일동 백제석실분 발굴현장에서 열린 전문가 설명회는 흥분과 의문이 뒤섞인 분위기로 진행되었다. 한성(서울)에 도읍한 4~5세기 초기 백제시대의 대형고분들이 전례 없이 쏟아져 나온 성과를 보면서 연구자들은 설레임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데, 정작 무덤의 얼개와 출토품을 보니 주인이 중국계 이주민일 것이라는 정황이 드러나면서 또다른 고민거리를 안게 된 것이다.

유적은 고려문화재연구원이 2015년 11월부터 하남시 감일동 공공주택지구 조성터에서 구제발굴 조사를 시작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수만평에 달하는 조성터에서 4세기 중반∼5세기 초반의 백제시대 굴식 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이 52기가 드러났다. 그동안 경기, 충청, 전라권 일대 백제 권역에서 나온 횡혈식 석실분은 70여기, 한성백제 석실분은 2000년대 이래 경기도 판교, 서울 우면동 일대의 고분군 등 극소수에 불과했다. 한꺼번에 시대 편년이 가능한 백제 석실분들이 나온 것은 ‘벼락같은 축복’이자 ‘횡재’라고 할 만했다. 출토품들도 획기적이었다. 호랑이머리와 닭머리가 물 따르는 주구에 달린 중국 동진의 청자 호수호, 청자 계수호가 처음 나왔다. 누금기법으로 만든 금제구슬, 망자를 기리려고 만든 ‘미니어처’ 형식의 작은 토기인 명기들, 주둥이는 곧고 어깨는 넓직한 동진·남조 스타일의 직구광견호 항아리 등도 출토돼 이 시기 백제계 고분과 출토품의 연대를 가리는데 결정적인 근거를 찾게 되었다.

문제는 무덤 얼개가 전형적인 중국풍이란 점이다. 대개 평면을 장방형으로 조성하고, 사방벽면에 벽돌처럼 돌을 다듬어 쌓아올리고 윗부분을 판돌로 덮은 석실 구조는 3~5세기 중국 동진·남조, 한반도 서북 지역의 낙랑계 무덤에서 보이는 전축분(벽돌로 쌓은 무덤) 양식과 판박은 듯 닮았다. 한성백제 지배층의 핵심유적으로 꼽히는 서울 방이동, 석촌동 고분이 주로 돌무지무덤(적석총), 옹관무덤, 토광묘 양식인 것과는 크게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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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교수나 박순발 충남대 교수 등 고고학계 상당수 전문가들은 감일동 고분의 이질성이 3~5세기 중국 대륙의 전란과 낙랑군 멸망 등을 계기로 백제에 들어온 중국계 이주민의 생활 문화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단정한다. 당대 동아시아 혼란기에 다수의 유민들이 한반도에 뿌리내린 건 학계에서 공인된 사실이다. 백제에서 이들은 외교, 역법, 교육 등의 전문 직종에 종사하면서 자기네 특유의 문화 공동체를 형성했다. 감일동 고분군은 그런 이주민 집단 일부가 전통과 습속을 지키며 남긴 생활문화의 흔적이라는것이다. 백제가 국가사업으로 외국 고급 두뇌유치에 나서, 중국의 전문인 집단을 데려와 ‘테크노크라트’ 계층으로 육성하며 토착인들과 공존하게 했을 것이란 역사적 상상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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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미니어처 토기’로도 불리는 작은 크기의 토제품들. 부뚜막이나 여러 항아리 모양을 축소시켜 만든 것으로 망자가 내세 생전과 같이 생활하기를 기원하며 넣는 명기에 해당한다. 이런 소형 명기를 넣는 것은 당대 중국 동진과 남북조의 장례 풍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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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문헌 기록들을 봐도, 외국인의 이주와 활동이 당대 백제의 왕성한 국제교류와 개방성에 비춰 전혀 이례적이지 않았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중국 수나라 사서 <수서> ‘백제’ 전을 보면, 백제 주민 가운데 신라인, 고구려인, 왜인, 중국인이 숱하게 섞여 있다는 기록이 보인다. <속일본기>에는 6세기 왜국에 <논어> 등 유교경전을 전해준 백제 박사 왕인이 한나라 고조의 후예로 백제에 귀화한 중국인 왕구의 손자였다는 구절도 등장한다. 왕씨, 진씨, 고씨 등 중국계 성을 지닌 이들이 백제 조정에서 외교·행정 관료로 일하면서 업적을 쌓은 내용들도 묘지명이나 중국 문헌들에 상당수 전하고 있다. 이런 사실들은 고구려, 신라의 문헌기록에는 특별히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백제인들은 민족, 국적 가리지 않고 가장 적극적인 다문화 다민족 포용 정책을 쓰면서 이주민들의 기술과 역량을 국가의 운영에 십분 활용했던 셈이다. 최근 제주도의 예멘 난민 수용 문제를 놓고 뜨거운 논란이 일었던 후대의 현실에 견주어 고대 타자에 대한 관용과 상생을 증언하는 감일동 석실무덤은 의미심장한 역사적 선례임에 틀림없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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