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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4 (금)

혁신성장, 의료 민영화 불 붙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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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총리 ‘규제혁신 방안’ 발언, 경총·대기업의 규제완화 요구 사실상 수용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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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짓고도 문을 열지 않는 병원이 있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설립 승인을 받은 영리병원, 제주 녹지국제병원(이하 녹지병원)이다. 영리병원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의료법인으로, 투자자로부터 자본을 투자받아 병원을 운영하고 이를 통해 발생한 수익을 투자자에게 다시 돌려주는 주식회사 형태의 병원을 뜻한다. 중국 녹지(綠地)그룹이 778억원을 들여 세운 녹지병원이 제주도로부터 개설 허가를 받게 된다면 국내 첫 번째 영리병원이라는 타이틀을 안게 된다. 그동안 첫 영리병원 간판을 원했던 병원들은 많았다. 하지만 의료 민영화를 우려하는 여론에 밀려 모두 실패했다. 물론 녹지병원 역시 시민사회의 반대 속에 공사를 끝내고도 문을 열지 못하고 있다. 현 정부도 공식적으로 영리병원 도입에 반대 입장이다. 이쯤되면 영리병원 개원은 현실적으로 물 건너갔다는 전망이 나와야 하지만 상황은 그 반대다. 녹지병원 개원은 시간문제에 불과하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정부 방침과 여론의 반대 속에서도 개원을 추진 중인 영리병원의 뒷배는 무엇일까.

반복되는 의료 민영화 논란

국내 영리병원의 역사는 정부와 시민사회 간 투쟁으로 쓰여졌다.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2년 경제자유구역의 지정 및 운영에 관한 법률(이하 경제자유구역법)이 제정되면서 영리병원 설립의 근간이 마련됐다. 경제자유구역법에는 ‘경제자유구역 내 외국인 전용 의료기관 설립을 허용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참여정부도 ‘의료산업 선진화 정책’이라는 이름으로 영리병원 도입을 추진했다. 당시 삼성을 비롯한 대기업들은 의료산업 내 민간기업이 들어갈 수 있도록 규제개선을 강력히 요구했고 정부는 화답했다. 2004년 6월 14일 강철규 전 공정거래위원장은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을 만나 “공정위는 규제를 개선하고 있다”며 “학교와 영리법인은 금지되고 있는데 이를 가능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이 회장은 “의료기기 가격이 비싸기 때문에 영리법인도 병원을 할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다”며 “좋은 일을 하시는 것”이라고 답했다. 물론 진보정권에서 영리병원 도입은 시민사회의 반대로 ‘강행’되지는 않았지만 두 정부 모두 영리병원 설립에 대한 불씨는 남겨뒀다.

의료 민영화가 핵심 정책이었던 이명박 정부는 정권 출범부터 영리병원 도입을 추진했다. 당장 이명박 정부 인수위원회는 영리법인 병원 허용과 민간 의료보험 활성화, 건강보험 당연지정제 완화 등의 내용을 담은 의료 민영화 최종 보고서를 내놨고, 여기에 따라 관련 법을 발의하는 등 광폭 행보를 보였다. 삼성도 의료 민영화에 힘을 보탰다. 2009년 삼성경제연구소는 보건복지가족부로부터 용역을 의뢰받아 ‘미래 복지사회 실현을 위한 보건의료산업 선진화 방안’을 발표했다. 보고서의 핵심은 건강관리서비스의 시장화와 원격의료의 도입이다. 당시 의료 민영화 저지 및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를 위한 범국민운동본부(범국본)는 의료 민영화 반대를 위한 투쟁 대상을 ‘삼성과 이명박 정부’로 지목했다.

이명박 정부의 의료 민영화는 촛불을 들고 맞선 시민들의 목소리에 막혀 이뤄지지 않았다. 정책은 폐기 수순을 밟았고 영리병원도 문을 열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명박 정부는 정권을 잡은 동안 경제자유구역법을 ‘특별법’으로 격상하는 등 영리병원 개설을 비롯한 의료 민영화의 뼈대를 세웠다.

박근혜 정부가 세운 영리병원

박근혜 정부는 ‘미완’의 의료 민영화를 완성하기 위해 애썼다. 2014년 1월에 열린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은 “의료 민영화 비판은 유언비어다”라고 일축했다. 처음으로 영리병원 설립을 승인해준 것도 박근혜 정부였다. 현재 개설 허가 여부를 놓고 논란 중인 제주 녹지병원이 그 주인공이다. 제주 녹지병원은 박근혜 정부의 핵심 추진사업을 정리해 담은 ‘안종범 수첩’에도 등장한다. 2015년, 안종범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의 수첩에는 ‘5월 25일자 VIP 지시사항’으로 ‘제주도 외국인 영리법인(병원), 국내 자본 이동’이라고 적혀 있다. 당시 박근혜 정부는 외국 영리병원에 국내 기업과 자본이 ‘우회’적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셈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지시가 이뤄진 지 6개월 만에 보건복지부는 녹지병원 설립을 승인했다. 사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검진센터와 병상 47개를 갖춘 병원 건물은 지난 2016년 착공해 1년여 만에 준공됐다. 의사 9명을 포함한 134명의 운영인력에 대한 채용도 모두 이뤄졌다.

박근혜 정부의 승인 이후 ‘공’은 제주도로 넘어갔다. 지난해 11월 제주도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는 개설 여부를 심의했지만 녹지병원의 실질적 운영권이 국내 의료법인에 있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결론을 내지 못했다. 결국 국내 첫 영리병원의 개원 여부는 원희룡 제주도지사의 손에 달리게 됐다.

의료 민영화를 반대해온 시민사회는 문재인 정부의 출범과 함께 녹지병원 허가가 취소될 것을 기대했다. 실제로 보건복지부는 지난해 9월 제주도에 내려보낸 비공개 공문을 통해 ‘정부는 의료 영리화(민영화) 정책을 추진하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녹지병원 개원에 찬성 입장이었던 원희룡 지사는 6·13 지방선거를 앞두고 쉽게 결론을 내지 못했다. 시간을 끌던 원 지사는 결국 지방선거를 3개월 앞두고 허가 여부에 대한 결정을 공론화위원회에 넘겼다. 하지만 녹지병원 측은 개설 허가 여부는 숙의형 정책청구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공론조사 절차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공론화 과정에 대한 실효성을 담보할 수 없는 셈이다.

문제는 영리병원을 바라보는 문재인 정부의 시각에 변화가 생겼다는 점이다. 시발점은 지난 6월 8일 제1차 혁신성장 관계장관회의에서 있었던 김동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규제혁신 방안’ 발언이었다. 이 자리에서 김 부총리는 “이해관계자의 대립이나 사회 이슈화로 혁신이 잘 안 되는 분야도 규제혁신 방안을 조속히 만들어 정부 의지를 확실히 보여주겠다”고 말했다. 일주일 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영리병원 설립 허용과 원격의료 규제개선 등 9건의 혁신성장 규제개혁 과제’를 기획재정부에 건의했다. 이후 의료계를 둘러싸고 규제완화에 대한 ‘신호’가 쏟아졌다.

8월 16일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지나치게 의료 민영화로 가지 않고 순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상황에서 원격진료도 가능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삼성도 나섰다. 지난 6일 고한승 삼성바이오에피스 사장은 이재용 부회장과 함께 김동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을 만나 바이오시밀러(복제약)에 대한 규제를 개선해줄 것을 요구했다. 의약품 가격을 인상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얘기다. 이에 화답하듯 김 부총리는 9일 ‘의료 관련 규제’가 규제혁신 리스트 우선순위에 있다는 뜻을 밝혔다. 요컨대 삼성을 대표로 대기업이 짠 규제완화 정책을 정부가 받아 추진하는 익숙한 모양새가 문재인 정부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의료 규제완화 물결 속에 영리병원에 대한 보건복지부의 입장도 바뀌었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의료 민영화 정책을 추진하지 않겠다는 것은 과거 일어났던 일에 대한 입장”라면서 “녹지병원은 제주도에서 판단할 문제”라며 애매한 태도를 보였다. 혁신성장을 앞세운 의료계 규제완화가 가속화되면서 시민사회의 우려는 커지고 있다. 우석균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대표는 “현재 정부의 의료 규제완화 행보가 원희룡 지사의 영리병원 허용정책을 가속화시켰다”며 “박근혜 정부에서 준비했던 의료 민영화 정책들이 이름만 바꿔 현 정부에서 그대로 추진되고 있다”고 말했다.

<반기웅 기자 b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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