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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5 (금)

[해외석학칼럼] 유럽의 홀로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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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는 미국이 이끌고 있는 현 세계질서가 미국에 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최초의 미국 대통령이다. 현 질서가 분명히 미국에 이익이 되고 있음이 명백한데도, 트럼프는 중국이 더 많은 이익을 누리고 있다고 확신한다. 트럼프는 중국이 세계질서의 또 다른 축으로 부상하는 것을 우려해 ‘창조적 파괴’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기존 질서를 파괴하고 보다 미국에게 유리한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기 위한 것이다.

트럼프는 이를 위해 다른 국가들과 양자적 관계를 추구한다. 다자적 관계와 달리, 양자관계에서는 늘 힘에 바탕을 둔 협상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전통적인 동맹국들이 미국에 빌붙어 ‘공짜점심’을 먹고 있을 뿐 아니라, 새로운 질서 수립에도 걸림돌이 되고 있다며 비난을 서슴지 않고 있다. 마찬가지로 트럼프는 작고 약한 나라들이 모여 미국과 대등한 지위를 누리는 다자기구 역시 용납하려 하지 않는다.

‘미국 우선주의’에 따라, 트럼프는 취임 이래 국제무역기구(WTO)의 권위와 위상을 훼손해왔고, 다자조약인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이란 핵합의, 파리기후협약 등에서 탈퇴했다. 트럼프는 최근 유럽연합(EU)을 향해서도 비슷한 행태를 시작했다. 불가리아 출신 정치학자 이반 크라스테프가 통찰한 대로 EU는 지금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구질서의 수호자’가 될 가능성에 직면해 있다. 확고한 다자주의자이자 대서양주의자인 필자로서는 크라스테프의 통찰이 옳다는 걸 고통스럽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다. 유럽으로서는 이해를 새로 정립하고, 그걸 수호하기 위한 새로운 전략을 개발해야 하는 시기가 닥쳤다.

유럽은 미국의 대외정책에 연연하지 말고 독자적 이해를 가장 우선적으로,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따지기 시작해야 한다. EU는 미국과 달리, 트럼프가 파괴하고 싶어하는 바로 그 질서와 규칙을 유지하는 게 이익이고, 나름의 중동 및 터키와의 이해도 존재하며, 나아가 러시아와의 관계에서도 미국의 입장과는 간극이 커지고 있다. 물론 유럽은 가능한 한 미국과의 협력을 추구해야 하지만, 유럽의 독자적 이해를 희생하면서까지 그럴 필요는 없다.

유럽은 또한 자주적 국방과 경제를 위한 투자에 나서야 한다. 미국과 결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국이 기존의 역할과 약속을 파기할 경우에 대비해서다. 다행히 EU 각국이 국내총생산(GDP)의 2%까지 국방비를 증액하는 문제에 관한 생산적인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또한 유럽의회 차원의 항구적 안보ㆍ국방협력체제(PESCO)나,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신유럽상호방위구상(New European Intervention Initiative)’의 추진도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

경제적인 면에서는 유럽은 통합의 가치와 각국의 경제적 이해 사이의 충돌이라는 딜레마에 직면하고 있다. 마르크 에이스켄스 전 벨기에 외무장관은 언젠가 유럽의 위상에 대해 “경제적으로는 거인이고, 정치적으로는 난쟁이이며, 군사적으로는 애벌레”라고 했다. 하지만 오늘날의 유럽은 점차 경제적으로도 난쟁이로 전락할 위험에 빠져있다. 미국이 이란과 거래하고 있는 유럽 기업에 대해 세컨더리 보이콧을 경고하고 있는 현실은 매우 우려스럽다. 아무리 EU가 국제법적으로 정당한 비즈니스를 한다고 해도, 미국의 독재적인 달러시스템에 끌려 다닐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미래를 생각하면 유럽은 중국이나 미국 등과의 협상에 대비해 더 많은 레버리지(지렛대)를 확보해 나가야 한다. 트럼프가 미국과 유럽 사이의 협력보다 보호무역을 더 원한다면, 유럽은 미국과의 협상을 위해서라도 다른 지정학적 지역과의 통상을 강화해야 한다. 최근 미 국무부가 영국에 대해 아프가니스탄 파병을 늘리라고 요구했던 점을 생각해 보자. 만약 EU가 같은 압력을 받는다면, EU는 미국이 유럽 기업에 대한 세컨더리 보이콧을 취소하지 않는 한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지 말아야 한다.

나아가 유럽은 미국 이외의 국가들에 대한 접근을 강화하기 위한 정치적 전략을 강구해야 할 필요가 있다. 최근 캐나다 퀘벡에서 열린 G7 정상회의는 분열을 노출했다. 유럽 지도급 인사들에 대한 트럼프의 놀랄만한 행동들은 떠오르는 중국과 가라앉는 미국 사이에서 찌그러지지 않도록 중진국가들의 새로운 연합체를 구성해야 할지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EU 같은 공동체가 분열되면 다른 강대국들의 분할ㆍ점령은 더 쉬워진다. 이런 분할ㆍ점령은 러시아의 오랜 전략이었는데, 이젠 중국은 물론 미국까지 비슷한 전략을 추구하고 있다. 일례로 2016년 남동부 EU 회원국들은 중국의 투자에 얽매여 남중국해 문제에 관한 EU의 성명에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트럼프는 EU의 분열을 획책하기 위해 남동부 EU 회원국들에게 비슷한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다. 예컨대 미 국무부는 루마니아에 대해 EU의 입장과 달리, 이스라엘 주재 루마니아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옮기면 루마니아의 인권 문제에 대해 시비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표명한 것으로 알려진다. 미국의 그런 시도는 더욱 빈번해질 것으로 보인다.

EU가 어떻게 대응할지는 아직 불확실하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대응하든 EU가 새로운 길을 시급히 열어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트럼프에 대해 끊임없이 놀라고 분노하는 대신, 유럽은 스스로 행보를 이끌어나갈 독자적 외교정책을 개발해내야 한다.

마크 레너드 유럽외교관계협의회 집행이사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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