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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1 (토)

사내유보금=쌓아둔 현금? 883조 환수땐 공장 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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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년의 숫자로 읽는 경제]

[김도년의 숫자로 읽는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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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사내유보금환수운동본부 회원들이 지난 4월 18일 전국경제인연합회관 앞에서 집회를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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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3일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이른바 '삼성 20조원 분배' 발언으로 여론의 질타를 받은 뒤에도 대기업이 잔뜩 쌓아놓은 사내 유보금 탓에 경제가 어렵다는 여권 인사들의 발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정치권 '사내유보금 논란' 반복에…전문가들 '허탈'
최근 발언의 주인공은 민주당 내 '경제통'으로 불리는 김진표 당대표 후보자입니다. 그는 2003년 제6대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 장관을 지낸 만큼 국가 전반의 경제 정책을 다룬 경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역시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국내 30대 그룹의 사내유보금이 883조원에 달하는 것은 재벌 대기업들이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김 후보자가 '사내유보금'의 정확한 개념을 모를 거라곤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당의 '경제통' 의원이 '사내유보금=기업이 투자하지 않고 쌓아 둔 현금'이란 오해를 바로잡지 않고, 오히려 이 오해를 확대 재생산하는 것은 문제란 전문가들의 지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김 대표 발언을 접한 경제·경영학자들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계정에서 "수년째 학생들에게 사내유보금 개념을 설명하느라 고생했는데 어이없다"는 푸념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사내유보금 환수는 기업 알짜자산 국가 몰수 의미
정치권에서 자주 인용하는 '재벌 사내유보금 883조원'이란 수치는 '재벌 사내유보금 환수운동본부·사회변혁노동자당'이 국내 30대 그룹의 지난해 말 기준 사내유보금을 모두 더한 금액입니다.

이는 일반적 인식과 달리 '기업이 곳간에 쌓아 둔 현금'이 아닙니다. 기업이 땅을 사서 공장을 짓고 기계 장치를 도입한 유형자산은 물론 연구개발(R&D) 투자로 얻은 지적재산권 등 무형 자산의 가치가 모두 포함돼 있습니다. 또 계열사가 많은 대기업의 경우 계열사 지분에 투자한 주식도 많습니다.

따라서 정치권과 시민사회의 '대기업 사내유보금을 환수한다'는 말은 '대기업의 공장·기계·특허권·계열사 지분 등 알짜 자산을 팔아 국가가 걷어 들이자'는 의미와 다를 바가 없어집니다. 공장과 기계를 처분하게 되면 당연히 일자리도 사라지겠지요. 이한상 고려대 경영대 교수는 "투자를 하다 남은 현금이 일부 있을 순 있지만, 사내유보금의 상당 부분이 다양한 실물 자산에 투자돼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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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민주당 김진표 당대표 후보가 지난달 29일 국회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당 운영 비전 등을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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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유보금=기업 쌓아 둔 현금' 아니다

사내유보금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으려면 우선 기업의 재무제표가 자산과 부채, 자본이란 세 항목으로 이뤄져 있다는 점부터 알아 둘 필요가 있습니다.

기업이 사업을 하려면 돈이 있어야 하지요. 이 돈은 창업자와 주주들이 사업을 하려고 모은 '자기 돈' 자본과 남에게 빌려 온 부채로 구성됩니다. 이렇게 끌어온 돈으로 사업에 필요한 땅도 사고 공장도 짓고 기계도 들여오는 것입니다. 마치 사람의 몸을 구성하는 근육(자본)과 지방(부채)이 적절히 섞여 살아 숨 쉬는 데 필요한 오장육부를 구성하듯, 자본과 부채는 다양한 돈벌이 수단인 '자산'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사내유보금은 공장·기계·주식 등 자산에 투자된 자본
사내유보금은 자본의 일부분입니다. 기업이 사업을 통해 이익을 내고 남긴 돈인 '이익잉여금'과 주주들이 자본금을 보태줄 때 생길 수 있는 '자본잉여금'을 더한 게 사내유보금이지요.

막 결혼한 청년이 열심히 모은 돈(자본)과 은행 대출금(부채)을 합해 아파트와 자동차·가전제품 등을 샀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중 청년이 모은 돈(사내유보금)으로 산 게 정확히 무엇인지 구별하기 힘든 것처럼 사내유보금도 어떤 형태로 변해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돈에는 꼬리표가 없기 때문에 기업이 내부에 보유하고 있는 현금도 사내유보금에서 온 것인지, 남에게 빌려 온 돈인지 알기 어렵습니다. 이 때문에 현금보유액 상위 기업 순위를 뽑아 보면, 삼성·현대차·SK 등 최상위 대기업을 제외하면 하나금융·신한지주·KB금융·우리은행 등 시중은행들이 모두 7위권에 들어가는 겁니다. 이들 은행이 현금이 풍부한 이유는 사내유보금이 많아서가 아니라, 예금자들이 현금을 많이 맡겼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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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기업 현금 증가는 미래 불안 때문
재계에선 설사 일부 대기업이 현금 보유량을 늘리는 곳이 있더라도 이는 자율적인 경영 판단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성장 가능성이 불확실한 시장 상황에선 섣부른 설비 투자가 더 큰 손실로 돌아올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또 빠르게 추격해 오는 중국에 의한 시장 잠식, 미·중 무역 전쟁 등 위기 국면을 견딜 '비상식량'으로 현금을 보유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전통 시장 야채 가게 상인도 장사가 안되면 사업을 키우지 않고 다른 사업을 할 자금을 모으는 데, 대기업에도 똑같은 시장 원리가 작동하고 있는 셈입니다.

신장섭 싱가포르 국립대 경제학과 교수는 "과거 개발주의 시대에는 은행 대출이 시행착오와 투자 실패 등을 참고 견디는 '인내 자본'으로서 기능했지만, 최근 대기업은 사내에 보유한 자금이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며 "대기업들도 연구개발이나 신규 사업에 진출할때 실패를 자주 겪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대기업 5곳중 1곳이 이자 못 갚아…정부, 긍정적 전망 줘야
정치권과 시민사회에서 '사내유보금 논란'이 잊을만 하면 등장하는 이유는 대기업 내부에 쌓인 현금이 시중에 돌지 않아 경제가 성장하지 않는다는 시각 때문일 것입니다. 또 기업이 벌어들인 모든 이윤은 결국 노동에 대한 '착취'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이를 환수하는 것이 옳다는 마르크스 경제학적 논리도 배경에 깔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은 일부 잘 나가는 최상위 대기업들을 제외하면, 쉽지 않은 경영 환경에 놓인 대기업이 더 많습니다. 한국은행이 지난 3월 발표한 금융안정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대기업의 20.9%가 영업이익으로 이자도 못 갚는 '한계기업'으로 나타났습니다. 5곳 중 2곳(44.1%) 이상이 한계기업인 중소기업보단 대기업 형편이 좀 더 나은 편이지만, 산업 전문가들이 보는 한국 경제는 그리 낙관적이지 않습니다.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도 지난달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주최한 행사에서 "조선·철강은 이미 중국에 주도권을 빼앗겼고, 자동차·휴대전화·디스플레이 산업도 점점 잠식당하고 있다"며 "지금은 우위에 있는 반도체 산업도 중국에 뒤처지는 건 시간문제"라고 진단했습니다.

정부·여당이 기업이 신성장 산업에 적극적으로 나서 일자리를 만들어 주길 바란다면, 성장성에 대한 긍정적 전망을 주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정치권이 기업을 '현금 인출기' 정도로 인식한다면, '혁신 성장'은 커녕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대비할 수단마저 빼앗는 꼴이 될 것입니다.

김도년 기자 kim.don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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