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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6 (목)

[이은혜의 마음 읽기] 감정이 흘러넘치는 이곳, 이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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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


고전학자인 마사 누스바움의 책은 공저를 포함해 국내에 스무 권 가까이 번역되어 있다. 누스바움은 법을 해석하고 판결할 때 이성(理性)만이 아니라 감정도 고려돼야 한다며 법대에서 고전과 문학 강의를 해왔다. 법관이 될 학생들은 디킨스와 제임스의 소설 그리고 휘트먼의 시를 읽으며 공감 능력을 배운다. 사회학자나 인류학자들 역시 감정을 연구의 주요소로 도입해왔다. 이렇듯 기존의 정치체제와 법체계 혹은 이론 바깥에 있던 것들이 담론의 모서리를 하나씩 차지하면서 문학적 뉘앙스를 담은 이들 연구는 부드러운 문장과 개인적인 서사를 주특기 삼아 독자를 사로잡았다. 예컨대 문화인류학자 캐슬린 스튜어트의 『투명한 힘』은 신자유주의를 분석할 때 경제적 지표가 아닌 그 체제 속 사람들의 정동(情動)에만 주목한다. 시민들이 겪는 정서적 부침을 묘사하는 데는 ‘충동’ ‘백일몽’ ‘전염’ ‘강박’ 등의 단어가 쓰이고, 구조와 숨은 원인에 관한 논쟁은 이 책의 초점이 아니기에 페이지 바깥으로 미끄러진다.



감정흐름 중요시하는 출판계

사실관계 파악 허점 보이기도

서사와 사실이 균형을 이뤄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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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 전 출판을 시작한 나는 해가 갈수록 출판계에서 감정의 흘러넘침을 점점 더 많이 목격해왔다. 역사든 정치사회 이슈든 커다란 구조와 이념보다는 ‘나’와 ‘너’의 일상에 렌즈를 들이대면서 책들은 분노, 수치심, 동정심, 무기력 등의 감정을 독자에게서 끌어냈다. 이렇게 반대로 잡아당기는 힘이 강해지자 기존 편향은 점차 바로잡히고 우리에게는 더 많은 내러티브가 생겼다.

하지만 반작용이 오래되면 또 다른 편향이 생기는 법이다. 언제부터인가 편집자들은 눈앞의 정치 사회적 문제들을 주로 ‘감정’의 필터로 인지하기 시작했다. 사안의 연대기적 맥락이나 역사적 사실관계, 힘의 자장을 분석하는 이론은 고려되지 않고 사회 속 개인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주로 다양한 목소리를 직접 들려주거나 혹은 체제가 누락시킨 ‘마음’에 귀를 기울였다. 이를테면 주변의 많은 편집자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소식을 들었을 때 1462~1505년 이반 3세의 통치, 20세기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의 우크라이나 독립, 2014년 크림반도 병합과 돈바스 국지전 등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의 기폭제가 될 만한 사실을 파악하는 데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전쟁 피해자에 대한 동정심을 주로 내비쳤다.

문제는 책을 만들고 쓰는 사람들이 즉각적이고 개인적인 감정 반응에 익숙해지면 다음 단계로 나가는 일을 잘 시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감정은 분석되기 전에 나타나며, 불쾌하고 이질적인 감정은 일단 해소되면 현상과 사태에 대해 더 이상 분석을 밀고 나가지 않는다. 요즘 편집자 지망생 혹은 현직 편집자들이 가장 많이 읽는 것은 문학인 듯하다. 편집자가 되려는 이들에게 사회과학서로 무엇을 읽었는지 물으면 르포나 (사회적 문제의식을 담은) 에세이를 꼽는다. 이를테면 페미니즘, 비정규직, 청년 세대가 직면한 불공평에 대해 개인의 목소리를 담고 있는 에세이들이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이 타인의 문제를 내 마음으로 끌어들이는 데에는 더 첨예해지지만, 인식의 지도를 꼼꼼하게 그려나가는 일은 드물게 한다.

이것이 낳는 문제 중 하나로는 ‘팩트 체크’의 취약성을 들 수 있다. 사전을 검색하거나 인공지능을 활용하는 점검은 핵심이 아니다. 무수한 정확성 속에 고작 하나둘 숨어 있는 오류들은 문제의식을 벼리고 촘촘한 배경지식을 갖추는 ‘팩트 쌓기’를 지향하는 움직임 속에서 자연스럽게 수행되기도 한다. 만약 역사서 등 인문사회과학서를 보지 않는다면 원고를 편집하는 사람의 우연적, 자의적, 표면적 관점이 발휘될 여지가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 교차 편집을 하면서 애초에 올바르게 쓰인 텍스트를 틀리게 고치는 사례를 접한 적이 몇 번 있다. 형식은 내용의 소산이기 때문에 작가의 문장 스타일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것이지만, 사실관계를 잘못 고치거나 혹은 놓치는 것은 읽는 태도를 되돌아보도록 만든다.

한국 역사 속 소재를 발굴해 사건과 공간을 비틀며 소설을 쓰는 작가가 있다. 우리는 흔히 픽션은 무엇이든 허용한다고 생각한다. 실제가 아니고 상상이니까. 하지만 나는 그의 소설에서 사실적 오류나 자의적 해석을 몇 가지 보았다. 그러면서 아마도 작가의 동세대가 대부분 문학이라는 창을 통해 세상을 인식하면서 생긴 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의 역사에서 문학이 해온 역할은 더할 수 없을 만큼 크다. 서사는 본성상 문학적으로 구축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문학은 늘 이웃 학문과 연구에 관심을 기울이며 그 축적 속에서 자신의 문장과 사유를 쌓아 올린다. 고고학적으로 정확하게 기억하는 것, 사실관계에 대해 강박적으로 확인하는 것, 사안의 심층 구조를 계속 들여다보는 것, 한 가지 문제를 둘러싸고 선한 면과 악한 면을 동시에 읽어내는 것이 독서의 표정을 더 풍요롭게 만들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는 이유다.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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