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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3 (수)

[태평로] 재벌 3세와 피자집 형제의 '성실한 일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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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날 실린 두 편의 사연… 정주영 손자의 6년 된 善意, 월세 30만원 형제의 성공

'성실'의 가치 폄하하지 말라

조선일보

어수웅 주말뉴스부장


소위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 ·일과 삶의 균형)이 인생의 최우선인 분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이 글은 그 이상을 꿈꾸는 독자가 대상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사람 처지는 바뀌지 않는다는 고정관념의 소유자도 사양한다. 이 글은 워라밸보다 일을 더 잘했을 때 행복해지고, 가만히 앉아 투덜대기보다 새로운 시도의 실패와 성공에서 더 큰 성취감을 느끼는 사람들의 간증이다.

최근 본지 주말판 Why? 섹션에는 두 편의 인터뷰가 함께 실렸다. 재벌 3세인 정경선(32) 루트임팩트 대표와 무일푼으로 피자 알볼로를 창업해 성공한 이재욱(41)·재원(39) 형제다. 한쪽은 할아버지가 고(故) 정주영 회장, 아버지는 자산 40조의 현대해상 정몽윤 회장이고, 또 한쪽은 아버지가 있는 힘껏 도와줘 시작한 점포가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30만원짜리니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 표현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야말로 금수저와 흙수저다.

재벌과 갑질을 동의어로 여기는 세상에서, 재벌 3세의 미담을 소개하기란 꺼려지기 마련. 돈보다 선의(善意)로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서른두 살 청년에게 '위선'과 '가식'이라는 명사를 포함한 질문을 한 까닭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반문(反問)은 이랬다. "재벌 3세라고 정말 다 똑같을까요."

정 대표는 중고교 시절 또래들에게 적지 않은 조롱과 비난의 과녁이 됐다고 한다. 물론 그 정도 따돌림이나 괴롭힘당하고 재벌 후계자가 될 수 있다면, 자신은 온갖 구타까지 견딜 수 있다는 반박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보자. 정경선의 입장이라면 어떨까. '선의' 같은 모호한 추상명사 던져버리고, 대중이 재벌에게 지닌 편견과 선입관의 세계로 투항하는 게 차라리 편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는 지금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장애 아동의 인지능력을 개발하는 교육 스타트업, 노숙자 일자리 창출을 위한 택배 회사 등 13개 사회적 기업이 그의 투자 리스트다. 초심(初心)이 유지될지는 정 대표 본인만 알겠지만, 어쨌든 지난 6년간 계속되어 온 '성실한 일탈'이다.

월세 30만원짜리 가게로 시작해 연 매출 1300억원 피자 회사를 일군 형제의 인생 역전기도 마찬가지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최근에 읽은 '벼랑 끝 출산율' 관련 가장 험악했던 문장은 다음과 같다. "헬조선의 대물림이 웬말이냐. 노예 생활은 내 대(代)에서 끝이다."

충남 홍성 출신의 형제 역시 비슷한 푸념을 늘어놓을 조건이었다. 주유소와 피자집 아르바이트를 전전했고, 20대 시절 용돈은 1만원 수준이었다고 한다. 하루 만원이 아니라 월 만원. 어떻게 가능하냐는 기자의 질문에 형제는 "워낙 안 쓰는 데 이골이 났다"고 했다. 늘 걸어 다녔고, 같은 옷 빨아 입었으며, 밥은 사먹지 않았다는 것. 인상적인 대답이 하나 더 있다. 당시 맛있게 만드는 피자 프랜차이즈가 꽤 있었다면, 창업은 꿈도 꾸지 않았을 거라는 것. 매장 수 280개의 피자 프랜차이즈는, 이 형제가 꿈과 성실을 포기하지 않은 대가였다.

지난 주말 읽은 책은 미국의 글 쓰는 외과의사 아툴 가완디의 '어떻게 일할 것인가'였다. 원제는 'Better'. 그의 핵심 단어 중 하나는 성실과 변화다. 흔히 성실은 손쉽고 하찮은 덕목으로 치부된다. 하지만 오랜 시간 관찰해본 사람은 안다. 성실은 사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힘든 일이며, 조금 달라지는 일도 정말 쉽지 않다는 것을. 재벌 3세도, 월세 30만원짜리 피자집도, 그리고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어수웅 주말뉴스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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