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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3 (수)

[장석남의 시로 가꾸는 정원] [19] 벗어놓은 스타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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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어놓은 스타킹

지치도록 달려온 갈색 암말이 여기 쓰러져 있다 더 이상 흘러가지 않을 것처럼

生의 얼굴은 촘촘한 그물 같아서 조그만 까끄러기에도 올이 주르르 풀려나가고 무릎과 엉덩이 부분은 이미 늘어져 있다 몸이 끌고 다니다가 벗어놓은 욕망의 껍데기는 아직 몸의 굴곡을 기억하고 있다 의상을 벗은 광대처럼 맨발이 낯설다 얼른 집어들고 일어나 물속에 던져넣으면 달려온 하루가 현상되어 나오고 물을 머금은 암말은 갈색빛이 짙어지면서 다시 일어난다 또 다른 의상이 되기 위하여

밤새 갈기는 잠자리 날개처럼 잘 마를 것이다

―나희덕(1966~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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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단한 누님의 스타킹을 오래전 본 일이 있습니다. 뿌리친 물건의 표정에서 옥죄인 하루가 읽히곤 하지요. 스타킹은 살에 가까운 여성의 옷. 거기에도 숨은 인류사의 비애가 섞여 있을 겁니다.

한 '일하는 여성'의 저녁 일상이 들춰지면서 '암말'로 환치됩니다. '암말', 노자(老子)의 어느 구절에 의하면 '현빈(玄牝)'이라 부른 세상을 낳는 아름다운 말입니다. 짧은 순간이지만 이 암말이 걸어온 초원의 여로가 환하고도 아득합니다. 그러나 이내 그것은 욕망이 끌고 다닌 허물이라는 자각이 옵니다. 하찮은 어떤 것에도 쉽게 올이 풀어지니 그렇습니다.

건강한 암말이 이내 ‘광대’로 바뀝니다. 내일이면 스타킹은 또다시 ‘몸의 굴곡’ 욕망의 ‘굴곡’을 죄이기 위해 빨래 통으로 들어갑니다. 이 시 이후 스타킹은 더 이상 ‘의상’만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장석남 시인·한양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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