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과 臨政 시련의 피란길 5000㎞를 가다] [2] 류저우
백범 모친·동생 등 임정 요인·가족 광저우 떠나 40일만에 류저우 도착
1938년 11월 30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과 대가족이 도착했을 때 류저우는 폐허로 변해가고 있었다. 당시 일본군은 중국군 후방 기지 역할을 하던 류저우에 집중 공습을 퍼부었다. 광저우를 떠나 뱃길로 40일 만에 류저우에 도착한 임정은 그곳에 머물던 약 반년간(1938년 11월~1939년 4월) 일본군의 지독한 공습에 시달려야 했다.
임정 요인들이 1938~1939년 류저우 체류 시절 머물렀을 것으로 추정되는 호텔 러췬서(樂群社) 건물. 당시 임정 인사들은 일본군 공습이 있으면 건물 뒤로 보이는 위펑산의 동굴로 피신했다. /이슬비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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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臨政)이 류저우에 머물던 시절, 중국군이 임정 요인들에게 집무실로 제공했던 랴오뢰이(중국 장군) 공관. /이슬비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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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저우엔 임정의 흔적을 보여주는 건물이 아직 남아 있었다. 류장 남쪽 위펑구 류으스루(柳石路)에 있는 러췬서(樂群社·낙군사)는 1930년대 지은 호텔 건물이다. 임정 요인 10여 명이 이곳 2층에 머물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러췬서 뒷산인 위펑산엔 석회 동굴들이 남아 있었다. 동굴 하나당 30~50명 정도 들어갈 수 있는 크기였다. 임정 식구들은 일본군 공습이 시작되면 산속 동굴을 찾아 내달렸다. 중국 측 사료인 '결서일기'에 그 상황이 묘사돼 있다. '1938년 12월 5일 류저우. 오전 10시에 경보 사이렌이 울렸다. 허겁지겁 뒷문을 빠져나와 5분이면 닿는 산굴로 갔다. 산굴은 이미 사람들로 꽉 차 있어 허둥지둥 5호 동굴로 달려갔다. 동굴이 심하게 흔들렸다. 몇 십 분이 지나자 공습 소리가 잦아들었다. 동굴 밖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시체들로 덮여 있었다.'
강 북쪽에는 임정 국무위원들이 집무실로 썼던 랴오레이(廖磊) 공관이 보존돼 있었다. 1932년 지어진 이 공관은 1937년 중국 장군 랴오레이가 전방에 투입되면서 비어 있었고 중국 정부가 임정에 내줬다.
당시 임정의 고난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목선을 타고 류저우로 가는 도중 예인선(曳引船)을 구하려다 사기를 당했고, 바위에 밧줄을 묶어 사람 힘으로 배를 끌며 거센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기도 했다. 그 와중에 일본군의 공습도 이어졌다.
임정 사람들은 류저우로 가는 길목인 구이핑(桂平) 북항에서 발이 묶여 목선(木船)에서 20일간 생활했다. 임시정부의 맏며느리 격이었던 정정화(鄭靖和)의 회고록 '장강일기'엔 임정 대가족이 김구 선생 등이 부쳐 준 돈으로 북항 인근 시장에서 장을 봐 근근이 끼니를 때웠다는 내용이 있다.
백범 선생은 광저우~류저우 피란길은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 광저우를 떠나 창사(長沙)를 거쳐 충칭(重慶)으로 갔다. 그러나 백범은 임정 대가족의 안전한 피란을 위해 중국 정부와 끊임없이 교섭해 배와 자금 등을 조달했다. 류저우 피란길엔 김구 선생의 모친과 동생도 있었다.
일본의 공습이 계속되자 임정은 류저우를 떠나 충칭을 향했다. 먼저 충칭에 가 있던 김구 선생의 주선으로 임정은 1939년 4월 중국 정부로부터 버스 6대를 지원받았다. 4월 6일 임정 요인 40여 명이 충칭으로 먼저 이동했다. 나머지 인원은 4월 22일 러췬서 건물 맞은편 정거장에서 충칭으로 가는 길목인 치장(棊江)으로 출발했다.
독립운동가 양우조·최선화 부부가 류저우를 떠나는 날 쓴 일기엔 '일생 중 처음으로 인간의 잔인함을 체험한 류저우이기에 일본인들의 악독한 행동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오후 1시 반, 버스가 출발했다. 앞으로 2500리(약 1000㎞) 길을 가야 한다. 험준한 산길도 넘어야 한다'는 구절이 나온다. 임정 식구들은 구이양(貴陽), 치장을 거쳐 1940년 9월 충칭에 정착했고 거기서 해방을 맞이했다.
[류저우·구이핑·구이양=이슬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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